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10월, 2007

시민지식네트워크 행사에 다녀 왔다.

화요일, 10월 30th, 2007

10월 28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시민지식네트워크 토론회를 가졌다. 27일 고속버스를 타고 7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후에, 반가운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과…

느끼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뭐 정리가 안된다. 내가 흔히 핑계대기로는, 생각의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과정이 중요하며, 또 그 과정보다는 내가 그 과정을 다시 해낼 수 있는 존재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또… 사실은 그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까먹는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정리가 안된다.

그냥 토론회에 있었던 발제문을 올린다. 당연 내가 쓴거 아니다.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모임 – 김순천

2003년 시와 소설, 생활글을 쓰던 젊은 작가들이 모여 처음으로 르포문학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뚜렷하게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 노벨문학상 받은 도리스레싱이 ‘황금노트북’에서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내가 보기에 모든 게 무너지고 있다는 거야” 모든 게 무너지고 있는데 기존의 어법으로는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젊은 작가들을 르포문학으로 내세웠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청계천 사람들의 삶들을, 세계화 시대의 비정규직 사람들을 기록하게 되리라는 것도, 이 자리에 이렇게 제가 서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었던 삶입니다. 작가들이 공동 작업으로 이렇게 하리라는 것도요.
그동안 4여년간의 기록작업을 통해서 저희작가들은 이제야 우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뚜렷하게 알 것 같습니다. 정말 미안한 말입니다만 저희들이 작업한 과정은 한국문학을 버리는 과정이었습니다. 한국문학에서는 얻을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이나 경제학, 역사, 구체적인 현실에서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사회학자 22명이 기록한 ‘세계의 비참’은 저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99년 부르디외는 권터그라스와의 대담에서(이것은 뉴레프트지에 실린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세계의 비참’과 같은 책을 만들었는지 말을 했습니다.

부르디외: 우리가 원한 건, 독자들이 이 모순들을 꾸밈없는 본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운 한가지 지침은 문학적인 것을 피하자는 겁니다.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드라마들을 접하게 되면 잘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원칙은 가능한 한 혹독하리 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거의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죠. … 우리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 낸 폭력이 너무나 심해서, 순전히 개념적인 분석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르디외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비정상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 ‘혹독하리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과 참다운 문학으로 가기위해 우리는 오히려 비문학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르디외의 태도에 대해 권터그라스는 유머의 전통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볼테르의 ‘캉디드’나 디드로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혹독하게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인물들을 거론합니다. 유머가 빠진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을 간접 비판한 것이죠. 이에 부르디외는 ‘진보적인 복고를 위한 강력한 보수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을 말하는데 거기에 유머를 도입하자는 그 사고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럽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극우파나 우파에 의해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토니블레어나 죠스팽 등 좌파에 의해서 행해지는 복잡한 면이 있으며 진보주의자에 의해서 강력한 보수혁명이 수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그것은 기묘한 일상적인 논리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하나가 유머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르디외의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쳤습니다. 한국사회도 ‘사실’을 말하는데 유머를 도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한 것들이 찬양받고 이런 것들이 주요 언론에서 선택적으로 유통됩니다. 일부작가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논리를 내면화 시켜 가벼운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재미나 유머가 한 세계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표현해 주고 있는 사실은 왜곡되고 있습니다. 진술들은 무겁게도 가볍게도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 중 한 측면이 선택되어 강박적으로 강요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겠지요. 부르디외는 이런 자그마한 논리가 바로 진보를 가장한 강력한 보수혁명이라 한 것입니다. 체게바라가 티셔츠나 상품으로는 소비되지만 그의 삶은 배제되듯이 재미라는 것 속에 진정한 사람들의 삶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 외에도 중국의 라오웨이의 ‘저 낮은 중국’, 존버거의 ‘제 7의 인간’,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 등이 우리작업에 영향을 많이 주었습니다. 라오웨이는 밑바닥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법과 정서적인 풍부함을, 존버거는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조세희는 소설이 어떻게 현실과 맞닿아 있는가를 표현해 주었습니다.

부서진 미래에 대하여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면서 저는 ‘시간’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간은 고여있거나 멈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시냇물처럼 느리게 마이크로 렌즈로 섬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노동력이 바겐세일 당해 건장한 한 가장이 일하는 것만으로는 가정이 지탱이 되지 않아 부인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자식들도 비정규직(아르바이트)로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해도 기본적인 생활 꾸려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이 일정한 사회계층을 형성하면서 흑인들처럼 하나의 인종이 되어 경멸을 당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 안에서 폐쇄를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명백히 민주주의에 대한 참혹한 후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 비참하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도 비정규직이 될지도 모르면서 비정규직을 비난한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무지와 공포입니다. 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갖는 순종 속에 감춰진 비참한 삶의 조건입니다.
며칠 전 시사IN 편집장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IMF 전에는 기자들이 경영진이나 윗선에서 잘리더라도 기사를 썼는데 지금은 아애 취재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기는 내부검열이 심층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정규직이나 일반 국민들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을 향한 자기검열이 전면화 되고 있어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것은 고통보다도 더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중층적이고 다층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사고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우리의 종자가 사라지듯이 정신적인 다양성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데 TV드라마 속 에피소드만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진지하게 우리 내부에 물음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선을 그어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서로 고민들을 나누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에게 부탁 하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르디외 등 사회학자 22명은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에서 신자유적인 정책이 가져온 폭력성을 순전히 학문적인 개념적으로만 파악할 수 없어서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기록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저희들이 살고 있는 무너져 가는 세계를 위해 학자들이 거리로 나서줄 것을 원합니다. 세계를 깊게 이해한 사람들이 이 잘못되어가는 세계에 선을 그어줘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성이 파괴되지 않게 막을 ‘지적인 장벽’이 필요합니다.
저희 르포문학은 예전에는 전쟁과 정치적인 작품이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일상적인 작품이 많습니다. 요즘의 일상이라는 것이 ‘좋은 생각’류의 잡지에서 나오는 그런 안온한 것이 아닙니다. 멕시코에서는 옥수수 농장을 빼앗긴 농민들의 생활이 일상이고, 인도에서는 종자를 빼앗아가고 유전자 조작 식물이 강제로 심어지는 것이 일상이고, 이라크에서는 전쟁 상황이 일상이고, 한국에서는 인간이 바겐세일 당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일상이란 것이 이렇게 중층적이고 다면적입니다.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일상의 복잡함을 뚫고 사람들에게 새롭게 해석해 주는 참신한 시선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 조정환

1.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문제의 초점이 임금문제와 노동시간 문제에서 비정규직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노동자와 다중은 이 문제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가?
2. 노동조합 조직과 많은 노동단체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고용불안정성의 문제로 파악하고 고용안정(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의 달성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노동기본권이 논거로 동원된다. 비정규직이 위기의 삶을 의미하는 한에서 정규직화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현재의 자본관계가 기술, 정보, 지식, 정동(affect)에 광범위하게 의존함으로써 직접적 노동(직접적 고용자)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한에서 더 많은 직접적 노동의 안정적 사용에 대한 요구는 탈근대자본주의를 근대의 산업자본주의로 복귀시키라는 요구를 의미하게 되어 비현실적 복고경향을 드러낸다. 둘째 설령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요구의 지향은 안정된 자본주의의 구축에 있게 되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닫게 만든다. 즉 이 요구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요구이다.
3. 현대의 비정규직 문제는 고용불안정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은 삶의 불안정, 삶의 안보(안전보장)의 취약화의 문제이다. 다중은 고용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한다. 고용에의 요구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용요구는 실제로는 삶의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닥쳐온 고용위기는 자본(관계)이 다중의 삶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자본관계와는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삶의 행복을 추구할 방법을 찾는 것이 다중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갈 바탕은 삶의 생산과 재상산 능력으로서의 노동이다.
4. 오늘날 노동은 분산된 개인들의 활동이 아니라 전 사회적이며 전 지구적이고 공통적인 인류적 활동이다. 노동은 더욱 더 깊이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오늘날 직접적으로 임금노동에 참여하는가 않는가는 더 이상 노동하는가 않는가로 가르는 지표일 수 없다. 노동의 비물질화, 지성화, 조직화, 정동화, 공통화로 인해 삶과 노동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우리가 확인하는 새로운 임금노동형태들(게임노동, 연구노동) 외에, 다양한 비임금노동형태들이 이미 있어왔거나(가사노동, 아동노동, 가족구성원의 심부름, 히끼꼬모리) 새로이 대두하고 있다(자영의 소호, 생산자공동체나 협동조합; 불안정노동 형태인 파출부 노동, 배달노동, 프리터) 임금/비임금, 생산/재생산을 불문한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오늘날에는 네트워크화되고 공통하되어 인류 및 생태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총화적 활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은 착취도 이 공통화된 사회적 노동을 착취(노동시간의 절단에 근거하기보다 자본주의 공리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포획임)한다.
5. 고용형태를 둘러싼 쟁점(비정규직=프리터, 아르바이트, 파견근로, 특수고용, 가사노동)은 생산의 문제라기보다 생산공통체 내부에 역할과 권력의 사다리를 형성하여 다중의 삶의 네트워크 내부에 위계를 도입하는 문제이며 이 위계에 따라 공통노동의 성과물을 차별적으로 배분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오늘날 착취는 사회화된 노동, 일반노동에 대한 착취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본관계에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고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취업노동자)은 직접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자본이 ‘이용’하도록 만드는 역할, 즉 지주소작관계 하에서의 ‘마름’과 비슷한 역할을 떠맡아 가고 있다. 개별 자본에 직접 고용되지 않거나 불안정하게 고용된 사람들이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도가 높은 만큼 취업과 정규고용은 삶의 안전보장(보험)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비정규직화는, 자본이 노동자에 대한 보장책임을 피하고 공통노동의 성과물을 독식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로부터 ‘일정하게 보장받는 직접고용노동자’와 자본 사이에 비보장노동자에 대항하는 안보동맹이 맺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그 동맹은 주권적 안보동맹이다.
6. 그래서 오늘날의 고용안정쟁취 투쟁은 단순한 노동기본권의 요구를 넘는 것이며 삶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안보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중 내부에 위계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다중의 연합을 추구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삶의 안보가 고용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은 자본의 게임룰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삶의 안보를 도모하기 위한 다른 방향이 가능하다. 그것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삶의 위기를 초래하는 현재의 고용제도와 분배제도에 반대하면서 다중이 삶의 안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받는 방법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생산조건과 부합한다. 다중의 일반노동이 현대의 생산과 재생산의 근거인 만큼 그 일반노동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안전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다중의 연합을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 지구의 부는 무조건적 안전보장소득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7. 정규고용을 회피하면서 혹은 정규고용으로부터 배제되면서 ‘욕망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프리터들에게서 삶의 다른 형식이 실험되고 있다. 프리터의 확산은 오늘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하지만 프리터는 자본의 게임룰(고용/비고용, 정규/비정규, 취업/실업)에 도전하기보다 그것에 조응되는 방식으로 움직임으로써 자본의 발전을 돕는다는 다른 면을 갖기도 한다. 욕망하는 삶에 대한 개인적 추구는 자본관계에 쉽게 포섭된다. 오늘날 생산조건이 공통적인 한에서 욕망하는 삶에 대한 추구도 공통적이고 집단적일 때에만 실질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리터는 자본의 현행의 게임룰에 도전하면서 무조건적 보장소득과 자유로운 노동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신이 욕망하는 자유로운 노동의 삶을 집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8.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논란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은 다중의 연합을 파괴하고 다중 내부에 위계제를 도입하면서 소수의 안정된 고용노동자를 매개로 하여 다수의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를 파견근로, 기간제근로 등의 형태로 착취하려는 제도 구축 시도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제도를 더욱 확장하고 또 확고하게 안착시키려는 이 법적 시도의 나쁜 효과를 폭로하고 그것에 맞서면서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정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그것은 현행의 일반적 공통노동과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현재의 사적 자본관계를 척결하고 자본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보장을 이룰 관계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동성애를 부정하지 말라

수요일, 10월 24th, 2007

소수자 담론을 가만히 지켜다 보면, 비슷한 패턴으로 이루어 짐을 알 수 있다. 가령, 여성해방이나 인종차별금지 장애인차별금지 담론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다.

종교와 차별
불교는 인과응보의 교리를 통해 현생에서의 불행이나 장애를 전생에서 행한 죄의 결과로 가르쳤다.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한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하고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표적 예가, 대지도론(大智度論)인데 여기서는 업(業)의 종류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장애의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극심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복지에 대한 관심과 장애인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회적 편견과 인식에 대한 연구도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 문화적 원인으로 불교 교리를 지적하는 설(設)이 있다.
근래, 차별금지법안이 제출되면서 기독교계 몇몇 단체가 동성애를 ‘악’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교리를 내세우며, 법안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있다. 먼 미래에,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인식에 관한 연구에서 우리는 그 원인을 기독교에 두는 학설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가 모르는 어디선가 그러한 연구가 벌써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이루어 졌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차별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우생학이라는 학문은 당시 사람들에게 탄탄한 근거를 가진 과학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프랜시스 갈톤 이었는데, 갈톤은 초기에 “몇 세대에 걸쳐 결혼을 신중하게 함으로써 천재를 배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독일의 우생학은 19세기 독일의 생리학자 솰마이어 와 플로에츠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이들은 독일의 전시 상황 때문에, 전쟁에 끌려간 건강한 청년들이 죽고, 징집에서 제외된 허약한 자만이 독일에 살아남아 2세를 만들게 되므로, 독일에는 알코올중독자와 신체허약자만이 남게 될 것이라 예견하면서 그들의 생식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후 우생학은 독일민족이 미래 지향적이고 강인하며 인내심이 많고 철학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제일 우수한 민족이라고 설파하였는데, 이는 나치즘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독일 정부는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시해서 ‘부적격자’는 자발적으로 거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나치당이 집권한 뒤에는 강제 규정으로 바뀌었다. 우생학자들은 불치병, 정신병, 백치, 정신박약, 불구아동을 살 가치 없는 삶으로 구분한 뒤 국가가 안락사 시킬 수 있다고 정당화 했다. 이렇게 시작된 대규모 학살 중의 하나가 ‘유태인 학살’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우생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인디아나주에서 처음으로 정신병자, 백치, 강간범을 거세하는 법이 통과되었는데, 이후 30개 주에서 이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또한, 독일, 캐나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로 확산되었다.
우생학자들은 가난의 유전도 사회적 문제가 아닌, 과학적 문제로 보았는데 가난을 열성 인자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거세하는 방법만이 가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보았으며, 또한 가난한 자들을 거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평등의 이념성
기독교인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에서,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한다. 과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인간이 그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적인 것일 뿐,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지는 않으며, 윤리에 대해서도 말해주지 않는다.
과학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와 교묘히 결합할 때, 일부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며, 이유 없는 편견과 인식을 사후정당화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동성애 담론에서도 온갖 과학적 근거로 동성애를 ‘병’의 한 종류로 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온갖 과학적 근거를 이유로 ‘정상’이라는 주장은 ‘과학만능주의’에 경도된 생각이기에 나에게는 설득력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과학적 근거를 찾는 자들의 의지는 이미 동성애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을 정당화 시키려는 의지이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뿐, 아무런 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가치는 신에게서 혹은 신을 통한 인간에게서만 발생할 뿐이다.
나는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평등을 외친다. 남자와 여자가 과학적으로는 아무리 다를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상인과 장애인이 능력에 있어서는 다를지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흑인과 백인이 색깔로는 다를지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동성을 사랑하거나 이성을 사랑하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수자 담론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말한다. 그들은 대립되는 집단적 인간들의 차이를 모르지 않는다. 다만, 같은 인간으로서 그 같은 차이를 무시하고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학의 죄 관념은 정죄(定罪:죄를 규정함)하는 관념이다. 죄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열거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죄 관념은 정죄하는 관념이 아니다. 기독교의 죄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구체적 행위에 하나하나 적용하여 무엇이 죄인지 정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던 짓이었다. 그래서, 정죄하지 말라 하셨고,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다.
우리 개개인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자 앞에서 모두 죄인이다. 절대자는 우리의 크고 작은 차이들을 무시하시며, 평등한 죄인으로 취급하신다. 우리의 죄를 말하시되 평등하게 대하신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죄 관념이며,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007 가을 전통문화 답사

목요일, 10월 18th, 2007

2007 가을 전통문화 답사 다녀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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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제국주의 그리고 세계화

화요일, 10월 16th, 2007

발제 중에 이런 제목이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세계화 – 버마 민주화 사태를 바라보며’라는 제목이었다. 시의성 있고 논쟁적 주제라 비교적 많은 학우들이 열의를 보였다. 이 내용은, 한국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온 민주주의의 과정을 버마의 경우와 비교하여 이해하고, 말 그대로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세계화할 것인가?’에 대한 발제였다.

세계화에 대한 소고
세계화라는 단어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기술적 용법과 어떤 당위를 주장하는 데 쓰인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현재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치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는 세계화 되었다.’라고 묘사하고, 후자의 경우 ‘우리의 것이 세계화되어야 한다.’ 혹은 ‘우리의 것을 세계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쓴다. 이는 우리의 것을 보편화시키려는 노력이며,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 것을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다.

당위로써의 세계화에 대한 분설
먼저 우리의 것이 다른 나라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세계화에는 우리의 것이 좋다는 가치판단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판단이 독단적이고 폭압적으로 변화할 수가 있는데 이 좋은 예가 제국주의이다. 미국이 자신의 민주주의와 가치를 이식시키고자 많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것을 다른 나라의 것과 같이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세계화에는 다른 나라의 것이 좋다는 가치판단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판단이 우리의 좋은 것을 무시하거나 다른 나라의 것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여겨지면 현실성-주체성을 상실한 사대주의로 변모할 위험이 있다.

정치에서 정체성
‘한국 민주주의의 세계화’라는 주제는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문제이다. 미얀마 국민들은 한국 민주주의가 세계화되든 말든 관여치 않는다. 미얀마 국민들이 자국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례로써 한국을 고려할 수는 있으나, 이는 적극적-전파적 태도가 아니라 수용의 태도이기 때문에 의미가 다르다.

제국주의의 시작점
제국주의적 태도의 시작은 어디일까? 사실은 다른 사람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것을 자신이 해주고자 하는 것이 제국주의적 태도의 시작은 아닐까? 그러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문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러한 탁상공론과 주장을 그치고 다른 곳으로 우리의 의식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자본이 그들의 무기생산에 일조하고 있는 이런 문제들에 우선적으로 의식을 돌리고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종교에 대한 수호 – 욕먹으면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금요일, 10월 5th, 2007

이번에도 기독교가 집단적 비난을 받는 것 같다. 어떤 목사는 “이명박 안 뽑으면 생명책…” 어쩌고 하는 발언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집회까지 열었나 보다.
나는 사실 뉴스도 잘 안보고, 차라리 너무 말이 많아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요즘 세태를 핑계하며 그들의 말을 성실하게 들어보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그 외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방어하는 방법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종교의 타락 가능성
솔직히 어느 종교나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사실 어느 집단이나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집단화되면 그 집단이 가지게 된 권력이 점차로 커지고, 그 커진 권력만큼이나 타락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때문에 ‘정교분리’의 원리가 나왔나 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거대권력의 타락가능성이기에, 권력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정치적 행위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얀마에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는 수도승들의 자기희생적 모습에 누가 ‘정교분리’의 잣대를 들이댈 것인가? 아무리 ‘정교분리’를 신념으로 아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종교인의 모습에 한 번쯤은 주춤하지 않을까? 종교의 타락 가능성은 종교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 권력에 기반한다.

지칭되는 것
참으로 묘하게도 우리에게 어떤 종교로 지칭되는 것은 이러한 권력화된 집단으로서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눈에 자주 뜨이는 집단은 우리의 눈에 뜨이기 이전에 활동이 많다는 의미이며, 그 활동만큼이나 권력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속세를 피하여 산속으로 들어간 종교인들은 끊임없이 금욕적이고 자신을 축소하는 것을 이미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결국, 우리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눈에 거슬릴 정도의 권력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
이렇게 되었을 때 종교집단은 오히려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측면이라기보다, 종교가 행하는 정치적 행태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비판은 예수가 말한 사랑과 공의, 불타가 말한 자비의 정신에 대한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혹은 불타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양태에 대해서 비판하게 된다. 이것이 종교적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며, 성경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고 해서 그럼 무의미한가?
앞서 말했듯이 이런 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순수한 측면에서 종교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순수한 종교적 교리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이건 정말 개뼈 뜯어먹는 소리 하는 거다. 애초부터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집회는 말 그대로, 정상회담을 저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을 찍으라는 정치적 행위이며, 권력을 지향하는 불교계 지도자들의 로비였으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사학법 반대 투쟁이었으며, 또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통행세징수였던 거다. 그래서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정치적으로 악하다면 악한 것이다. “기독교(불교)는 왜 그러냐?”라는 말은 사실은 “기독교(불교)라는 정치집단은 왜 그러냐?”라는 의미로 읽혀야 한다.

진리에 대한 믿음
진리에 대한 믿음 중에 가장 강직한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무리 비판되어도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종교 집단이 정치집단과 같이 평가된다고 해서 진리는 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학문을 발전시켰고 사회를 변화시켜온 원동력은 깨어질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시대의 진리를 끊임없이 거부한 비판자들과 투쟁가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죄를 짓는다고 해서 예수의 구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불교인들이 너무나도 타락했다고 해서 자비의 정신이 그 의미를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진리와는 별도로 그들은 평가되어야 한다.

자기가 속한 종교집단에 대한 책임
우리는 올해 아프간 피랍 사태를 접했다. 나는 물론 그들을 향한 네티즌의 사이버 테러와 법적 근거 없는 구상권이 행사될 뻔한 사태들에 대해서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일반 국민의 반기독교 정서는 기독교 정치집단의 누적된 허튼짓들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누적된 반기독교 정서가 이미 ‘기독교는 광적인 선교집단.’ ‘터무니없는 정치논리’등의 선입관이 팽배한 상태에서, 아프간 피랍이라는 국제적 사태가 벌어지니, 이미 색안경이 쓰인 상황에서 엄한 사람 당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형성된 선입관이기에, 이러한 터무니 없는 집단 폭력이 행해진 사태에는 기독교도 분명히 일조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집단적으로 강하게 선입관이 새겨지면, 터무니없는 폭력이 이루어지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으로서 남과 같이 범주화되는 것은 모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자기가 속한 사회인으로, 기독교인으로, 불교인으로, 취급받는 것은 모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비판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인식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불완전하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내세우는 집단의 이름에 모두 동등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한국인으로서 행하는 당신은 다른 한국인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으며,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나는 물론 외국에 나가 소비성 관광을 할 여지도 되지 않지만, 돈 펑펑 쓰는 한국인이라는 선입관은 나에게도 끝없이 영향을 미칠 것이며, 어쩌면 나도 네티즌의 집단 폭력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니까 자신이 속한 집단의 허튼짓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바로 이끌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들의 허튼짓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며, 한국인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의 허튼짓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은가? 또한, 우리는 그들의 표피적인 행동 때문에 진리를 놓치는 과오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