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마산: 경남대학교출판부, 2008)

2009/04/17 19:01 under
코스모폴리스
스티븐 툴민 지음, 이종흡 옮김/경남대학교출판부

I. 들어가며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데카르트부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시작점으로 삼아, 그 명제가 극단적으로 전개된 현대를 살피며, 그 같은 문제들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고집한 까닭이라고 지적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명제와 그 전개는 물론이거니와 그 명제가 나오게 된 사회적 맥락을 살피며, 또 그와 유사한 사회적 맥락에서 데카르트적 명제와 세계관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도 보여준다.

이 같은 시도가 ‘모든 텍스트는 그 맥락 속에서 읽히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쉬이 들을 수 있는 주장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데카르트는 맥락을 읽어내고 상황을 고려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였으며, 스스로가 탈상황화 하는 명제를 주장하였고, 이 책이 출간될 당시 데카르트에 대한 연구자들 또한 데카르트를 탈상황화 된 인간으로 이해해 왔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에 대한 반성적 의의를 지닌다. 이는 특히나,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시작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전’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며, 그들 관심사가 그저 근대에 머물지 않고 중세로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공부꺼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보다 넓은 지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와 같은 기능도 한다.

데카르트가 동료 철학자들에게 민족지학이며 역사학이며 시학 따위의 연구분야들을 단념하라고 권고한 시점이 바로 17세기 초였다. 데카르트는 내용 면에서나 상황관련성 면에서나 풍요롭기 그지없는 이 분야들을 포기하는 대신에 기하학이며 역사학이며 인식론 등 추상적이고 탈상황적인 분과들에만 전념하라고 권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나서부터, 내 연구의 초점은 17세기야말로 실천적인 철학관으로부터 오로지 이론에만 헌신하는 철학관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이라는 사실에 맞추어졌다. 이것은 본서의 핵심적 관심사에 해당한다. _ 책, 7.

II.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신화

듀이며 하이데거며 비트겐슈타인이며 로티 등의 해체작업 이후에, 철학의 선택폭은 아주 좁아졌다. 세가지 가능성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첬째, 철학은 순수이론적인 (근대적인) 철학의 연구 프로그램을, 이 헛된 사업이 수포로 돌아갈 때까지 고집할 수 있다. 둘째, 철학은 새롭고도 이론에 덜 치우친 작업을 추진하면서, 보다 실천적인 (포스트모던적인) 현안들이 요구하는 방법들을 계발해 나갈 수도 있다. 셋째, 철학은 17세기 이전의 전통으로 회귀하여 잃어버린 의제들을 다시 논의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더없이 유용한 의제들의 부활을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_ 책, 27.

이 책의 가장 핵심 내용은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신화에 대한 파괴인 것 같다. 철학을 크게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으로 나누고 근대의 그것이 이론철학만을 중시하고 실천천학을 등한시 했다면, 우리는 이제 실천철학이 필요하며 다시 그것을 복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한 입장이, 앞서 인용한 첫 번째 입장과 두 번째 입장의 대립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 두 입장이 어떤 공통점을 가질 수 있는 바. 그것이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신화인 것이다. 우리는 실재로 ‘실존’이라는 단어가 모든 맥락을 벗어나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저자가 진단한 대로 분명 ‘실천철학’적 측면이 보충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이라면, 그것은 근대와 공통점을 갖는 태도이다. 짐짓 생경해 보이는 17세기 이전의 전통에 대한 회복은 그런 점에서 앞선 두 태도들과 차이점을 갖는다. 그러니까, 근대에 대한 대안인 포스트모던에 대해 과연 ‘새로운’ 포스트모던만이 대안인지에 대해 저자는 재차 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은 세가지였다. 첫째는 역사적인 (사실적인) 쟁점이었다. 이 쟁점은 근대의 기원에 대한, 특히 16세기 인문주의로부터 17세기 이성주의에로의 전환에 대한 규범적 해설을 수정하기 위해 제기되었다. 둘째는 역사학적인 쟁점이었다. 이 쟁점은 우리가 과연 근대를 17세기부터 시작된 새로운 현상으로 취급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묻기 위해 제기되었다. 셋째는 철학적인 쟁점으로서, 근대성의 관념 자체를 겨냥했다. 우리는 이 쟁점을 통해서, 과연 근대의 야망이 오늘날에도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날의 지적, 실천적 관심사는 전혀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방향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는지를 묻고자 했다. _ 책, 274-275.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실천철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론철학은 등한시되어야 할 그 무엇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론철학도 하나의 유산이므로 결국에는 필요한 것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짐작컨대, 더욱 다급한 현안은 인문주의의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그러나 방만하지는 않은) 유산을 되새기는 일이지, 엄밀과학의 체계적이고 완전지향적인 유산을 (설령 그것이 확고하게 정립된 것이라 할지라도) 유지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두가지 유산 모두가 필요하다. 어느 한가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완벽한 이론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뉴턴과 데카르트가 귀감이겠지만, 이론이 실천 속에 맥박처럼 고동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인문학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엄밀과학과 인문학을 철저히 구획한 기왕의 근대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인문주의라는 근대의 반쪽을 철학과 과학이라는 나머지 반쪽과 다시 봉합하는 일이다. 이것은 철학과 과학의 구원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 17세기 이성주의적 수단만을 가지고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 이론의 (혹은 주권 독립국의) 모든 주장은, 실천과 경험이라는 그것의 뿌리 속에서 증명되지 않는다면 아무 위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_ 책, 293.

III. 기존의 생각들에 대한 수정

저자가 의문을 가지게 된 과정들을 살펴보다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지식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보여주는 대목들이 나온다. 그야말로 근대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수정하기 위한 서적인 것이다. 먼저 저자가 1장에서 “규범적 해설과 그 결함들”에서 서술하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근대상 뿐만이 아니라 중세상 또한 왜곡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가 깨는 근대와 중세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①근대는 중세에 비해 풍요의 시대였다. 근대는 근대 풍요로움의 산물이다. ②중세는 종교적 속박이 강했고, 근대 이후에 그것이 점차 완화되었다. ③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평신도가 주도하는 세속문화가 출현하였다. 이렇게 세 가지 이다. 자 그럼 이제, 이 같은 우리의 기존 생각들을 논파하는 저자의 서술을 살펴보자.

16세기에 유럽은 중단없는 경제적 팽창을 누렸고, 에스파냐의 남아메리카 식민지들로부터 보물선에 실려온 은덩어리에 힘입어 대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그같은 번영은 비꺽거리다가 결국 멈추었다. 불황과 불확실성의 시절이 뒤를 이었다. 17세기 초에 유럽인들의 생활은 결코 안락하지 않았다. _ 책, 36.

17세기에 교회의 통제가 느슨해졌다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진실은 그 반대에 가까웠다. 교황청은 기독교의 교리와 제도를 내부로부터 변혁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의 시도를 전면 거부했고 직접적인 대결을 선택했으며 프로테스탄트파를 분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정책은 트렌트 공의회 이후로 16세기 말에 착수되었지만, 30년의 유혈 참극이 발생한 1618년부터 극단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중략)… 과학자를 위시한 지적 개혁자들에 대한 신학적 압력은 17세기 초반에 약화되기는 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다>. _ 책, 38-39.

17세기에 평신도들 사이에서 교육과 문자해독의 능력이 확산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교육과 문자해독력의 확산에 힘입어 세속적 학문은 유럽 문화 전반에 대해 영향력을 키워갔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인쇄된 서적은 이미 1600년 이전에 100년도 넘게 통용되어 오던 참이었다. 근대 <문학>이 1600년 이후에야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시험을 통과하기 힘들다 – 이 점에서 근대 문학은 근대 과학이나 근대 철학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는 서유럽에서는 1520년 경에, 이탈리아에서는 그보다 앞서 진행되었던 일련의 변화들로부터 태어난 때늦은 후예들이었다. …(중략)…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이 만든 문화를 17세기 중반의 문화와 나란히 검토해 보면, 근대의 세속문화가 오로지 17세기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_ 책, 39-40.

IV. 다른 대립적 논쟁들에 대한 저자의 의견들

이 책에서 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점은, 다른 여러 대립적 입장들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책을 읽을 때는 2가지가 특히 눈에 띄었는데,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대립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모던-포스트모던 논쟁에 대한 저자의 논평이다. 특히나 모던-포스트모던에 대한 논쟁에 대한 저자의 논평에서, 모던-포스트모던에 대한 논쟁의 성격 자체가 애초에 서로가 지칭한 용어의 정의부터 제대로 하지 않고 시작한 허무한 논쟁이라고 지적되는데, 이러한 지적을 통해서 우리의 “읽지 않아도 될 책 목록”에 모던-포스트모던 논쟁과 관련된 서적들이 등재되는 순간이다.

이 점에서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 비판자들과 옹호자들은 동문서답의 논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 작가들이 <근대성>의 지속적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들은, 하버마스가 그것을 <긍정하기 위해> 지적한 20세기의 특징들과 일치하는 대목들이 많다. 양 진영은 마치 한 동전의 양면을 취하듯이 <근대성>이라는 쟁점의 양면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양 진영의 차이는 내용적인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근대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양 편이 서로 다른 뜻을 부여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_ 책, 282.

V. 중세에서 찾는 현재의 논의들

이 책은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문학, 철학, 과학, 등등을 다루는 저자의 박학함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저자가 어쩔 수 없이 에세이 형식을 빌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이러한 저자의 박학함은 어떠한 사상가들이 어떠한 전제들을 공유하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소개해주고 있어, 공부하는 이들에게 사상가들의 지도를 그리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시대상황을 다루는 책의 특성상, 각 사상가들이 어떤 시대에 반응했는지도 이해하기가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에 이루어지는 여러 논의들과 비슷한 태도들을 우리가 중세라고 일컬었던 그것들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나는 이 책에서 파괴적 의미의 ‘회의주의’가 아닌, 관용적이고 겸손한 의미에서의 ‘회의주의’를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