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9월, 2007

잡설

금요일, 9월 28th, 2007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 대한 추억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 들춰보다가 끝까지 읽지는 않고 빈둥대다 말았음. 타대학교 철학과에서 논리학 교재라는 사실을 웹 서핑 중 알게 됨. 학교에서 새로이 개설된 논리학 교재가 ‘논리와 비판적 사고’라는 소식을 들었고, 학교 구내서점에 진열되어 있는것. 질러버렸음.
책을 질러버린 그날 저녁. 나이가 들고 머리가 굵어졌나, 그렇게도 지루하고 읽히지도 않던 책. 잡자마자 다 읽어버렸음. 한번 다 읽고 나니 사람이 뭔가 단단해(?)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음. 단지 학적 논리학 뿐만이 아니라, 책 속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일종의 세계관이 독자에게 영향을 주는 듯 함.
오늘에 와서… 빈둥대다 다시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들게 됨. 3번째?? 갑자기 조건문이 이해되지 않음. 아하..ㅡ;; 어쨌든. 다시 읽는 이 책은 나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

세계관
바퀴벌레와 꽃과 사람의 세계관은 존재적으로 다르다. 감각기관도 다르고. 꽃은 내 말을 들을까? 꽃은 내 말을 들을까?

천재의 공부하기와 바보의 공부하기
공부라는 것을 생각하다보면, 인식에 대해서도 또 생각하게 되는데…
천재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우회를 거쳐 인식하게 되는 것을 단박에 인식한다. 그들의 서술은 범인이나 바보들이 바라보기에, 어떤 논리의 비약-건너뛰기-점프 로 보이는데, 천재들은 그들의 직관으로 그들에게 당연하게 보이는 것을 계속적으로 서술하여 사상의 큰 체계를 만드는 방법.
바보는 천재가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이해 못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 심층적 파고듦을 통해 그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들을 엎어버리던가, 아니면 그들의 사상을 보충하던가.

가을추수
추석 익어버린 벼들을 추수하는 것을 도움. 갑자기 떠오른 생각. 요즘 애들은 ‘나락’의 뜻을 알까?

생활
무위의 생활을 계속 하다 보니, ‘새로울 것이 없는 삶’으로 돌아와버린것 같음.
검도도장 등록했음.


진중권 – ‘디워’, 거대한 소란의 속살

목요일, 9월 20th, 2007

진중권 – ‘디워’, 거대한 소란의 속살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7686


에반게리온 다 보고 대충 적는 감상문

월요일, 9월 17th, 2007

호접몽
에반게리온을 보기 전에 에반게리온의 결론이 ‘호접몽’이라는 입장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청소년 시절 ‘호접몽’과 비슷한 구운몽이나 인생무상을 말하는 작품에 뿌리 깊이 공명하며 지냈는데, 요즘은 ‘인생무상’은 오히려 어떤 결론이 아니라, 사고의 시작점 이라는 생각이다. 인생은 꿈과 같다는 서술이 그렇게 명료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건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인생은 마치 꿈과 같으니, 폐인처럼 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닐 터. 차라리, 인생무상은 이 세계에 대한 어떤 당위라기보다 설명인 것인데, 이 서술에는 어떤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든 행위를 ‘꿈’과 ‘무상’한 것 이라는 것의 하위 범주에 포함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의미는 차이 에서 발생한다.
호접몽이나 인생무상을 말하는 문학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애초부터 인생무상이라며 삶을 살아낸 것이 아니라, 애끓는 욕망 속에 좌절하고 성취하며 그렇게 삶을 살아보고 난 후에나 마지막 결론으로 ‘인생무상’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객관적 진리로써 그 입장을 말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애끓는 욕망 속에서 삶을 살아보고 난 후에나 흰머리 휘날리며 한대사 날려주는 거다. “인생은 허무한 것.”
진리 이전에 삶이 있다. 차라리 이러한 인생무상과 호접몽을 말하는 작품들은 작품의 끝에 인생무상과 호접몽을 말하지만, 이 결론은 오히려 작품의 끝을 보기보다 끝의 이전을 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왜 호접몽을 말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삶을 주절주절 보여주고 난 후에야, 결론을 말하는가.

영웅의 삶
에반게리온을 꿰뚫는 주제는 인간의 외로움에 대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도의 등장이 어떤 선과 악의 대결처럼 단순한 구도가 아니라, 신이 만들어 낸 인간과 유사하지만,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사실은 인간이 아닌 레이가 신지와 동화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신지와 아스카의 경우 인간으로서 영웅이 된 경우를 만날 수 있다. 신지의 경우 타인에게서 동기를 얻어야 하며 또한 그 동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신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이 되도록 한다. 자신이 홀로 서지 않은, 레이를 핑계 삼아 평범한 삶과 파일럿의 삶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카츠라기에게 굉장히 피곤한 모습으로 다가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아스카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파일럿이 되었다는 것을 작품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아스카의 자의식과잉과 지나친 날카로움은 이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묘하게도,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인간영웅들은 자존적이지 않다.

존재의 이유
TV판의 결론은 호접몽으로 읽힐 가능성도 있다. 신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평범한 삶을 사는 학생이다. 그리고 이어 모든 등장인물이 등장하여 신지에게 박수를 쳐준다. 하지만, 이는 신지의 영웅적 삶이 사실은 꿈이었고, 평범한 삶이 실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만은 아니다. 이제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올 줄 아는 신지에 대한 박수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이유가 다른 것에 맺어져 있을 때,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지 않으려 한다. 안보딜레마, 적대적 공생, 우상파괴자의 우상화가 근원적으로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에반게리온은 왜 만들어졌나? 사도와 싸움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NERV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도와 싸움을 한다. 사도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영웅뿐만이 아니라, NERV에 속한 사람들은?
에반게리온의 운행능력을 상실한 아스카의 폐인화 모습은 존재이유의 상실에 대한 어떤 폐단이나 기타등등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디워는 재미있다.

일요일, 9월 9th, 2007

디워 논쟁이 재미있다는 뜻이다.

http://0jin0.com/1040 선빵의 사실관계, 그리고 <디워>의 마케팅에 대해서 한 말씀…
http://yhhan.tistory.com 김규항의 글에 강렬한 비판을 하고 있는 한윤형의 블로그.

한윤형 블로그에서 보니 “이미 진중권은 <디 워> 사태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 강준만, 김규항, 김정란, 그리고 기타 듣보잡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어느 월간지에 실릴 예정이라 한다. 그러니 더 이상 내가 김규항에게 신경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진중권씨 글도 한번 기다려 보자 ㅎㅎㅎ


심형래의 ‘디워’와 ‘취향 전쟁’ – 강준만

일요일, 9월 9th, 2007

선샤인 뉴스 강준만 칼럼 – 심형래의 ‘디워’와 ‘취향 전쟁’
http://sunshinenews.co.kr/detail.php?number=475&thread=30r01r02r01

부르디외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 반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음악에 관한 담론은 가장 인기 있는 지적 과시의 기회 가운데 하나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음악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교양의 폭과 해박성을 표현하는 훌륭한 기회인데, 그는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기호만큼 그 사람의 ‘계급’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없으며, 또한 그것만큼 확실한 분류 기준도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만 하다. 한 개인의 기호 또는 취향이 그토록 많은 것을 폭로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미적으로 편협하다는 것은 가공할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기호는 혐오와 분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른 삶의 양식에 대한 혐오는 계급 사이의 가장 두터운 장벽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우리가 예술작품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미학적 느낌의 자발적 결과가 아니라, 교육과정의 사회적 산물이다. 거기서 미적 판단은 계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

목요일, 9월 6th, 2007

한문이 많아 한문이 보이지 않으므로 scribd.com 회원가입 후 다운로드 해서 보아야 함.

bulonsi

글 순서

  • “에비”가 지배하는 文化 ―韓國文化의 反文化性 // 이어령
  • 지식인의 사회참여 - 일간신문의 최근 논설을 중심으로 – // 김수영
  • 누가 그 弔鍾을 울리는가?―오늘의 韓國文化를 위협하는 것 // 이어령
  • 實驗的인 文學과 政治的 自由 ―文藝時評, 「오늘의 韓國文化를 위협하는 것」을 읽고 // 김수영
  • 文學은 勸力이나 政治理念의 侍女가 아니다 ―「오늘의 韓國文化를 위협하는 것」의 解明 // 이어령
  • 不穩性에 대한 非科學的인 억측 // 김수영
  • 不穩性 여부로 文學을 評價할 수는 없다 // 이어령
  • 서랍속에 든 「불온시(不穩詩)」를 분석한다. -김수영의「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읽고- // 이어령
  • 시여, 침을 뱉어라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 김수영

그냥…

일요일, 9월 2nd, 2007

요즘 김규항씨 글 관련해서 약간 헷갈리는 중이다.

D-war와 아프간 피랍 관련해서 ‘맥락’찾기에 대한 어떤 혼란이 오고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란 게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

사실 ‘실천’의 측면에서 김규항씨의 글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어 주었었는데, 김규항씨의 다른 비판적 글들도 좋아하는 것들이 많지만, 활동가에 관한 글이랑 “평론가란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에 기생하는 사람’이다.”는 말로 생산에 의욕적이게 만들어준 평론가의 탄생이라는 글이 특히나 고마운 측면이 많았다.

타인의 취향이라는 글… 논란이 많은 것 같다.
‘광기’에 맥락부여함이 어떤 정당화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약간의 거부감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김규항씨도 만족스러워 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블로거의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