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21일 토요일 3시
금요일, 4월 20th, 2007집에 들어오니 새벽 2시. 도서관에서 공부는 아주 조금 하고, 신문에 실을 만평 그림 끄적대다가… 집에 오니, 괜스럽게 이가 닦고 싶다. (자기전에 반드시 이를 닦는 성실한 어린이는 아니다.)
요즘 사랑니가 또 새로 나는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사랑니를 4개 발치 한 상태, 위쪽 사랑니 2개를 빼고 나서 아직도 갈라져 있는 잇몸이 또 다시 나기 시작한 사랑니로 인해 벌어지고 있음. 어쨌든… 아무리 닦아도 개운하지 않은 이.
별것 아님에도, 왠지 내가 해방되는 느낌의 두건. 수건같다는 이들이 많으나 이래뵈도 싸이마켓에서 만원을 혹가하는 거금을 투자하여 장만한 것이라는… 두건의 가운데 부분이 밋밋하여, 아침에 머리감고 바로두른 수건설(說)에 한층 신빙성을 더해주지만… 조만간에, 아크릴 물감으로 칼라풀하고 멋진 그림을 내가 그리기는 뭐하고 누군가에게 부탁할 계획이라는…
이 두건이 자신에게 폭력이라는 정미나씨, 기독교 고전강독 수업 시간에 평화주의자들에 관한 이야기에서, 나는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가치판단이 선재된 개념임을 지적하였고, “정당화 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논의는 이미 선재된 가치판단을 되풀하는 논의임을 지적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폭력]에 대해서 결론은 못내리고, 나의 두건이 정미나씨에게 시각적-미학적 폭력임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세상을 바꾸는것 따위에는 관심 없어, 적당히 일하고 잘먹고 잘놀고 잘사는게 인생의 목표” 라고 아주 힘주어 크게 말하는 자유로운 여성(?) 어쨌든, 그와 함께한 분식당에서의 유쾌한 논의와 함께 자행된 폭식을 나는 잊지 못할지니… 우리의 논의는 생각보다 깊숙한 곳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연애에 관한 남녀의 담론으로… 어쨌든, 어쩌다가 언제나’진도’를 묻는 남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자, 여자도 마찬가지라며 하나의 ‘문화’로 치부해버리는 정미나씨… 하지만, 내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문화’가 아니었음, 대화를 마치고 난 뒤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며, ‘광장’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밑줄은 내가…
광장
그날 밤 윤애가 일찍 감치 자리를 뜨고 나간 뒤에, 명준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그녀가 앉았던 방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흐뭇한 기쁨을 즐긴다. 잠자리 날개 모양 풀이 꼿꼿한 모시적삼을 입은 그녀의, 깔끔한 자태가, 자기 품에서 숨을 할딱이던 바로 그 몸이라는 일은 그에게 자랑스러움을 준다. 그렇게 튼튼하게만 보이던 돌담의 한 모서리가, 멋쩍을 만큼 쉽사리 허물어진 일은 거짓말 같다. 연애가 희한한 ‘기술’로만 비치던 명준에게는, 뻔히 자기 손으로 만져 본 승리조차도, 그러므로 허깨비나 아니었던가 싶게 믿어지지 않는다. 입술을 갖다 대자 대뜸 그녀의 입술이 열리던 생각을 하고, 그는 빙그레해진다. 그녀가 베테랑인가? 아니 숨차서 허덕이는 참에 그렇게 된 것이겠지. 내내 두 팔을 드리운 채로 였지. 내 허리에 매달리거나, 목에 걸어 오지도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저 갑작스레 당하고만 것일까. 아니, 그녀의 혀는 토막난 뱀처럼, 욕정에 젖어서, 꿈틀거리지 않았나. 부드럽게 젖은 그 살점은, 분명히,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진 전리품은, 사람인 성싶었다. 그의 만족은 그처럼 크다. 그녀의 마음을 그 동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의 한 군데를 내받은 지금에야 마음놓고 믿을 수 있었다. 마음은 몸을 따른다. 몸이 없었던들, 무얼 가지고,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자 하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거다. 그렇게 보면 햇빛에 반짝이는 구름과, 바다와 뫼, 하늘, 항구에 들락날락하는 배들이며, 기차와 궤도, 나라와 빌딩, 모조리, 그 어떤 우람한 외로움 이 던지는 그림자가 아닐까. 커다란 외로움이 던지는. 이 누리는 그 큰 외로움의 몸일 거야. 그 몸이 늙어서, 더는 그 큰 외로움의 바람을 짊어지지 못할 때, 그는 뱄던 외로움의 씨를 낳지. 그래서 삶이 태어난 거야. 삶이란, 잊어버린다는 일을 배우지 못한 외로움의 아들. 속였기 때문에 또 다른 속임의 대상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오입쟁이의 계집들, 그게 삶이야. 이거다 싶게 마음에 드는 계집을 만났을 때만, 오입쟁이는 고단한 옷차창을 그치고 파자마로 갈아입을 것이며, 으뜸가는 아이를 낳았을 때만, 외로움은 씨 뿌리기를 그칠 것이며, 공간은 몸 푸는 괴로움을 벗을 거야. 삶이란, 끝가는 데를 모르는 욕정 탓에 괴로운, 애 잘 낳는 여자의 아랫배 같은 것.
나는 뭔가를 보고싶어하고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한 것인데, 만약 이 이야기가 통하였다면, 어떤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인 ‘선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논의가 옮아갔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며… 다음에 또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을런지??
어, 쨌, 든, 상처와 민감함에 대한 이야기. 인간의 존엄과 자존의 이야기들을 나눴음.
요즘 묵상하는 어거스틴의 시간개념은 주관적 지각과 인식의 깊히 그리고 영원.
그것에서 연결되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굉장히 인간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는 개방된 개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상처는 영원한 시간.
이제 잠이나 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