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2월, 2007

김기덕과 박민규

일요일, 2월 25th, 2007

원대로씨 블로그에 들렀다가, 이거 그냥 감이 정성일씨 글이다. 싶어서, 검색해서 찾아보니 과연 정성일씨 글이다. 김기덕과의 인터뷰인데, 김기덕의 말을 보다가 괜히 박민규가 오버랩 된다.

진지함과 가벼움간의 갈등 속에서, 내 숨을 트이게 해준 것은 그렇게도 멀리하던 소설이었고, 그 중에서도 박민규였다. 특히나, 발표까지하게 되었는데, 평론가들에 대한 신인 박민규의 반응 과 김기덕의 태도는 공통점이 있다. 어쨌든, 평론은 원작에 기생한다.

김기덕도 자신에 대한 해석에 어느정도의 상처를 보여주는데,
박민규를 대상으로한 비디오대여점연합에서 소송준비까지 한 에피소드와 그 반응을 살펴보면 ㅡ;;;
어느정도의 노출을 은유와 비유와 예술일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은 문학이든 영화든 상관없는듯 하다.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서야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불쌍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내동생

화요일, 2월 20th,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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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처자가 내 유일한 여동생인데, 87년 1월 28일생, 보다시피 날 닮지 않아서 얼굴도 희고 얼굴에 살이 붙어 있다. 예능에 재능이 있어,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조금 배웠다.(지금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다.)

성격은 조금 신경질 적이고 충동적에다가 겉보기 보다 내면이 엄청 우울한 상태이다. 몇 년째 고질적인 중이염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귀를 잘라버린 고흐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한다. 이런 상태라도 뭐… 충격적 물리 폭력과 일종의 정서학대의 결과물치고는 뭐, 그런대로 봐줄 만 하다.

청소년 시절부터 그 고집이 대단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중퇴 이후 에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진학하느라 다른 친구들보다 학교가 1년 늦다. 한성대학교 에니메이션 학과에 진학해서, 밴드도 하고 공모전도 나가면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 또 대박 발언을 했다.

휴학 후 돈 벌어서 프랑스로 유학을 가겠다는 것.

집안의 현실적인 사정을 고려하여, 2년에서 3년간의 기간을 두고, 프랑스어 공부와 다른 잡다한 공부를 하면서 돈을 벌어 스스로 프랑스대학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것.

그의 변은 대충 이러한 내용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에니메이션인데, 한국에 에니메이션 학과라는 것 자체가 유행적으로 생긴 것이고, 학문적 기반이 없다.

그러니까… 단박에 쪼개자면, 학교에서 배우는 게 없다는 말이다.

역시나, 우리네 어머니께서는 걱정에 불안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사실 이놈이 앞서 말했듯이 신경질 적이고 충동적이고, 겉보기와는 달리 병에 시달리는 녀석이라, 어머니께는 얼마간의 불안함을 선사한다.

꿈꾸는 자의 꿈은 꺾는 게 아니다. 그 어려움을 알려주면 된다.


등록금 –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일요일, 2월 11th, 2007

등록금 관련 이야기들이 인트라넷을 뜨겁게 하네요. 높은 인상률에, TV에서도 전국 대학들의 높은 등록금 인상률에 대해서 말들이 많네요. 이례적으로 공등학위에서도 분위기조성용 만평들과 성실한 보고가 학우들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공등학위가 참 수고가 많습니다.
글 쓰는 것 참,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일이지요. 이야기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자신이 펼친 주장을 사수하려 신경 쓰이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말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트라넷은 신경 끊고 들어가지 말라는 선배님들이 많았나 봅니다.
저도 이제 이런 거 좀 많이 귀찮아 진 터라, 감정배설용 짤막한 코멘트나 달고 말다가, 학우들의 많은 글들을 보면서, 알면 안할 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다 좋은 논의를 위해서’라는 동기로 포장한 체, 글을 쓰게 되지요. 그리고,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다소 재미있는 결론을 내보려고 합니다.

등록금 협의 왜 하는가?
이렇게 피곤한 등록금 협의를 왜 하는 걸까요? 일반적으로 교육은 공적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육이 사회에 끼치는 효과가 그에 드는 비용보다 높은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여 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를 의무교육으로 보장하고 있고, 보다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의무교육이 보다 더 확대되어 있지요.
거기에 더불어, 대학이라는 학력이 가지는 일종의 권력은 쉽게 무시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대학교육에 있어서 등록금의 과도한 책정은 ‘돈이 없어’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양산하게 되고,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되면 교육기회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교육기회의 불균형은 서민들이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를 점차로 박탈하게 되어, 대학을 부와 기득권을 세습하는 장치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부보증학자금대출의 슬로건이 “능록과 의욕이 있으면 누구나”인 이유도, 학자금대출의 금리를 낮추려는 정부의 노력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립대학교의 경우
대학의 기능 중 하나인 연구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대학 설립은 권장 받을 만한 사안입니다. 물론 각 개개 대학의 입장에서는 타 대학과의 차별성을 찾고, 각각의 정체성 기반 하에서 학문 연구하는 것이 그 입장이겠으나, 국가적 차원에서는 (다양한 사상을 관용하고 인정하며, 차이가 존재함으로 인류가 발전한다는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집단적 연구를 실현할 방법의 하나로, 사립 대학의 설립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인 교육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교육이 사회에 끼치는 긍정적 요인과 등록금의 사회적 효과로 인하여 사립 대학교의 운영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게 됩니다. 단지 자유경쟁적 시장의 영역에서 대규모의 사교육이 이루어 진다면, 이는 교육불평등을 야기함으로 적극적으로 제재되어야 할 대상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학 설립 인가에 있어서 일정한 절차와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정부의 현실적 한계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부의 교육에 대한 투자가 넉넉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의 논의가 끝없는 논쟁이긴 하지만, 결국 정부재정이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정부의 넉넉하지 못한 재정에서, 정부의 재정적 의무를 사학재단에게 열어두는 것에서도 사립대학의 의의를 한번 더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사학의 운용도 공적영역인 교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등록금에 대한 의존보다, 재단의 재산, 정부의 지원, 각종 기부금 사용을 늘려야 하는 이유와 요청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대학이 설립되면 ‘사학 재단’은 공적 영역에 참가하는 만큼, 교육에 투자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적 이유로 사학법인에게 일정 기준만큼의 대학운영경비를 부담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학설립·운영 규정 제8조 (대학운영경비의 부담) ①학교법인은 그가 설립·경영하는 대학에 대하여 매년 수익용기본재산에서 생긴 소득의 100분의 80이상에 해당하는 가액을 대학운영에 필요한 경비로 충당하여야 한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소득의 범위는 교육인적자원부령으로 정한다. <개정 2001.1.29>
대학설립·운영규정시행규칙 제11조 (소득의 범위) 영 제8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수익용기본재산에서 생긴 소득의 범위는 수익용기본재산에서 생긴 총수입에서 당해수익용기본재산에 관한 제세공과금 및 법정부담경비를 뺀 금액으로 한다. 이 경우 총수입중 수익사업회계로 경리되는 수익용기본재산에서 생긴 수입은 그 수익사업회계로부터 일반업무회계로 전입되는 금액을 말한다.
(대학설립·운영규정시행규칙 제2조 에서는 대학설립·운영규정을 이하 “영”으로 칭한다고 말한다. 제11조에서 말하는 ‘영 제8조제2항’은 대학설립·운영규정 제8조제2항을 일컫는다.)

하지만, 관련 규정에서 알아 볼 수 있듯이, 이는 수익용기본재산에서 생긴 소득의 80% 이며, 이 금액은 법인의 수익재산에 의해 가변적이며, 없을 시 0원까지도 가능하게 됩니다. 이 규정은 사실상 법인전입금을 제한하고 있는 유일한 규정이며, 이러한 이유로 한 논문에 따르면(한국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사립대학등록금인상의문제」2003), 학교 운영수입 대비 법인전입금의 비율이 5%~7% 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 법인은 학교 운영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학교 운영에 기여하고 있는 바가 극히 미미 함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사정은 정부차원의 대학지원이 적은 이유로, 공립학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작은 결론
학생이 학교의 한 구성원으로써 참여를 요구할 수 있는 등록금 책정에 있어서 민주적인 요청과 더불어, 앞서 말한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학생들의 등록금 책정 참여, 더 나아가서는 등록금 투쟁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다양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왜 노무현 탓이냐고?
사실 이러한 대학 등록금 책정에 관한 정부개입의 요청은 지속적으로 있어왔습니다. 노무현 정부 이전에도요. 하지만, 최근 들어 급격하게 오르는 국립대학교 등록금 인상률과 사립대학교의 공격적 투자 배경에는 노무현 정부의 대학개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작금의 대학에 문제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학법도 개정하였습니다. 더불어, 대학 통폐합을 시도하여 각 대학들 간의 경쟁을 과열시킨 측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그러한 시도를 깍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이 조금 있다는 거지요.)
각 대학들의 등록금 인상 명분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대학경쟁력 강화입니다. 노무현정부는 대학교육의 개혁을 시키기 위해서는 대학간의 경쟁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을 통해 등록금이 어떻게 될지는 간과한 것 같습니다. 대학들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등록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며, 현재 학교측의 공격적 건물 증축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피 빨리는 건 수혜자 부담원칙에 내몰린 대학생들입니다. 우리들은 한국교육의 거듭남을 위한 희생자들인 걸까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학교차원에서 올바른 권리찾기 뿐만, 아니라 정부가 교육영역을 책임지고 관할할 것을 요구하고, 대학간의 경쟁적 등록금 인상에 대한 국가적 대안을 제시할 것을 정부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공등학위 보고서에서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대학교 기획처장님들이 모여서 캠프를 합니다. 이 캠프에서 대학교 보직교수들 간의 등록금 인상률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지요. 실제 협상테이블에 앉아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타 학교가 얼마나 인상되었는지가 굉장한 심리적 압박요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학간 연대해서 등록금 투쟁을 하는 이유지요.

마지막으로 가장 섬세한 이야기.
사실 노무현 이야기는 양념이었습니다. 그렇게 확고하게 주장하고 싶은 부분도 아니고, 조금 더 다듬어질 부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등록거부나 시위가 절대 한동대학교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한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위에 대한 입장을 전쟁에 비유하곤 합니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한다 하더라도, 총을 쏘지 말아야 하고 전쟁을 거부해야 할까요? 결국, 어떤 경우에는 전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학교측이 등록금 책정에 어떤 태도를 보이냐에 따라서, 시위를 불살라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가 어떻게 협상에 임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건 시위나 등록거부를 해야 할 내용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내리는 것이겠지요. 제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렇나 학교측의 태도에 대한 논박이나 검증이 없는 상태로 단지 분위기 잡는 행동만 했을 뿐인데도, 시위라도 할 것이냐고 묻는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학교는 사실 학생을 한번도 주체로써 인정한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도 한동 신문사에서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쓴 적이 있었고, 기획처장이 부인해서 기자가 사과하는 해프닝도 벌어지기도 했었는데, 기획처장의 작년 태도에서도 그렇고, 보고에서 드러나는 올해 협상에 임하는 자세 또한 마찬가지 인 것 같네요.
작년에 등록금 협의 할 때에 학교 직원은, “한동대학교에 여태까지 등록금 협의는 없었다.”고까지 말하더군요. 그 이전엔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자료 분석 하나 없었고, 총장 한번 만나고 끝냈다.”며, 굉장히 학생들을 격하하는듯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 직원들은 “작년 등록금 인상률은 원래 5%정도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작년 공등학위가 기획처장 비위 상하게 해서 7%로 인상하게 되었다.”고 올해 공등학위에게 말하고 있다는군요. 합리적으로 책정되어야 할 등록금이 단지 기획처장의 빈정상함으로 인해 그 인상률이 올라갔다는 것은 어이없을 뿐더러, 그 말 이면에는 ‘기획처장 비위 상하게 하지 마라.’는 속뜻이 숨어 있지요. 학교랑 하하 웃고 아름답게 끝내든, 자료검토 후에 조금 공격적으로 끝내든, 학교측의 내심과 호박씨는… 결국 학생을 무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이 합리적인지에 관한 논리와 구체적 데이터에 근거한 세부적인 작업은 다른 분들께서 해주시겠지요. 좀 원론적인 이야기가 필요해 보여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긴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정희진

금요일, 2월 9th, 2007

종교는 우리에게 죽음 뒤에 삶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죽음 전에 삶이 있다고 말한다. 노동처럼 사랑(보살핌, 대화, 정치적 연대 등을 타인과 공유하는 활동)과 섹스는, 생존의 조건이자 인간의 존재 형식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마더〉라는 영화에서 70대 여성이 30대 남성과 사랑을 나눈다. 게다가 그는 딸의 애인. 고통 받는 그 여자는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나 봐”라고 흐느낀다. 죽을 준비 중의 하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시한부 환자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투자는 회수하기 힘들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효율성을 둘러싼 회의와 논란에 부닥친다. 이들을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삶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이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의 가치는 평등하다는 의미다. 젊음은 ‘좋은 시절’이고, 중년은 ‘해질녘’인가? 나이를 계절이나 하루 일과에 비유하는 것은, 위계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일흔살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심’(從心所欲 不踰矩)인가? 그렇다면 성인은커녕 불법적인 사랑의 욕망에 괴로워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한심함을 넘어 노추(醜)일까? 열다섯 지학, 서른 이립, 마흔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연령주의는, 어떤 면에서 서구 근대성의 핵심 논리인 생애주기와 닮아 있다(정확히 말하면, 생애주기가 연령주의의 일부지만).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과 규범을 정의하는 생애주기는, 젊은 비장애인 남성, 즉, 가장 ‘생산력 있는’ 인간을 노동자 모델로 확보하기 위한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중세에는 아동기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성차별과 함께 연령차별이 근대 국민국가의 주요 조직 원리가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사십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식의 언설은 문제다. 자기 성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젊은이’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죽음 직전까지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 혼돈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인간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옥죄고 있는 권위주의, 계급과 교육 문제, 획일주의의 상당 부분은 나이에 적합한 정상성을 요구하는 생애주기 문화 때문이다. 나이 듦이 인생 포기가 아니라면, 왜 황혼 이혼이 뉴스거리이며 예순 넘어 대학에 들어가고 오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안 되는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누구나 언제든지 모든 분야의 초보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가장 민주적인 사회가 아닐까.

욕망은 결핍에 대한 것. 결핍이 충족되면 욕망도 사라진다. 그래서 ‘불혹의 마흔살’은 어불성설을 넘어 잔인하다. 대개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을 잃게 된다. 때문에 ‘늙을수록’ 결핍에 괴로우며, 그만큼 욕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십 불혹설’을 퍼뜨리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성별과 계급 자원으로 나이를 극복할 수 있어서 결핍의 고통을 덜 받는 ‘가진 자’거나, 자기 꿈을 좇기가 두려우니까 남의 꿈도 비웃는 비겁을 ‘집착 초월’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안전은 미신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혹당하면서, 자신을 가능성에 개방시키고,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도전에 매료되는 삶은 개인의 성장일 뿐 아니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블로그를 열었다.

목요일, 2월 8th, 2007

이제 블로그를 연다.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들과 사소한 이야기들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