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6월, 2007

6월 항쟁 20주년을 지내며

월요일, 6월 18th, 2007

6월 항쟁 20주년을 지내며 – 류 대영(한동대)

 19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 20주년을 지냈습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시골학교 선생인 저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야 올해가 항쟁 20주년이고, 그것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몇 가지 특집방송을 지켜보는 것으로 6월 항쟁 20주년을 조용히 기념했습니다. 감회가 없지 않았습니다. 옆방의 동료에게 그 특집방송들을 보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텔레비전과 점점 더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그이도, 텔레비전 특집방송을 보며 6월 항쟁 20주년을 조용히 기념했고, 또 감회가 없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이는 감회에 젖어 6월 항쟁 관련 특집방송을 보다가, 부인으로부터 크게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연인즉, 6월 항쟁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 대구 어느 고등학교에서 선생으로 있던 그는 마침 시험 기간에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자 일찌감치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했고,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만삭의 부인은 해산이 임박했고, 장모도 와 계셨던 시점이었답니다. 유치장에서 하루를 지내고 풀려나 귀가했는데, 옷은 다 찟기고 얼굴은 “눈텡이 밤텡이”가 된 상태였다지요. 그로부터 3일 후 그 집의 첫 아이가 탄생했고, 언제 해산할지 모를 아내를 두고 시위하러 나갔다가 잡혀 유치장에서 외박을 하고 온 일은 그이의 원죄가 되어, 두고두고 그를 괴롭히고 있답니다.
 한 멀쩡한 젊은이로 하여금 해산이 가까운 아내 곁을 지키지 못하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로 향하게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첫 출산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군사독재와 싸워야한다는 또 다른 의무감과 충돌했던 시절입니다.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시민으로서의 책임이 갈등을 빚었고,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가 한 젊은 가장으로 하여금 첫 아이의 탄생이라는 가장 중요하고 기뿐 일마저 차분히 준비하며 기다릴 수 없게 만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사독재라고 하지만 그래도 자기 민족의 지배를 받는 시절이 그랬으니, 이민족이 다스렸던 일제강점기 같은 시절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길을 갔던 선열들은, 나라를 되찾는다는 큰 뜻을 위해 가족의 안위를 버리는 모진 결심을, 아마도 예외 없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같이 평생 용기 있는 일이라고는 해 본 기억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결단이었으리라 믿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웃으면서 들려주는 동료의 경험을 저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내와 태어날 아이에 대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가치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민주화라는 것이 가정의 행복보다 더 큰 가치라고 믿지 않습니다. 국가나 민족, 종교나 학문, 혹은 어떤 다른 거대한 가치가 개인의 자유나 행복보다 더 상위에 있다는 주장의 저의(底意)에 대해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민족이라는 것이 19세기 국민국가들이 만들어 낸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집단적 허위의식에 불과하며, 교조화 된 종교가 관용과 평화가 아니라 획일과 폭력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6월 항쟁은 군사독재가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국가주의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그리고 그 폭압적인 군사적-이념적 국가주의에 항거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항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칭찬받는 것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큰 가치”를 위해 개인과 가정이라는 “작은 가치”를 희생했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국가나 민족의 운명이 큰 가치라면, 개인의 평안과 가정의 행복은 그 이상으로 큰 가치라고 믿습니다. 항일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가 훌륭한 것은 독립이나 민주화라는 넓은 가치를 위해 개인과 가정이라는 그것보다 결코 작지 않은 (어쩌면 더 클지도 모를) 본질적인 가치를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소중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또 다른 가치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2007년 7월) “권두언”


기독교 고전강독 종강

수요일, 6월 13th, 2007

청강 끝나다.

1. 분노에 근거한 정의와 사랑에 근거한 정의가 있다면, 나는 분노에 근거한 정의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내 속에 분노가 많음을 안다. 너무나도 숨기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이 압제 앞에서 나는 절규하는 수 밖에 없는 거다. 내속에 분노가 너무 많다. 때문에, 그렇게 이전투구 속에서도 “진리없는 정의는 폭력이다.”라는 말이 내 가슴을 울렸던 거다. 너무나도 찔렸던 거다.

2. 철학과 신학,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신비주의의 신비를 합리주의가 언어화 하듯이 신학의 영감을 철학이 정치하게 서술한다. 영감은 언어화 되고 명료하게 인식되어야 하는데, 세속화에 대한 신학의 서술에서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에 영감을 받아 신학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철학이 신학에 영감을 제공하였다. 어쨌든, 이 경우에는 어떤 영감제공으로써의 신학의 역할은 다 하지 못했다.

3. 종교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상징체계라는 정의를 받아들였을 때, 그러한 상징체계는 학문이 현실의 변화를 고려해 다시 다른 결론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반영하여 변화해야 한다. 선과 악의 대립, 사탄의 관념 속에는 사탄의 관념이 있기 그 이전에 사탄의 관념이 생겨나게 되는 시대적 정치적 상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보다, 대적해야할 그 무엇을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종교를 인간이 만든것이라는 인식에는 신의 관념이 인간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라는 인식이 잇따른다. 전지전능한 신의 관념에서, 무능하고 겸손한 신의 관념에 이르기까지 결국 종교는 인간의 모습을 띄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종교가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 오히려 현실로 돌아오게 됨이 종교의 위대함?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종교는 저급하다는 응답??


윤리와 무한

수요일, 6월 6th, 2007

“이웃을 위하여 또는 참된 삶을 위하여 자살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곧,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있음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철학전통에서 자신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있음이 곧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른바 conatus essendi(존재의 충동)를 모든 권리와 의미의 근거로 볼 수 없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윤리와 무한-필립 네모와의 대화]](서울: 다산글방),양명수 역,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