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3월, 2007

준희형과 크레이지 쨈

토요일, 3월 24th,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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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나. 승화형이 찍어준 사진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전날 밤에 비가 오고, 오늘 땅이 젖은 바람에…돈 깨지는 사고가 났고 ㅡ;; 인라인 타다가도 젖은 땅 때문에 바닥에서 좀 많이 구른 하루였으니…

저 사진도 겉보기엔 멀쩡해도, 찰과상으로 오른쪽 무릎에 수건을 감고 있었다고…

참 일많은 하루였다.

지금 그래서 속이 많이 쓰리다 ㅠㅠ


<창간호> 3면 : 독대(獨對)의 의미론

금요일, 3월 23rd, 2007

독대(獨對)의 의미론
“무엇보다 학생단체 내부의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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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ed by 전덕규

학생대표의 의무

학생회 조직에서도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을 적용시키기 위해 많은 학생대표들을 두게 되는데, 공등학위(공정한 등록금 협상을 위한 학생위원회)도 예외는 아니다. 공등학위 내부에도 견제와 균형과 더불어, 화합과 업무분담이 잘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각 위원들이 학생의사를 대표하는 학생대표로써 그 의사가 학교측에 전달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하는, 개개 위원의 의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정보의 중요성

규범상 지위가 동등한 위원들이라 할지라도, 그 내부적인 정치에 대해서 간과할 수는 없다. 공등학위가 어떤 입장을 정하기 위해서는, 현재 학교가 처해있는 상황 그리고 학교측의 입장 등을 소상히 알고 그에 따른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정보가 중요하게 된다.
여기서, 대표들 간의 균형을 위해서는 정보 또한 평등하게 공유되어야 하는데, 학교와 공등학위 간의 의사소통 창구가 학생과-총학생회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고려하면, 정보의 측면에서는 총학생회가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정보의 균형을 위한 노력

이렇게 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공등학위 내부에서도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게 된다. 여러 방법이 많이 동원되기는 하지만, 전달받는 정보는 설명자의 수고와 관점을 통한 왜곡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는 정보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진다. 때문에, 개개 위원들은 정보에 직접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이번 공등학위는 합숙이라는 방법을 취했다.

1월 24일에 등록금 협의는 끝났다

결국 등록금 협의의 마무리는 총장과 총학생회장과의 독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독대가 갖는 함의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총장과 총학생회장 둘만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은 그 대화과정에서 드러나는 정보들에 대해서 한동 사회가 차단됨을 의미한다. 또한, 총학생회장 외의 공등학위원들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의 권한을 박탈당하게 된다.

총장과의 독대를 피해야만 한다

총학생회장과 총장간의 독대를 방관한다는 것은, 총학생회장과 총장 사이에서 이루어진 의사결정과정에서 공등학위원들이 배제되는 것과 그 사이의 대화에 대해 정보가 차단됨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권력분립을 무너뜨리고, 타 학생대표들의 책임을 총학생회장에게 전가하는 행위이다.

이는 반복되는 현상이다

오르기만 하는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측의 인상근거만큼이나 학생단체 내부의 반성도 함께 이루어져야만 한다. 매해 이루어지는 총장과 총학생회장과의 독대에서, 우리는 한동사회의 비민주성을 읽을 수 있지는 않을까? “독대를 금하라.”

전덕규


한동 학생언론 한소리 창간!!!

금요일, 3월 23rd, 2007


학생언론 광고 포스터

토요일, 3월 10th,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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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그리고 크게 하나되도록 연결되는 전덕규식 포스터


정신-물질 이분

목요일, 3월 8th, 2007

신라 문무왕의 유조(遺詔), <삼국사기>

… 산곡은 변천하고 인간세계는 옮겨가니 오왕의 북산 무덤에 어찌 금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으며, 위왕의 서능을 바라보는 것도 오직 동작대의 이름만 듣게 된다. 옛날에 만기(萬機)를 다스리던 영왕(英王)도 마침내 한 줌의 흙무덤을 이루어 초부와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부르고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멍을 파고 있으니, 이는 한갓 자재만 낭비하고 거짓만을 책에 남기며 공연히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만드니, 이는 유혼(幽魂)을 오래도록 건지는 도리가 아니다. 고요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픔이 그지없을 따름이니 이와 같은 것은 나의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임종한 뒤에 10일이 되면 곧 궁문 밖 뜰에서 인도의 의식에 따라 불로써 살라 장사지내라. 복례의 경중은 본래부터 정한 법도가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약한 것을 좇아라…

墓碑銘 – 김광규

한 줄의 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역사는 지나간 사건이 있었고, 이에 역사적 기록이 잇따른다. 이로써 하나의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 탈바꿈이 되는데, 그 역사가가 연구하는 대상인 사료는 물질적인 것이다. 여기서, 결국 정신을 담아내어 전달하는 것이 물질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예수가 위대한 이유는, 책을 쓰지도 않았는데 수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정신적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에 하나의 위대성을 찾는다. 스스로는 자신의 정신을 물질화 하지 않았으나, 그의 정신을 떠받는 이들이 그를 물질화 시켰다. 그만큼 그 삶이 정신속에 자연스럽게 물질화 되었으며, 그 물질화의 결과는 아마도 인간일 것이다. 하나의 사실로써 예수가 인간을 창조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는 인간을 창조하였으며 그는 신의 칭함을 받을 자격을 가졌다. 성경이나 신화에 대한 일종의 해석인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고 성경 그 자체가 끝업이 재해석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정신을 떠받는 이들의 관점이 녹아 있는 성경 그 자체 보다, 예수 혹은 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학문의 학습이라는 것이, 대체로 정신사의 연구라는 범주에 포함된다. 역사의 변천이, 정치사에서 제도사, 그리고 사회경제사, 다시 문화사로… 그렇게,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명제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신을 물질화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철학사의 연구에서, 현대에 와서 근대 철학을 이야기 할때, 그 대상화와 진리의 절대성에 폭력성을 부여한다. 플라톤의 질식할 것 같은 진지함은, 역사의 재사료화, 그 기록 – 물질의 딱딱함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전달되어진 플라톤의 像은 분명 질식할 것 같은 진지함과 일그러진 얼굴이었으나, 실제로 그는 문학가였으며, 많은 질문들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여유를 보였다. 진리를 저-먼 세계로 미뤄버린 플라톤에게서 포스트모더니티를 읽는다면, 너무 과민함인가? 오히려, 그를 해석하는 우리가 질식할 것 같은 비인간적 진지함으로 그를 바라보았기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아닐까? 저-먼 곳에 있는 플라톤의 진리를 우리의 눈 앞에 보여준 것은 당신이 아닌가?

우리는 ‘사랑’이라는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서, ‘편지’나 ‘선물’ 따위의 물질화를 시도한다. 연애의 소비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아마도 정신에 바로 다다를 수 없는 인간의 인식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겠지만, 인간 인식이 언제나 우회해왔다는 점을 상기시켜 보았을 때,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결국 자신의 ‘사랑’을 물질화 하는 욕구를 참을 수 없을 것이며, 소통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때문에, 이는 끝없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 결국, 물질 소비 행태의 정도에 대한 답을 내릴 것이 요구된다. 아~ 이는 얼마나 세심한 논쟁지점인가??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 精卽是物 物卽是精 !! 그 사이의 소통개념을 필요로 한다고 비판하겠지만, 소통하지 못하는 비판자의 인식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통에서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아아~ 이 얼마나 질식할 것 같은 블로그 인가?? 나의 여유는 어디간체 말이다…


체(體)용(用)론

금요일, 3월 2nd, 2007

… 헌데 내 눈에 보이는 자네란 녀석은, 체(體)나 용(用) 사이에 어떤 부조화를  갖고 있는 듯하다구. 용에 비해 체가 너무 크거나, 체에 비해 용이 너무 크다구. 용에 비해 체가 큰 경우 , 거기엔, 아직 잠 못 깨고 죽음처럼 뻗치고 누운 황폐가 따라 있고, 체에 비해 용이 더 큰 경우, 거기엔 일종의 삼재팔난이라고나 해야 할 무질서가 덮여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체를 택한다면, 그 용적을 넓히거나 좁힐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용을 택한다면, 그 수근(水根)을 끊거나, 더 깊이 파고드는 수 뿐이다. 그것은 자네게 고통으로 던져진 것이야. 이보라구, 자네는 헌데 어째서 그따위로,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보고만 있는거지? 잠이 여태도 깨인 게 아니라면 죽장 서른 대로 하여, 너의 그 쓸모없는 대가리에 구멍을 뚫어 놓을 터인데, 그것은 불순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구… _ 박상륭著 [[죽음의 한 연구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