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5월, 2007

김교신

수요일, 5월 23rd, 2007

책도 안읽어 가서 수업을 빠져버릴까 했지만, 정말 가길 잘 했다는 것.

반성

김교신은 자신의 딸이 화장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화장품을 바위에 던져 깨어버렸다. 그리고 후에 뼈아프게 후회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괴롭지 않은 반성이 반성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타인의 비판을 잘 수용하는 것은 대화가 많이 필요한 민주사회에서 하나의 덕목을 취급되는데, 흔히들 타인의 비판을 잘 수용하는 사람들이 그 비판을 수용하여 삶이 변화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단지 수긍, 혹은 그렇게 잘 넘어갈 뿐이지 그것이 반성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성이라는 것은, 자신의 못남을 받아들이기 싫고 고치기 싫음에도 그 뼈아픈 고통 속에서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것???

지식인 – 엘리트 주의

김교신이 속한 무교회주의자 그룹은, 성경을 원문(희랍어)으로 읽는 것 까지 권장하였다. 무교회주의자 그룹이 행한 기독교는 굉장히 차가운 기독교, 지적인 기독교 였는데, 이에 엘리트들의 모임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이에 예수의 복음은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모두 포괄하는 복음이었다는 비판이 이따랐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 아닌 타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엘리트 적이다.
대학에서 학문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민중이 되는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복잡하여 지식인들의 어려운 말들로 밖에 설명할 수 없으나, 이는 당연히 못배운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소통의 책임이 단지 배운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대화를 나눌 사람들이 적어진다.

소통의 절망에 괴로웠으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다시 날 괴롭게 한다.


열린종교 시민대학

금요일, 5월 18th, 2007
열린종교 시민대학
주제 : 새천년과 종교의식
강사 :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아주 예전에 받아놓은 열린종교 시민대학 강의 동영상 모음
첫번째 것으로 새천년과 종교의식.

종교학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여기 나올 자격이 없습니다. 다 그렇게, 성직자들이 계시구요. 종교인들이 계신데, 건방지게도 종교라고 하는 것을 연구하겠다고 대듭니다. 친구들이 그러죠. 종교학을 한다고 하면 종교도 연구를 하냐? 믿으면 믿고 말면 말지, 종교인들한테 가서 종교를 학문으로 공부한다고 하면 종교인들도 믿지 왜 연구를 하느냐 그러고요. 비종교인들한테도 이야기 하면, 그것도 공부를 하냐고 그렇게 이야기들을 합니다.

은퇴하시면서, 고별강연을 하셨는데 저희한테 뭐라 하셨냐 하면, “구원을 얻으려면 종교인이 되어야지, 종교학 공부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종교학을 공부한다는게 참 우습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편한 말로 세상돌아가는걸 보면, 종교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하고, 종교에 대한 공부를 한 학문적 성과를 발언하기도 해야되겠고, 그것이 인류의 문화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는 종교에 대한 어떤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하고 동떨어질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학교라고 그러시고 공부한다고 그러시니까, 종교학 공부를… 준비한것과는 다르게 강연을 하고 원고는 넘겨드리고 가겠습니다.

사람을 사랍답게 만든다는것 어렵다. 교육학 연구나 탐구가 이루어지지만, 사람 키우는것 한계가 있다. 제도교육 속에서 교사로써 스승으로써 한계가 많다. 종교에 의해서 사람이 근원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종교가 사람을 사람 아니게 만든다. 종교라는게 묘하다. 근원적으로 긍정적으로 만드는가 하면, 사람답지 않게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종교다.

이 종교라는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삶을 긍정적 존재이게 하는가 하면, 근원적으로 사람을 부정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이러한 힘이 문화적 실체로, 사회적 실체로 현존한다면, 이것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게으른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믿고, 그저 안믿는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다. 내 주변에서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단순한 태도로 끝날 수 없는 우리는 책임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에 대해 물어봐야 한다. 믿는것 말고도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개개 실존의 자리에서 신비라고밖에 할 수 없는 기여를 한다면, 거기서 끝나지 말고 또 다른 측면도 보면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책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 종교에 대한 지적 관심, 종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종교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공동체가 공동체로써 응집력을 가지고, 서로 유기적 관계로 공동체가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분명한 가치기준을 가진 척도가 있어야 한다. 대체로 전통사회에서는 종교가 이 척도가 되어 주었다. 이것때문에 질서지워지고,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사회가 통합되어 운영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종교라는것이 사회통합 기재… 하지만, 제각기 다른 척도를 가진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종교가 단일한 체제 속에서 사회 속에서 규범적 척도로써 기능하면 사회가 통합이 되지만, 종교가 제각기 다른 소리들을 하게 되면, 사회가 해체된다. 종교는 사회통합기재와 사회해체기재를 동시에 갖는다. 점점 종교가 여럿이 되면서, 문화권의 벽이 깨어지면서 다양한 종교들이 같이 공존하기에 이르렀다. 상당히 심각한 가치준거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이에 종교에 기대하는 입장이 있는데, 이는 단일한 문화권 단일한 종교 였던 과거에나 유효하지, 이제는 무효하고 낭만적 생각이다. 종교가 제각기 소리를 낼 때에, 사회가 삐그덕거린다.

…이데올로기 전쟁 끝났습니다. 그런데 전젱 소식이 많습니다. 정치 경제적 역사적 배경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응집력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전쟁을 일으키는 힘은 종교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에 대해 심각한 관심 가져야 합니다.

종교간의 갈등은 상상 외로 심각합니다. 지금 방치하면 큰일 난다. 믿느냐 안믿느냐 차원에서 끝나지 말고, 내 신앙의 차원에서 끝나지 말고, 우리 사는 공동체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아프게 고민해야 합니다. 비판적인, 분석적인 인식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저 믿으면 되는거야 그것은 때론 지적 부정직의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지적 부정직도 부정직인 한 잘못입니다.

세계가 공동체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종교는 의식 속에 독특한 사고 틀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사고틀에 의해서 유추되는 독특한 의미체계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어요. 때문에 종교를 봐야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요. 사유 틀을 결정하기 때문에,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유형화 : 우열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Theophany = 신神현 => 유대,기독교,이슬람 : 신적인 것은 긍정적인것, 그 외의 것 부정적. 이원론적 태도. 신은 대화가 가능하고, 감정교류, 의사소통 가능한 존재. 현실의 문제는 신과의 의사소통, 교류의 불완전함에서 온다고 봄.
Hierophany = 성聖현 => 불교 : 성은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원칙,원리. 우리를 초월하는 자연의 법칙. 현실의 문제는 근원적인 실재와의 조화로움 상실한 문제로 봄. 본래적 완전한 자아로의 돌아감. 하나였던 것이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문제. 色卽是空 空卽是色 하나의 통합. 논리적이지 않음. 非長亦非短 은 이야기가 안됨…. 색즉시공공즉시색은 그윽하니까 좋지만, 짧지 않지만 길지 않다.  문화적 풍토. 신현적 종교에 비해 공동체 응집력 약하고 배타적 독선적이지 않고 관용적임. 치밀하게 따지고 드는 첨예화된 날카로움 없음. 그윽함.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그 독특함.
Kratophany = 력力현 => 무속 :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줄 힘. 해결해주고 나면 버림. 더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해결하지 못하는 힘도 버림.

모든 종교가 단순하게 유형화 되는 것 아님. 서로 섞여 있으나, 학문적으로 개성을 유형화 하는 것임.

부처님 고상하게 말했지만, 생로병사에서 이야기 풀어냈다. 몸뚱이 없으면 생로병사 없다. 예수 병고친 이야기 참 많다. 종교 경전중에 기독교 성경만큼 병 많이 고친 이야기 없다. 왜 그렇게 절박하냐 하면, 몸뚱아리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죽어가는 자식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게 기독교냐? 사회정의와 인권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지.그러면서 강연 하시더라고요. 참 감동적이고 어려운 말씀을 하실때 입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저 선생님이 말씀하신 정의로운 사회에서 안살겠습니다. 왜? 죽어가는 자식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정도 못받아들이는 정의로운 사회에 가서 뭐 삽니까? 몸의 아픔, 정말 정말 심각한겁니다. 그거에 대한 무관심 아니에요. 자꾸 기복종교 욕하는데, 기복의 순수한 아픔을 수용하지 못한 체 기복종교 욕하지 마세요. 그 순수한 아픔 우리 아퍼야 합니다. 그거 같이 아퍼하면서 기복종교 욕할 수 있으면 하세요. 중요한 것은 기복을 희구하는 태도가 나쁜게 아니라, 기복을 빙자한 종교적 착취가 문제인 겁니다. 그걸 뼈저리게 느껴야 되요. 제도 종교가 기복을 기화로해서 기복을 빙자해서 착취하고 있는 현상에요. 그거에 대해 분노해야지. 자식죽어가는데 살려달라고 이야기하는것까지 배척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 삶의 문제가 그런 것들이거든요. Krathopany 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줄 큰 힘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 힘이 모두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유용하면 된다. 현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이고 이기적이고, 신이 필요없으면 버리고,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종교들이 개성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종교학은 어떤 것이 종교고 어떤것은 그릇된 종교라는 이야기를 안합니다.
모든 것이 겹친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중 어떤 종교 때문에, 우리 종교가 망쳤다고 하는 것 만큼 천박한 변명이 없습니다.

21C 종교를 이야기 하라고 하셨는데, 엉뚱한 이야기를 했는데, 내일 이야기도 못하는데… 21C 종교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종교학적 입장에서 이야기 하면, 종교 개념의 적합성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교라고 하는 개념이 앞으로 적합한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말예요. 왜냐하면, 제도종교의 힘이 앞으로도 여전히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심각하게 회의되는 것입니다. 점점 종교적인 가치라고 하는 것이 私化 되어 갑니다. 이제는 점점 제도 종교에 귀속하기 보다는 자기 나름의 스타일로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체계를 형성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종교에 , 특별히 제도 종교의 권위에 기대어 살기 보다는 자기 라이프 스타일에 살려고 하는거죠. 종교가 점점 선택가능한 것이 되어 갑니다. 이러한 현상이 이른바 정보화 문화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뭔지 몰라서 사람들이 기독교인 안됩니까? 불교가 뭘 가르치는지 몰라서 불교인 안됩니까? 물론 스님만치 모릅니다. 신학자처럼 모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다 압니다. 지금 왜 종교인이 안돼느냐 돼느냐?? 앞으로는 제도종교가 뭘 가르쳐서가 아니라, 자기문제에 스며들 수 있는 해답을 전해주기 때문에 종교인이 되게 되는데, 그 해답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형성된 교회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부닥친 문제의 직접적인 해답을 줘야 합니다.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시 말해서, 교리적 언어가 제도적 권위가 없어지면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이야기 될 거에요.
요즘 서양 사람들이 alternative knowledge 라는 언어를 씁니다. 대안지식 대체지식, 종교로 말할 수 없는 다른 지식들이 종교가 했던 것들을 대신하리라 예상되는 그 무엇이, 스스로 자기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속적 언어로 형성 될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alternative religion 라고 할수는 없고 alternative knowledge 라고… 제도 종교가 얼마나 지속할지는 몰라요…
제도 종교가 계속 하지 못하면서 사화되는 경향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파편화 되어서 개인이 선택했다가 선택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황, 거기에 대한 봉헌이라던가 거기에 대한 이제까지의 절대적인 귀의라던가 하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을, 로버트 벨라라는 미국의 종교사학자는 “초월의 몰락” 제도적 종교들이 교리적 가치로 절대화 시켰던 것들이 다 무너지면서 종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초월의 몰락은 동시에 초월의 확산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미스라고 하는 사람은, 개개 종교를 이야기 하던때가 있었다. 그게 다음에는 ‘종교’ 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다음에는 ‘종교들’ 이라고 이야기 하던 때가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꺼냐? religious 형용사로요.. 모든 것들이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현존해서 종교가 아닌데, 모든 것들이 종교적으로 현존하는 시대. 그런 변화의 추세를 짐작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종교학은 종교사를 서술합니다. 종교학은 종교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변천과 변화의 역사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역사는 흥망성쇠의 역사입니다. 흥망성쇠를 기록한 것입니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생기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게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이집트 종교가 연대기 적으로 3000년이 지속된 종교입니다. 그 태양신을 섬기던 종교인데 3000년 지속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태양신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없습니다. 폐허가된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2000년 됐는지 언제 없어질런지 알게 뭡니까~ 불교도 마찬가지지요? 종교사가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그거야 이집트 종교가 진리가 아니라서 그렇지~” 어쨌든, 3천년 종교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인류사가 보여주는 종교에 대한 증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자가 없으면 그 종교도 없습니다. 신도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습니다. 만약에, 정말 돈독한 신앙인이 되고 싶으시다면, 부처님 사라지게 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 사라지게 하시면 안됩니다. 여러분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신을 영원하게 하는 책임이, 부처님을 영원하게 하는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샌드위치 만들어먹기

토요일, 5월 12th, 2007

언젠지는 기억도 안나는 어느 화창한 수요일 팀모임… 우리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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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호> 4면 : 사학법과 정체성

수요일, 5월 9th, 2007

사학법과 정체성

이와 관련된 3가지 논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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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ed by 전덕규

사립학교법(이하 사학법)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많은 논의들이 오고 간 상태이고, 논의에 대한 정리도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할 것은 이제 이러한 입장들 속에 그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세우는 어떤 결단만이 남아있다.
이러한 논의를 단순화 시키자면 사학의 민주화와 투명성,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사학재단이 지향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학문적-종교적 자유의 일환으로써 이번 사학법 개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누군가 이야기 하였듯 사립학교법 쟁점의 중심에는 정체성 논의가 있으며, 목사들의 과민함 그 이면에는 신앙에 대한 민감함이 있는 것이다.

논의 하나:사학법 – 정관

우리학교의 정관개정
사립학교법이 구체적으로 적용되기 위하여는, 각 대학의 정관이 사립학교법에 맞추어 개정되어야 하며, 그 이후에 실질적 차원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개정된 사학법 시행일자는 2006년 7월 1일자이다. 우리학교는 2006년 8월 31일 이루어진 이사회 회의에서 뒤늦게 정관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정관은 2006년 9월 18일을 시행일자로 하고 있다.

정관개정 이후 변화점과 적용되지 않은 점
정관개정 이후에 학내 행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결산 자료가 홈페이지에 개제되고 있으며, 제30조의2에 의거하여 이사회 회의록이 홈페이지를 통해서 공개되고 있다.
정관 개정 이후에 실제로 적용되고 있지 않은 부분이 개방형 이사제와 평의원회이다.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는 측에서 중심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며, 그들은 이를 통해 학교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으로 염려하고 있다.

개정된 정관을 시행하지 않는 이유
정관은 이사회에서 개정절차를 거쳐 시행일자가 지났음에도 주요 부분이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 이유에 대하여, ‘예산책정 간담회’에서 서병선 기획처장은 사학법 재개정 논의가 있는 중에 교회의 어른들의 입장이 개정된 사학법을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임을 밝혔다. 교무과의 이철규 계장 또한 “우리학교의 존립기반이 교회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교회의 어른들이 (개정사학법을) 문제로 삼는 상황에서 한동대학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한동신문 103호 에서 인용)라고 말함으로써, 개정된 정관이 시행되지 않는 이유의 배경에는 교회의 입김이 있음을 직접적으로 내비쳤다.

이사회의 의의
사학법 개정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사학의 운영에 있어서 보다 민주화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에 있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학재단의 의사결정 구조상 이사회가 가지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이사회는 재단의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 최고의 의결기구인 것이다.
이사회는 한동대학교의 의사를 대표한다. 이사회의 의사는 단지 이사 개개인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동대학교의 의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결정에서의 이사회의 중요성은, 개방형 이사제에 관한 목사들의 반응으로 연결된다.

주장과 현실의 모순
“사학은 종교적-학문적 자율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정작 한동대학교 이사회의 자율적 의사결정은 무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개정된 정관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치행정의 이상에도 맞지 않다. 이는 법 제도를 넘어선 것이기에 더 해결하기 힘든 문제이다.

논의 둘:교목과 교수 그 사이에서…

교목실 목사들의 대거 교수 임용
그런 와중에, 교목실 목사들이 대거 GLS학부의 교수로 발령이 났다. 이는 학교측과 평교수연대에서 주목하고 있는 과정상의 쟁점과는 별도로, 결과부분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교목의 귀환
우리학교는 지난 몇 년간 교목실장이 부재한 상태에 있었다. 때문에, 학부 교수들이 임시로 교목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황영호 목사가 교목실장으로 부임함으로 인해 몇 년간 비워져 있던 교목은 제자리를 찾았으며, 한동대학교의 신앙-인성-학문을 기치로 한 교육체계가 다시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교목과 교수의 겸임 그 실질적 의미
교목과 교수의 겸임은 실질적으로 교목이 없음을 의미한다. 학부 교수가 교목실장을 임시로 겸임하던 과거의 교목실 구성은 단지 교목실장 만이 학부 교수를 겸하고 있었지만, 이번 교수발령으로 인해 교목실 목사 대부분이 학부 교수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교목과 교수의 업무를 함께 부담하게 되므로, 이러한 업무과중은 채플의 질적 측면에서의 저하로 이어질 요소를 담고 있다.

논의 셋:그리고 정체성

당신들의 한동대학교
이번 교수임용은 단지 교육적 차원에서 교수의 임용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정체성논쟁의 차원에서 교목의 역할이나 업무과중에 대한 이야기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교수만의 문제,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의 중요 부분인 채플과 연관된 이야기이다.
이를 단순히 교수하나 뽑는 문제로 격하시켜, 교수사회 내부의 문제, 채용과정의 법률상 문제로 취급하여 정보를 차단하는 학교 리더쉽의 무감각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정체성 논의
한동대학교 학생들은 더 이상 정체성에 대해서 논하지 않는다. 과거 게시판 항목 마저 따로 분류해야 할 만큼 뜨겁던 정체성 논의는 이제 한동신문이라는 장소로 바꾸어 교수들이 진행하고 있다. 이 둘의 성격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한동 구성원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은 공동체적 담론으로써의 정체성 논의였다면, 후자는 리더쉽이 지향하는 바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일방적인 교육이다. 정체성 논의는 모두 함께 해야만 한다. 비전은 공유되어야만 한다.

어떤 민감함
우리는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과거의 불타던 한동의 에너지는 하나의 환상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그러한 불타는 에너지를 소멸시킨 어떤 다른 요소가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교계의 목사들은 기독 사학의 정체성에 민감하다. 이번 교수임용사건을 통해 바라본 우리학교 리더쉽들은 오히려 정체성에 무감각 하다. 정관 개정 과정을 통해서는 이사회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문도 든다. ‘과연, 사학법에 관한 주관적 생각은 있는 것인가?’
여기서 떠오르는 또 다른 도발적인 생각. 우리학교는 진정으로 나아가야할 어떠한 정체성 보다, 우리학교가 기반한 교회 어르신들의 기부금에 민감한 것은 아닐까? 그것도 초교파가 아닌 돈 많이 주시는 그 어르신들은 아닐까?

전덕규

남성성과 여성성

목요일, 5월 3rd, 2007

오늘은 캘빈대에서 온 박사가 온 특별 강연을 들었다.
강연 제목은 복음주의 페미니즘. 예수에게서 바라본 남성성??

남성과 여성은 일단 시각적으로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당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잇따를 수는 있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나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논제설정 자체가 논리적인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에서 가부장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전사적 남자와 순종형 여자로 대변되는)에 대해 비판할 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여자가 순종해야만 한다는 명령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데(페미니즘이 여성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이러한 피해의식의 발로로 볼수도 있을까… 이 동기 또한 권력지향적??), 이러한 논리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전사적이지 않은 남자는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폭력적 구조임은 마찬가지이다.
이는 인간을 동적 생물로 바라보지 않고, 정적 대상으로 바라보아 규정하고, 그것에 들어맞지 않는 것을 존중하지 않는 근대적 철학-학문의 폭력성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어떠한 나누어봄이 이러한 논의의 결론이 폭력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말이다.(논의 자체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박사는 기존의 전사적 남성성과 순종적 여성성을 비판한 후에, 여성성은 제시하지 않은 체 남성성을 규정한다. “이해심이 많고, 고통에 공감하는”남성성을 예수에게서 발견하는데, 이러한 남성성을 설정하는것 자체도 어떤 폭력성을 내포한다.
타인의 고통을 절대 공감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이해심 많다는 것은 어떤 지적능력을 요구한다. 이는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한다.

박사의 말처럼 학문을 한다는 것은 분명 어느정도의 맹목적 열정이 필요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을 나누는 그 사고 자체가, 어떤 사회적 권력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맥락에서 살아가는데, 그 속에서 휘둘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사고 그 자체가 폭력적이다. 궁극적으로 ‘사랑’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확정하고자 한다면,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사고 그 자체를 버려야 한다. 보다 내가 만족할 대답은, 여성성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았던 것 처럼, 남성성 또한 규정하지 않았다면 만족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