시민지식네트워크 행사에 다녀 왔다.

2007/10/30 23:17 under 기록

10월 28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시민지식네트워크 토론회를 가졌다. 27일 고속버스를 타고 7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후에, 반가운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과…

느끼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뭐 정리가 안된다. 내가 흔히 핑계대기로는, 생각의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과정이 중요하며, 또 그 과정보다는 내가 그 과정을 다시 해낼 수 있는 존재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또… 사실은 그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까먹는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정리가 안된다.

그냥 토론회에 있었던 발제문을 올린다. 당연 내가 쓴거 아니다.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모임 – 김순천

2003년 시와 소설, 생활글을 쓰던 젊은 작가들이 모여 처음으로 르포문학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뚜렷하게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노벨문학상 받은 도리스레싱이 ‘황금노트북’에서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내가 보기에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거야” 모든 게 무너지고 있는데 기존의 어법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젊은 작가들을 르포문학으로 내세웠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청계천 사람들의 삶들을, 세계화 시대의 비정규직 사람들을 기록하게 되리라는 것도, 이 자리에 이렇게 제가 서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었던 삶입니다. 작가들이 공동 작업으로 이렇게 하리라는 것도요.
그동안 4여년간의 기록작업을 통해서 저희작가들은 이제야 우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뚜렷하게 알 것 같습니다. 정말 미안한 말입니다만 저희들이 작업한 과정은 한국문학을 버리는 과정이었습니다. 한국문학에서는 얻을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이나 경제학, 역사, 구체적인 현실에서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사회학자 22명이 기록한 ‘세계의 비참’은 저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99년 부르디외는 권터그라스와의 대담에서(이것은 뉴레프트지에 실린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세계의 비참’과 같은 책을 만들었는지 말을 했습니다.

부르디외: 우리가 원한 건, 독자들이 이 모순들을 꾸밈없는 본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운 한가지 지침은 문학적인 것을 피하자는 겁니다.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드라마들을 접하게 되면 잘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원칙은 가능한 한 혹독하리 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거의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죠. … 우리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 낸 폭력이 너무나 심해서, 순전히 개념적인 분석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르디외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비정상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 ‘혹독하리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과 참다운 문학으로 가기위해 우리는 오히려 비문학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르디외의 태도에 대해 권터그라스는 유머의 전통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볼테르의 ‘캉디드’나 디드로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혹독하게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인물들을 거론합니다. 유머가 빠진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을 간접 비판한 것이죠. 이에 부르디외는 ‘진보적인 복고를 위한 강력한 보수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을 말하는데 거기에 유머를 도입하자는 그 사고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럽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극우파나 우파에 의해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토니블레어나 죠스팽 등 좌파에 의해서 행해지는 복잡한 면이 있으며 진보주의자에 의해서 강력한 보수혁명이 수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그것은 기묘한 일상적인 논리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하나가 유머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르디외의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쳤습니다. 한국사회도 ‘사실’을 말하는데 유머를 도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한 것들이 찬양받고 이런 것들이 주요 언론에서 선택적으로 유통됩니다. 일부작가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논리를 내면화 시켜 가벼운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재미나 유머가 한 세계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표현해 주고 있는 사실은 왜곡되고 있습니다. 진술들은 무겁게도 가볍게도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 중 한 측면이 선택되어 강박적으로 강요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겠지요. 부르디외는 이런 자그마한 논리가 바로 진보를 가장한 강력한 보수혁명이라 한 것입니다. 체게바라가 티셔츠나 상품으로는 소비되지만 그의 삶은 배제되듯이 재미라는 것 속에 진정한 사람들의 삶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 외에도 중국의 라오웨이의 ‘저 낮은 중국’, 존버거의 ‘제 7의 인간’,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 등이 우리작업에 영향을 많이 주었습니다. 라오웨이는 밑바닥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법과 정서적인 풍부함을, 존버거는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조세희는 소설이 어떻게 현실과 맞닿아 있는가를 표현해 주었습니다.

부서진 미래에 대하여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면서 저는 ‘시간’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간은 고여있거나 멈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시냇물처럼 느리게 마이크로 렌즈로 섬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노동력이 바겐세일 당해 건장한 한 가장이 일하는 것만으로는 가정이 지탱이 되지 않아 부인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자식들도 비정규직(아르바이트)로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해도 기본적인 생활 꾸려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이 일정한 사회계층을 형성하면서 흑인들처럼 하나의 인종이 되어 경멸을 당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 안에서 폐쇄를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명백히 민주주의에 대한 참혹한 후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 비참하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도 비정규직이 될지도 모르면서 비정규직을 비난한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무지와 공포입니다. 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갖는 순종 속에 감춰진 비참한 삶의 조건입니다.
며칠 전 시사IN 편집장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IMF 전에는 기자들이 경영진이나 윗선에서 잘리더라도 기사를 썼는데 지금은 아애 취재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기는 내부검열이 심층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정규직이나 일반 국민들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을 향한 자기검열이 전면화 되고 있어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것은 고통보다도 더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중층적이고 다층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사고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우리의 종자가 사라지듯이 정신적인 다양성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데 TV드라마 속 에피소드만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진지하게 우리 내부에 물음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선을 그어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서로 고민들을 나누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에게 부탁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