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20주년을 지내며
월요일, 6월 18th, 20076월 항쟁 20주년을 지내며 – 류 대영(한동대)
그런데, 그이는 감회에 젖어 6월 항쟁 관련 특집방송을 보다가, 부인으로부터 크게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연인즉, 6월 항쟁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 대구 어느 고등학교에서 선생으로 있던 그는 마침 시험 기간에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자 일찌감치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했고,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때 만삭의 부인은 해산이 임박했고, 장모도 와 계셨던 시점이었답니다. 유치장에서 하루를 지내고 풀려나 귀가했는데, 옷은 다 찟기고 얼굴은 “눈텡이 밤텡이”가 된 상태였다지요. 그로부터 3일 후 그 집의 첫 아이가 탄생했고, 언제 해산할지 모를 아내를 두고 시위하러 나갔다가 잡혀 유치장에서 외박을 하고 온 일은 그이의 원죄가 되어, 두고두고 그를 괴롭히고 있답니다.
한 멀쩡한 젊은이로 하여금 해산이 가까운 아내 곁을 지키지 못하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로 향하게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첫 출산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군사독재와 싸워야한다는 또 다른 의무감과 충돌했던 시절입니다. 남편으로서의 책임과 시민으로서의 책임이 갈등을 빚었고,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가 한 젊은 가장으로 하여금 첫 아이의 탄생이라는 가장 중요하고 기뿐 일마저 차분히 준비하며 기다릴 수 없게 만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군사독재라고 하지만 그래도 자기 민족의 지배를 받는 시절이 그랬으니, 이민족이 다스렸던 일제강점기 같은 시절은 어떠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길을 갔던 선열들은, 나라를 되찾는다는 큰 뜻을 위해 가족의 안위를 버리는 모진 결심을, 아마도 예외 없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같이 평생 용기 있는 일이라고는 해 본 기억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결단이었으리라 믿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웃으면서 들려주는 동료의 경험을 저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내와 태어날 아이에 대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가치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민주화라는 것이 가정의 행복보다 더 큰 가치라고 믿지 않습니다. 국가나 민족, 종교나 학문, 혹은 어떤 다른 거대한 가치가 개인의 자유나 행복보다 더 상위에 있다는 주장의 저의(底意)에 대해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민족이라는 것이 19세기 국민국가들이 만들어 낸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집단적 허위의식에 불과하며, 교조화 된 종교가 관용과 평화가 아니라 획일과 폭력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6월 항쟁은 군사독재가 오랫동안 구축해 놓은 국가주의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그리고 그 폭압적인 군사적-이념적 국가주의에 항거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항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칭찬받는 것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큰 가치”를 위해 개인과 가정이라는 “작은 가치”를 희생했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국가나 민족의 운명이 큰 가치라면, 개인의 평안과 가정의 행복은 그 이상으로 큰 가치라고 믿습니다. 항일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가 훌륭한 것은 독립이나 민주화라는 넓은 가치를 위해 개인과 가정이라는 그것보다 결코 작지 않은 (어쩌면 더 클지도 모를) 본질적인 가치를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소중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또 다른 가치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2007년 7월) “권두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