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를 위한 변명.
토요일, 5월 13th, 20062006년 바나나빵 주최 5.18 영상회 찌라시 기고문
패자를 위한 변명.
5.18 : 폭력으로 점철된 국가와 시민의 싸움, 민중의 철저한 패배. 인간의 잔학성을 확인케 한 지우고 싶은 기억. 이제는 역사.
인간은 폭력적이다. 삶 자체가 죄악이며 폭력이다. 인간 문명을 유지시켜주는 많은 요소들은 인간 외의 종(種)들을 배제한다. 종의 범위까지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폭력들을 행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그러한 인간사이의 폭력만이라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서로에게 행사되는 폭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필요로 하며, 민주주의는 대화를 위한 절차들을 거추장스럽게도 만들어 놓는다.
‘근대화’의 틀 속에서 한국 역사를 바라본다. 근대의 ‘주체’, 그 속에는 민주주의 또한 포함되어 있다. 광복 이후, 혹은 광복 이전, 멀게는 조선시대까지, 각자의 주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들은 민주화의 도정 속에 있다. 대화할 수 있는 자격, 권리를 갖는다는 것. 비록 이기적일 수도 있으나, 그것 또한 민주화 운동이다.
한국 현대사의 2대 민주화 운동은 4.19와 5.18을 들 수 있다. 4.19는 ‘승리’한 투쟁이었고, 5.18은 ‘패배’한 투쟁이었다. 4.19는 이승만의 하야로 절정을 맞는다. 승리한 투쟁은 그 이후에 에너지를 갖기 힘들다. 눈으로 ‘보이는’ 이승만의 하야를 이루어 낸 이 사건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노력으로 지속되지 못하였고, 박정희 독재를 방관하게 된다.
하지만 5.18은 다르다. 비록 패배하였으나,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패배하였기에 국민들은 더욱 목마를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87년 6월 그 이후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다.
하지만 아직도 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는 대추리 사태는 국민이 얼마나 대화의 상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추리 에서의 시민들과 전경의 대치. 눈앞에 ‘보이는’ 폭력의 더러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몽둥이와 방패에 맞서, 우리 또한 ‘보이는 것’을 수단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더럽게, 때론 투박하게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명제는, 이미 존재하는 폭력, 이미 행해진 폭력을 정당화 하는 명제이다.
우리는 좀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생활관 제도 개선에서부터, 등록금 책정까지. 대화의 상대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 자체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다. 절대 우리의 ‘주체’됨을 놓아서는 안 되겠다.
패배한다고 하여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의 5월도 87년의 6월을 위해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렸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