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4월, 2008

십우도 10 입전수수(入廛垂手)

화요일, 4월 29th, 2008

십우도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저자거리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柴門獨掩 (시문독엄) 싸립문을 닫고 홀로 고요하니
千聖不知 (천성부지) 천명의 성인이라도 그 속을 알지 못하네.
埋自己之風光 (매자기지풍광) 자기의 풍광은 묻어 버리고,
負前賢之途轍 (부전현지도철) 옛 성현들이 간 길들도 등져 버린다.
提瓢入市策杖還家 (제표입시책장환가) 표주박을 들고 저자에 들어가며,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酒肆魚行化令成佛 (주사어행화령성불)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교화를 펼쳐 부처를 이루게 한다.


露胸跣足入廛來 (노흉선족입전래) 가슴을 드러내고 맨발로 가게에 돌아와
抹土塗灰笑滿玖 (말토도회소만시) 흙과 회를 바르니 뺨에 웃음이 가득하구나
不用神仙眞秘訣 (불용신선진비결) 신선의 비결을 쓰지 않고도
直敎枯木放花開 (직교고목방화개) 곧 마른 나무로 하여금 꽃이 피게 하는구나.


십우도, 심우도 라고도 하는 소를 찾는 그림. 소를 진리로 상징화하여 그린 그림으로 10개의 그림이 순서대로 있음. 입전수수는 마지막 그림으로, 위의 글자들은 그 그림에 함께 있는 글임. 그림은 동자가 지팡이를 들고 큰 포대를 매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음. 포대는 중생들에게 줄 복이 담겨있기도 하고, 중생들의 번뇌를 거두어 가는 용도이기도 함.

불타는 살아 생전에 신통력을 부리는 자들을 멀리하였음, 그들은 그 신통함 때문에 자신의 불성을 돌아볼 수 없기 때문임. 그러한 신통으로 궁극적 해탈을 이룰 수 없음을 간파하였던 것임.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성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음. 예수가 기적으로 병자들을 낮게 하였으나, 그들 중 남은 자는 몇이 되지 않음. 그들은 자신의 병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진정한 구원을 얻지는 못하였음.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신통과 기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음. 올바른 가르침(直敎)이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함.

- 인터넷 상에 떠도는 글이라, 독음이 이상한 부분이 있음.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구제에 있음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코멘트가 있음. 학술적으로 이용하려면 원래 있던 것을 문헌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옳을 듯 함.


선가구감 23

금요일, 4월 25th, 2008

“學語之輩가 說時似悟나 對境還迷하니 所謂言行이 相違者也라.” 선가구감 23.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이성

금요일, 4월 18th, 2008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대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성이 거부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것이 인간이성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해답을 얻을 수도 없는 문제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순수이성비판]],I.Kant 저,김희정 역,일신서적출판사.


어떤 기쁨

수요일, 4월 16th, 2008

[ i3 횡설수설 게시판 글번호 20520//학생대표들의 배식과 관련하여 - 은퇴함 ]

사실 사회(세상)이 변한다는 것도 결국 그 사회의 개체인 개개인이 변한다는 의미로 수렴되는 것이라서, 이런저런 뻘짓거리가 ‘뻘짓’거리로 끝난 것으로 보임에도 어떤 희망을 바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은퇴함의 발언들은 나에게 어떤 희망이다.


투표율에 대한 변명

월요일, 4월 14th, 2008

20대 투표율 저조에 대해 나는 같은 20대로서는 변명하고 싶지 않다. 20대 투표율 저조를 386세대에게 돌리는 20대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순전히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말 그대로 386세대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고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책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태도도 없다. 현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의 자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0대가 해야 할 일은 386세대가 책임져야 하니 모든 것을 그들의 손에 맡겨두기만 하는 게으르고 수동적이자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이 책임지도록 촉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변화시키는 능동적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계속해서 20대가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법으로 정해진 절차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기존의 386세대들뿐이고, 20대는 더욱더 386세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만 본다면, 386세대는 20대 투표율 저조를 훈계할 게 아니라, 박수를 치며 관망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득인 것이다.)

책임져야 할 자가 책임지지 않을 때, 그들에게 책임지도록 만드는 혹은 그들의 책임을 대신 지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자성을 기대할 수 없는 그들에게 역사적 사명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외의 사람들, 결국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수 밖에 없고 책임지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 이름없는 그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2008.04.09. 검도장에서

목요일, 4월 10th, 2008

*

검도장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보람이가 가져온 사진기로 몇장 찍게 되었다. [사진보기]

아래 동영상은 공격연습과 대련연습을 촬영한것.

동영상(mp4)다운로드


스승의 가르침

화요일, 4월 8th, 2008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 여과된 스승의 가르침은 수난을 겪는다.” – [[간디와 비교종교]],셰샤기리 라오,이명권,분도출판사


총학에만 불평하면 해결이 될까? – 식당을 중심으로

일요일, 4월 6th, 2008

1. 학교와 총학
1-1. 총학생회에 대한 평가는 학교당국에 대한 평가와도 직결된다. 총학생회는 학내에서 학교당국의 협력자로서 혹은 학교당국의 대항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학생단체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학교당국의 행정에 만족할 경우, 총학생회는 학교당국에 대항하는 행위로는 학생들의 만족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반대로, 학생들이 학교당국의 행정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총학생회는 학교당국에 ‘액션’을 취함으로써 학우들의 만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2. 지금 학우들이 총학에 가지고 있는 불만은 총학이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이러한 총학에 대한 불만 이전에는 학교당국의 행정에 대한 불만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총학에 가지는 불만의 정체는 총학이 학교당국의 만족스럽지 않은 행정을 지적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인 것이다. 식당이 만족스럽고 버스가 만족스럽다면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총학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학우들은 총학에 대한 자신의 불만이 동시에 학교당국에 대한 불만임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2. 식당 정책의 경향
2-1. 올해 들어서 변화된 식당 정책에는 어떤 경향이 보인다. 일하는 분들의 효율성을 위한 변화라는 것이다. 일하는 분들의 ‘효율성’을 위해 특식은 사라졌으며, 일하는 분들의 재료준비를 위해 분식당은 배식시간이 생겼다.
2-2 Mom’s kitchen이 식권카드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길 가던 총학생회장을 붙잡고 물어본 적이 있다. 예전에는 식당을 운영하는 곳이 학생식당(ECMD)과 분식당(소비조합)으로 달랐기에 불가능하겠지만, 학교직영으로 바뀐 현 상태에서 그것을 받지 않을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총학생회장은 ‘회계가 학생식당과 Mom’s kitchen이 분리되어 있어서.’라는 설명을 했다.
2-3. 식사를 준비하는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회계업무의 성격상 분리가 필요한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번 학기 들어 변화한 식당정책의 대체적인 경향은 ‘학우들의 편의’를 위한 변화보다는 일하는 분들의 ‘효율성’을 위한 변화였다는 걸 말해보고 싶다. 식당 운영의 효율성, 회계상의 효율성.

3. 정작 학교에 대한 평가는 비켜가는 편파적 비난에 대하여
3-1. 특식이 사라진 것에 대해 학우들은 그다지 불평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기보다, 기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 ECMD가 정식의 효율적 배식을 위해 특식을 폐지한다고 했을 때, 학우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얼마나 강력한 반발이 일었을지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래서, 여기서 진정하고 중요한 질문은 ‘왜 학우들은 특식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이의 제기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3-2. 학우들이 발언하는 것을 봐도 어떤 경향이 보인다. 얼마 전 뜨거웠던 밥줄과 식권 줄의 논쟁에서도 학우들은 학우들 사이에서의 질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정작 학교당국에 대해서는 심정적 불만이 있음을 약간 내비치기만 할 뿐이다. ‘식당이 좁아서 그렇죠.’라고 말하고는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번 총학생회에 시원해질 것을 요구하는 글에서도, 학교행정당국에 대한 상당한 문제인식을 내비치기는 했으나 구체적 요구는 총학생회가 시원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이제는 총학생회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열쇠’라고 까지 수사된다.
3-3. 우리 학우들은 학교당국을 비판하는 것에 있어, 심각한 불편함을 느낀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직면하는 문제들 대부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학교 당국에 의한 문제들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문제가 총학생회이다. 이제, 학우들은 총학생회에 발언하는 방식을 좀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총학생회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학교가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총학생회가 이 같은 나의 의사를 학교당국에 전달하고 관철시켜 달라.”
여기서 총학생회의 부분만 언급하는 것은, 정작 근본적인 지점에서 침묵하는 것이다. 또한, 학교당국보다 비교적 약자인(또한, 비판하기 쉬운) 총학생회만을 비판하는 것이기에 나에게는 일종의 비겁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왜 총학이 선교단체처럼 되었나?
4-1. 우리 학교 총학생회가 왜? 선교단체처럼 운영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할 필요가 있다. 총학생회장단은 우리 학우들이 뽑을뿐더러, 그들에 대한 평가 또한 학우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착각하지 말자, 총학생회의 어떤 결정들은 온전히 총학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총학생회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학우들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학우들의 여론을 신경 쓰게 되며, 또한 학생대표로써 그래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4-2. 우리는 쉽게 총학생회에 이런 말을 한다. “이번 총학생회가 기도가 부족한 것 같다.” 또한, 어떤 액션을 취하는 총학생회에 이런 말을 한다. “좀 더 알아보고, 물어보고 행동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결국 정작 가장 큰 책임을 지닌 학교당국보다 총학생회에 더욱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4-3. 좀 더 알아보고 물어보고 기도하는 총학생회가 하는 업무처리는 얼마나 더딜 것이며, 또 얼마나 신앙적이겠는가? 그들은 그 신앙의 힘으로 이 사회의 고난을 자신 하나가 욕을 먹는 것으로 해결된다면 기꺼이 욕을 먹겠다는 신앙적 태도를 지니기도 한다. 아~~!! 이 얼마나 답답할 노릇인가!!
4-4. 우리 좀 솔직하자. 총학에 시원해질 것을 요구하는 우리는 정작 얼마나 시원한가? 총학의 답답함을 비난하지만, 스스로는 얼마나 시원하게 자신의 불편함을 말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불편함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대한 무수한 비난에 맞서, 우리는 얼마나 시원하고 당당해 본 적이 있었던가?

5. 진짜 열쇠는 총학의 시원함이 아니라, 학우들이 시원해지는 것.
5-1. 우리는 총학에 대해서만 말하고, 학교당국 앞에서는 침묵한다. 이제 어느 정도 모두 공유된 학교당국에 대한 문제인식조차 학교당국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동의를 얻지 못한다는 암묵적 인식하에, 더 이상 이야기 되지 않는다. 결국, 학우들의 갈 길 없는 불만이 분출될 곳은 만만한 총학생회일 뿐이다. 이는 근본적이지 못할뿐더러, 비겁하기까지 하다.
5-2.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진정한 열쇠는 총학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우들이 학교당국에 대한 불평불만을 당당하고 시원하게 내뱉게 되었을 때, 총학생회도 비로소 시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시원한 학우들의 의사가 반영되어 총학생회도 학교 측에 강력한 항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이제 시원해지자. 답답한 동행은 우리의 답답함의 결과물이며, 우리가 답답한 동행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 또한 학교비판을 주저하는 답답한 학생의 모습임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