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지식네트워크 행사에 다녀 왔다.
화요일, 10월 30th, 200710월 28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시민지식네트워크 토론회를 가졌다. 27일 고속버스를 타고 7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후에, 반가운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과…
느끼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뭐 정리가 안된다. 내가 흔히 핑계대기로는, 생각의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과정이 중요하며, 또 그 과정보다는 내가 그 과정을 다시 해낼 수 있는 존재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하는데… 또… 사실은 그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까먹는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정리가 안된다.
그냥 토론회에 있었던 발제문을 올린다. 당연 내가 쓴거 아니다.
삶이 보이는 창 르포문학모임 – 김순천
그동안 4여년간의 기록작업을 통해서 저희작가들은 이제야 우리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은 뚜렷하게 알 것 같습니다. 정말 미안한 말입니다만 저희들이 작업한 과정은 한국문학을 버리는 과정이었습니다. 한국문학에서는 얻을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이나 경제학, 역사, 구체적인 현실에서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사회학자 22명이 기록한 ‘세계의 비참’은 저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99년 부르디외는 권터그라스와의 대담에서(이것은 뉴레프트지에 실린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세계의 비참’과 같은 책을 만들었는지 말을 했습니다.
부르디외: 우리가 원한 건, 독자들이 이 모순들을 꾸밈없는 본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세운 한가지 지침은 문학적인 것을 피하자는 겁니다.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드라마들을 접하게 되면 잘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원칙은 가능한 한 혹독하리 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이고 거의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죠. … 우리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 낸 폭력이 너무나 심해서, 순전히 개념적인 분석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르디외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비정상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폭력에 다가가기 위해서’ ‘혹독하리만치 직접적으로 묘사하자는 것’과 참다운 문학으로 가기위해 우리는 오히려 비문학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르디외의 태도에 대해 권터그라스는 유머의 전통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볼테르의 ‘캉디드’나 디드로의 소설을 인용하면서 혹독하게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인물들을 거론합니다. 유머가 빠진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을 간접 비판한 것이죠. 이에 부르디외는 ‘진보적인 복고를 위한 강력한 보수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을 말하는데 거기에 유머를 도입하자는 그 사고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럽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극우파나 우파에 의해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토니블레어나 죠스팽 등 좌파에 의해서 행해지는 복잡한 면이 있으며 진보주의자에 의해서 강력한 보수혁명이 수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그것은 기묘한 일상적인 논리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하나가 유머라는 것입니다. 저는 부르디외의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쳤습니다. 한국사회도 ‘사실’을 말하는데 유머를 도입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한 것들이 찬양받고 이런 것들이 주요 언론에서 선택적으로 유통됩니다. 일부작가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논리를 내면화 시켜 가벼운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재미나 유머가 한 세계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표현해 주고 있는 사실은 왜곡되고 있습니다. 진술들은 무겁게도 가볍게도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 중 한 측면이 선택되어 강박적으로 강요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겠지요. 부르디외는 이런 자그마한 논리가 바로 진보를 가장한 강력한 보수혁명이라 한 것입니다. 체게바라가 티셔츠나 상품으로는 소비되지만 그의 삶은 배제되듯이 재미라는 것 속에 진정한 사람들의 삶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 외에도 중국의 라오웨이의 ‘저 낮은 중국’, 존버거의 ‘제 7의 인간’,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 등이 우리작업에 영향을 많이 주었습니다. 라오웨이는 밑바닥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법과 정서적인 풍부함을, 존버거는 일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조세희는 소설이 어떻게 현실과 맞닿아 있는가를 표현해 주었습니다.
부서진 미래에 대하여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면서 저는 ‘시간’에 대해 생각을 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간은 고여있거나 멈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시냇물처럼 느리게 마이크로 렌즈로 섬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인간의 노동력이 바겐세일 당해 건장한 한 가장이 일하는 것만으로는 가정이 지탱이 되지 않아 부인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자식들도 비정규직(아르바이트)로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해도 기본적인 생활 꾸려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이 일정한 사회계층을 형성하면서 흑인들처럼 하나의 인종이 되어 경멸을 당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 안에서 폐쇄를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은 명백히 민주주의에 대한 참혹한 후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 비참하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도 비정규직이 될지도 모르면서 비정규직을 비난한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무지와 공포입니다. 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갖는 순종 속에 감춰진 비참한 삶의 조건입니다.
며칠 전 시사IN 편집장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IMF 전에는 기자들이 경영진이나 윗선에서 잘리더라도 기사를 썼는데 지금은 아애 취재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기는 내부검열이 심층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정규직이나 일반 국민들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을 향한 자기검열이 전면화 되고 있어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것은 고통보다도 더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중층적이고 다층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사고력과 판단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우리의 종자가 사라지듯이 정신적인 다양성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데 TV드라마 속 에피소드만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진지하게 우리 내부에 물음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선을 그어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서로 고민들을 나누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에게 부탁 하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르디외 등 사회학자 22명은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나라에서 신자유적인 정책이 가져온 폭력성을 순전히 학문적인 개념적으로만 파악할 수 없어서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 기록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저희들이 살고 있는 무너져 가는 세계를 위해 학자들이 거리로 나서줄 것을 원합니다. 세계를 깊게 이해한 사람들이 이 잘못되어가는 세계에 선을 그어줘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성이 파괴되지 않게 막을 ‘지적인 장벽’이 필요합니다.
저희 르포문학은 예전에는 전쟁과 정치적인 작품이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일상적인 작품이 많습니다. 요즘의 일상이라는 것이 ‘좋은 생각’류의 잡지에서 나오는 그런 안온한 것이 아닙니다. 멕시코에서는 옥수수 농장을 빼앗긴 농민들의 생활이 일상이고, 인도에서는 종자를 빼앗아가고 유전자 조작 식물이 강제로 심어지는 것이 일상이고, 이라크에서는 전쟁 상황이 일상이고, 한국에서는 인간이 바겐세일 당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일상이란 것이 이렇게 중층적이고 다면적입니다.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일상의 복잡함을 뚫고 사람들에게 새롭게 해석해 주는 참신한 시선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 조정환
2. 노동조합 조직과 많은 노동단체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고용불안정성의 문제로 파악하고 고용안정(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의 달성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노동기본권이 논거로 동원된다. 비정규직이 위기의 삶을 의미하는 한에서 정규직화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현재의 자본관계가 기술, 정보, 지식, 정동(affect)에 광범위하게 의존함으로써 직접적 노동(직접적 고용자)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한에서 더 많은 직접적 노동의 안정적 사용에 대한 요구는 탈근대자본주의를 근대의 산업자본주의로 복귀시키라는 요구를 의미하게 되어 비현실적 복고경향을 드러낸다. 둘째 설령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요구의 지향은 안정된 자본주의의 구축에 있게 되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닫게 만든다. 즉 이 요구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요구이다.
3. 현대의 비정규직 문제는 고용불안정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은 삶의 불안정, 삶의 안보(안전보장)의 취약화의 문제이다. 다중은 고용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한다. 고용에의 요구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용요구는 실제로는 삶의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닥쳐온 고용위기는 자본(관계)이 다중의 삶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자본관계와는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삶의 행복을 추구할 방법을 찾는 것이 다중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갈 바탕은 삶의 생산과 재상산 능력으로서의 노동이다.
4. 오늘날 노동은 분산된 개인들의 활동이 아니라 전 사회적이며 전 지구적이고 공통적인 인류적 활동이다. 노동은 더욱 더 깊이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오늘날 직접적으로 임금노동에 참여하는가 않는가는 더 이상 노동하는가 않는가로 가르는 지표일 수 없다. 노동의 비물질화, 지성화, 조직화, 정동화, 공통화로 인해 삶과 노동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우리가 확인하는 새로운 임금노동형태들(게임노동, 연구노동) 외에, 다양한 비임금노동형태들이 이미 있어왔거나(가사노동, 아동노동, 가족구성원의 심부름, 히끼꼬모리) 새로이 대두하고 있다(자영의 소호, 생산자공동체나 협동조합; 불안정노동 형태인 파출부 노동, 배달노동, 프리터) 임금/비임금, 생산/재생산을 불문한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오늘날에는 네트워크화되고 공통하되어 인류 및 생태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총화적 활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은 착취도 이 공통화된 사회적 노동을 착취(노동시간의 절단에 근거하기보다 자본주의 공리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포획임)한다.
5. 고용형태를 둘러싼 쟁점(비정규직=프리터, 아르바이트, 파견근로, 특수고용, 가사노동)은 생산의 문제라기보다 생산공통체 내부에 역할과 권력의 사다리를 형성하여 다중의 삶의 네트워크 내부에 위계를 도입하는 문제이며 이 위계에 따라 공통노동의 성과물을 차별적으로 배분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오늘날 착취는 사회화된 노동, 일반노동에 대한 착취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본관계에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고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취업노동자)은 직접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자본이 ‘이용’하도록 만드는 역할, 즉 지주소작관계 하에서의 ‘마름’과 비슷한 역할을 떠맡아 가고 있다. 개별 자본에 직접 고용되지 않거나 불안정하게 고용된 사람들이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도가 높은 만큼 취업과 정규고용은 삶의 안전보장(보험)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비정규직화는, 자본이 노동자에 대한 보장책임을 피하고 공통노동의 성과물을 독식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이로부터 ‘일정하게 보장받는 직접고용노동자’와 자본 사이에 비보장노동자에 대항하는 안보동맹이 맺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그 동맹은 주권적 안보동맹이다.
6. 그래서 오늘날의 고용안정쟁취 투쟁은 단순한 노동기본권의 요구를 넘는 것이며 삶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안보권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중 내부에 위계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다중의 연합을 추구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삶의 안보가 고용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은 자본의 게임룰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삶의 안보를 도모하기 위한 다른 방향이 가능하다. 그것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삶의 위기를 초래하는 현재의 고용제도와 분배제도에 반대하면서 다중이 삶의 안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받는 방법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생산조건과 부합한다. 다중의 일반노동이 현대의 생산과 재생산의 근거인 만큼 그 일반노동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안전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다중의 연합을 위한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 지구의 부는 무조건적 안전보장소득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7. 정규고용을 회피하면서 혹은 정규고용으로부터 배제되면서 ‘욕망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프리터들에게서 삶의 다른 형식이 실험되고 있다. 프리터의 확산은 오늘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하지만 프리터는 자본의 게임룰(고용/비고용, 정규/비정규, 취업/실업)에 도전하기보다 그것에 조응되는 방식으로 움직임으로써 자본의 발전을 돕는다는 다른 면을 갖기도 한다. 욕망하는 삶에 대한 개인적 추구는 자본관계에 쉽게 포섭된다. 오늘날 생산조건이 공통적인 한에서 욕망하는 삶에 대한 추구도 공통적이고 집단적일 때에만 실질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리터는 자본의 현행의 게임룰에 도전하면서 무조건적 보장소득과 자유로운 노동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신이 욕망하는 자유로운 노동의 삶을 집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8.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논란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은 다중의 연합을 파괴하고 다중 내부에 위계제를 도입하면서 소수의 안정된 고용노동자를 매개로 하여 다수의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를 파견근로, 기간제근로 등의 형태로 착취하려는 제도 구축 시도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제도를 더욱 확장하고 또 확고하게 안착시키려는 이 법적 시도의 나쁜 효과를 폭로하고 그것에 맞서면서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정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그것은 현행의 일반적 공통노동과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현재의 사적 자본관계를 척결하고 자본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보장을 이룰 관계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