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7월, 2007

“아프간 피랍 사태를 보는 세 가지 시선” 이라는 글에 대해…

월요일, 7월 30th, 2007

“아프간 피랍 사태를 보는 세 가지 시선”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23> “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729203647

큰 논지에서는 결국 파병 원인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거 같다.(똑같지는 않더라도, 주장의 효과가 아무래도 비슷하다는…) 공적 인프라 언급이나, 아프간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을 지적하는 대목에서, 이유업이 ‘그럼에도 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서술되지 않은 다른 ‘직관’이 있을 거라고 짐작이나 해볼 수 밖에… ‘근본적인 정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반대가 정답일 거라는걸 논리적으로 보증할 수는 없다.

이 글의 효과를 조꼼 생각해 보자면…

1. 결국 “아프간 사회에 대한 이해”로 독자들의 의식을 돌리는 기능.

2. “피랍자”들이 착한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우리 독자들이 예전의 영광(금모으기, 효선이 미선이,)운운하며 아무래도 피랍자들을 구해내라는 정부탄원 촛불집회를 종용하는듯한 기능??

아무래도 2번은 좀 불편하다. 아무래도 인터넷 댓글의 비난여론에 대한 역시류를 고려한 내용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필요해 보이고, 불편한 내용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프간 사회에 대한 이해”도 “시혜”적 우월감을 갖는다면 문제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제국주의의 침략은 미개국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일본이 조선인들의 신사참배 거부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그들의 대동아공영 계획에 조선이라는 미개인들이 황국 시민으로 영광스럽게 인정 받는 것이라는 시혜적 인식이 바탕되기 때문이다. (사실 찾아보면, 일본인들이 정말 진정으로 조선을 생각해서 침략한 것이라는 서적들도 있다. 일시적 착취적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할 단일체로써…)
자국의 문제가 자국에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그 문제로 인해 타국에 종속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많이 증명되어 왔던 것이고…

아무리 좋은것이라도 자기 싫다면 그만이다. 역사라는 것에 만약은 없는 것이지만, 일본의 대동아공영이 진정 합리적이고 영광스러운 계획이었다 하더라도 조선에 강압한 그들의 태도는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 (합리성을 넘어서 존중으로…)

파병의 적실성 이야기, 제국주의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야기 나오고,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가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들의 정신이 동일성을 갖기 때문이다.


피랍사태에 대한 의식적 발 넣기와 빼기

화요일, 7월 24th, 2007

1. 이번 사태는 오히려 기독교와 선교라는 선입견을 제하고 보았을때, 더 잘 읽힌다고 생각합니다. 선교가 아니라, 그냥 여행자 집단이 길을 가다가 탈레반에게 피랍되었다고 가정한다면, 피랍자들에게 적대적인 반응들이 나왔을까요??

2. 이번 사건에서 국가주의의 광기를 읽습니다. “세금이 아까우니까”구해주지 말라는 사람들과 “국가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말아야지.”라는 반응들이 많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의 국가관이 의심스럽습니다. 적어도 떠받들어야 될 “국가”보다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좀 세련되고 현대적이지 않습니까? 나가서 나라 이름에 똥칠을 하든 말든, 그게 만약 법적으로 제재가 필요하다면, 국민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 와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외국에서 피랍되었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국가라면… 도대체 국가가 우리한테 해주는게 뭐가 있습니까?

3. 분명 위험하다고 전문가들이 말해주기는 했지만, 금지된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여행객들은 출국수속을 밟았고 비자를 받았습니다. 물론 위험한 지역이긴 하지만, 가고 안가고 자신들이 결정내릴 자유정도는 있습니다. 아 물론, 금지 되면 못가게 되겠지만,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 가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믿음이 있으면 못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다만, 이 금지의 의미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므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곳에는 가지 않도록 하는 제도로써 의의가 있는 것이지, 국가 그 자체를 위한 금지가 아닙니다. 어쨌든, 그들은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출국했으므로 국가가 그들을 보호할 의무를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4. 잘못은 탈레반에게 있습니다. 범죄가 일어나는 과정은 범행의 대상이 있고, 범죄자와 범행이 있을겁니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영역에서는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범죄자의 범죄가 정당화 될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이지, 옳고 그럼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5. 잘못은 탈레반이 하였고, 국가는 국민을 구해야 한다는 작은 결론이 났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이정도 결론에서 그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 논의에 관심이 없거든요. 복음서진론이든 땅끝복음이든 관용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구절 들먹일 일도 없고 들먹여도 수준이 미비하지요. 적당히 무관심한 수준에서 그칠겁니다. 하지만 기독교 인이라면, 기독교의 선교관이나 기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대다수의 여론이 비이성적인 측면이 많습니다만, 이러한 비이성적 반기독교적 감정이 형성되는 것에는 그간 기독교의 잘못도 많았음을 인정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반기독교정서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6. 결국 기독교인이라면, 믿음의 동지로서 함께 믿는 신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주의적 태도로 저들은 저들의 믿음이라고 방관하는 태도도, 반기독교정서의 형성에 한몫 한 것이지요.

7. 기독교인들은 죄 많은 자신을 보지 말고 예수를 보고 진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보고 예수를 봤으면 애초부터 기독교인 됐게요. 어차피 비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보고 판단합니다. 기독교가 욕먹는 이유가 예수적 행동을 해서 욕 먹는거 아닙니다. 현재의 반기독교정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예정된 고난이나 억압으로써의 성격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로써 자신의 예수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기독교인들의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상한 행위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됩니다.
유흥성이 너무나 짙은 한국의 선교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복음서진론이라든가 땅끝복음에 관한 이야기들의 허구성을 낱낱히 밝히는게 기독교인으로써 올바른 기독교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8. 그러니까, ‘목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욕을 좀 먹어도 싸다는 겁니다. 물론 ‘만인제사장’설로 목회자의 말에 신성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 개신교에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의 말에 신성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당위적 주장이지, 현실적으로 ‘목자’의 말에 신성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습니까? 왜 빽투더예루살렘이냐고 물어보세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믿음 좋으신 분들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국가라는 우상 이후에 또 다른 종류의 우상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우리들의 ‘목자’라는 우상이요.


피랍 사태

일요일, 7월 22nd, 2007

1. 선교관???
선교관은 신앙관과 잇닿아 있다. 복음서진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 이런건 당삼 과학적 근거 없다. 당연히 ‘신앙’의 문제. ‘신앙’의 문제는 그냥 종교단체 내부에서 알아서 하라고 그래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죽음 감내하고 선교하러 나가라. 종교가 어디 합리적 담론 영역에서 해결될 문제냐? 종교도 합리적으로 할라꼬 그라면 그게 어디 종교인이게? 에이~ 믿음이 있어야지!!!

2. 그러니까 피랍된 사람들이 뭘 잘못했냐??
그러니까,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니까 그냥 인정해 줘라. 그 동기가 봉사든 선교든 간에 어쨌든, 아프간 갔다. 정부에서 ‘경고’ 했지만 금지된 건 아니다. 적법절차 밟아 비자 발급 받고, 비행기 타고 날라갔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누린거다.

3. 나쁜놈들이 왜 납치 했는지 궁금해진다.
여기에서 이라크 아프간 파병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한다는 거다. 솔직히 이라크 파병할때, 이정도 위험이 있음은 예견 되었었잖아. 솔직히 기독교인이든 다른 여행자 집단이든 한국인이라면, 철수 조건으로 충분히 납치 될 수 있는거다. 파병시켜서 외국여행 마음놓고 못하게 한 정부아저씨들 욕해야 하는거다.

4. 그러니까 정부는 일단 국민부터 구해야 되잖아.
자국민 보호하는게 정부 역할 아닌가? 내가 외국 여행 나갔는데, 보호 안해주면 세금은 왜 내냐? 그게 당연히 정부 하는 일이다. 그 뭐, 구하지 말라 구해라 이걸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5. 피랍된 사람들 때문에 심란하다고??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 피랍이 보기 싫고 심란한게 아니라, 기독교(선교)가 그대에게 심란한건 아닌지??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자성이 필요하긴 하다.
문제되는 교회로 쏟아지는 여론의 비난은 그간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러니까, 기독교계 전체가 들어야 할 욕을 모다 모다서 한 교회가 먹고 있는거다. 그러니까, 기독교계 내에서는 ‘선교관’에 대해서 좀 반성좀 해봐라.  거 물론, 내부에서 알아서 토론해야 할 문제다. 난 별로 성경구절 들어가며 대화하고 싶지는 않다.

정리를 좀 더 하고 싶거나 그러면, 새로 포스팅 하도록 하겠음.
아래는 읽어볼 만한 글 링크
http://telos.egloos.com/1355786
http://saintech.tistory.com/27

그리고 아래의 목록들을 보면, 앞으로도 참으로 많은 유사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을 정립하는 존엄함을 준비하도록…
http://www.onnuri.or.kr/sub.asp?gubun=2803


[[아리랑]], 님 웨일즈(공저), 김산(공저), 부제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월요일, 7월 16th, 2007
아리랑
님 웨일즈. 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동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의 지식인의 삶. 동의할 수 없어서 기억에 남는 부분도 있고, 어떤 공명 때문에 기억에 깊이 남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김산의 성장 과정이 잘 드러나기에 너무나도 뿌듯한 기분으로 책을 덮는다. 자서전적 역사적 기록. 국제주의의 입장에서 중국 공산혁명에 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기여한 혁명가.

무엇보다, 김산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는 여러 노선들의 여러 인물들의 개성이 서술된다.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등… 각각의 캐릭터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실 이 책을 읽고 가장 많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혼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사실 이게 가장 현실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이 아닐까. 사랑 – 가장 큰 욕구이자 욕망 아닌가? 삶의 투철함, 신념은 말과 앎으로만 해결될 부분이 아니다. 어떤 가치를 위해 스스로를 신념화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것이 중요하다는건 알아요. 하지만, 내것을 포기하지는 못하겠어요.” 중요한 건 이 지점. 평범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은 이곳에서 갈라진다.

25개의 장 중에서 3개의 장이 여자에 관한 이야기 인데(9장 결코 결혼하지 않으리라. 17장 위대한 첫사랑. 23장 두 여인) 김산은 “혁명생활 속에서는 절대로 가정생활이 불가능할 것이고 그러므로 내가 어떤 여성을 부지부지하게 사랑한다 할지라도 결혼한다는 것은 그녀에 대하여 공명정대치 못한 일이라고 하는 생각이 마음 깊숙이 깔려 있었다.”(181)라고 말하는데, 윤리적인 태도이지 않나? 또 이를 통해서 김산이 자신의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언젠가 칼빈대에서 박사가 강연온 적이 있었는데, 그 외국인 박사는 성서에 예수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자신에게 은혜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예수가 정말로 결혼을 했을까 하는 논쟁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면, 여성들은 예수의 부인을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이 이야기를 여성주의에 조금은 편향된 것으로 판단되는 한 누나에게 말한적이 있었는데, 이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라고 그랬다. 만약에 세상에 예수같은 남편만 있다면, 여자들이 얼마나 괴롭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이야기가 나온 맥락은 굉장히 자신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해 주었었는데, 바깥에서 큰일 하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내조하는 부인이 요구되는 가부장 문화에 대한 이야기와 어떤 맥이 닿아 있음을 느꼈다.
어쨌든, 자신이 가정마저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 뻔하다면, 결혼을 한다는 것이 여자에게 몹쓸 짓은 몹쓸 짓일 것이다.

어쨌든, 김산에게는 혁명사업과 여성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아주 고전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결국 김산은 “나는 혁명사업을 하면서 살아가야지, 여자나 돌보며 살 수는 없다.”(184)며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이자 스승인 김충창의 연애를 통해서 김산은 또 어떤 연애관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 김충창은 원래 중이었는데, 사랑에 어쩔 도리가 없었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김산은 이렇게 반박한다. “혁명가도 남자이고 인간이다. 어찌 되었든 이 연애는 진행될 것이다. 너희들에게 반하는 아가씨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너희들은 모두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213)
이어 “나는 속으로 김충창의 행복한 연애사업을 진심으로 부러워하였다. 내 결혼관은 눈에 띄게 변하였다. 아가씨만 이상적이라면 연애를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214)

결국, 그도 총명하고 경험이 많이 보이는 특이한 매력의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혁명활동이 연애로 인해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각오한 김산에게, 그녀는 동지애 그리고 사랑이 주는 용기 등등으로 설득을 했으며, “독립적이고, 육체적으로 튼튼하고 매력적이며, 지성이 있고, 마음씨가 따뜻하고, 용감하고, 솔직하고, 훌륭한 혁명가”(324)와 김산은 사랑에 빠진다.

뭐 어쨌든, 첫번째 사랑은 어떻게 가고. 너무나도 긴장된 삶의 연속인 김산에게 또다시 한 여인이 나타나게 된다. 김산의 방에 형사가 들이닥쳤고, 형사들은 김산을 찾아오는 사람을 잡기 위해 잠시간 방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그런데, 한 여성동지가 김산의 방을 찾게 되었고, 그녀는 잡힌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정부고관이었기에 쉽게 석방되게 되고, 김산도 어찌어찌 해서 나오게 된다. 그 후 여인은 김산에게 청혼하게 된다. 김산은 그녀의 무조건적인 태도에 감명하게 된다. 김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이 아가씨는 아주 어렸으므로 내 뜻대로 키울 수 있는 여성”(443) 이었고, 결국 그 둘은 결혼하게 된다.

그렇게 사는 중에, 김충창이 찾아온다. 김산의 짝을 찾아왔다는 것. 김충창은 김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자식이 셋이나 있네. 그리고 나는 가정의 행복에 빠져버린 구제될 수 없는 중년층의 전형일세. 그렇지만 자네는 아직 자유롭고 겨우 서른 살밖에 안 되지 않았나? 자네는 어떤 것에든 포부를 가질 수 있어. 그런데도 자네 마음은 슬프고도 쓸쓸해. 자네에게는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자네의 자아를 어루만져주는 어린애 같은 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반려자가 필요하네.”(449)

결국 김산은 김충창이 말하는 반려자를 당내활동을 통해 마주치게 되었지만, 자신의 처와 함께 있을 것을 고집한다.

아리랑에서 나타나는 혁명가들이 접하는 여인상은 두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헌신적인 여성과 독립적이고 지혜로운 여성상.


생리대를 검은봉투에 넣어주지마.

토요일, 7월 7th, 2007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피자매 연대 라는 단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대안 생리대 운동을 하는 단체인데, 그곳에서 활동하는 dopehead 라는 분의 블로그에 갔다. 여성주의 액션박람회에 참가한 포스팅 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생리대를 검은봉투에 넣어주지마.” 라는 그림이 있었다.

생리대를 검은봉투에 넣어주지마. 사진출처 http://blog.jinbo.net/dopehead/?pid=601

사진출처 : http://blog.jinbo.net/dopehead/?pid=601

문제를 드러내어 치료하는 과정에서 드는 노력이 치료한 결과에서 나오는 유익 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대로 둬야 한다는 우파적 입장과, 문제는 망각되지 않고 드러내어 치료해야만 한다는 좌파적 입장 속에서 찾은 나의 의의는 결국 그 ‘인간’을 위함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존중, 인간존엄 –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 치료하겠다는 결단과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결단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지는 결국 그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존중되어야 하지는 않을까?

어떤 많은 사회적 변혁을 가져오는 운동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운동을 통해 성장되는 민중이나 어떤 대상들은 지배되어 성장되는 것이 아니다. 운동가들은 ‘자신이 세상을 바꾸었다는 생각’ 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은 결국 혼자 자란다. 외적 요인들은 도움이 된다는 것, 자극의 요인에서 그친다는 것.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고 당당해야할 여성들의 그 무엇들이 부끄러워 해야 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해야만 하는 문화적 풍토에 대해 저항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 대한 투쟁가의 태도로써 “생리대를 검은 봉투에 넣어주지마.” 라는 투사적 태도가 가능하다.
하지만 투사는 이미 생리대를 검은 봉투에 넣어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의식화가 된 사람들이다. 생리대를 떳떳하게 들고 다닐 정도로 의식화된 여성은 별로 없다. 오히려 숨기고 싶고 부끄러워 하도록 내면화 된 여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여성들에게 생리대를 그저 손에 들고 다니도록 하는 것이 과연, 인간존중일까??

결국 생리대를 계산하고 건네게 되는, 문제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평범하게 한번 물어볼 수 밖에…

“봉투에 넣어드려요??”

“아니요!!” 라고 답하신다면, 이 아니 좋을쏘냐~ 우리강산도 푸르게 푸르게.

뭐… 물론 “생리대를 검은 봉투에 넣어주지마.”라는 목소리의 의의도 아주 크다고 할 수 있겠다. ^^


화엄경과 성경

금요일, 7월 6th, 2007
*

2007년 봄학기. 지승원 교수님과 함께하는 성경공부. 사진은 안미리 촬영.
화염경과 성경을 앞에 놔두고 주로 이야기를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