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째주 TTB리뷰 당선
목요일, 8월 28th, 2008알라딘에서 E-mail이 와 있길래, 무슨 내용인가 보니 [거짓의 사람들]에 관해 쓴 글이 TTB 리뷰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별로 잘 쓴 글이 아님에도 당선시켜주신 알라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지급해 주신 5만원 포인트는 재미있는 책을 사읽는데 쓰도록 하겠습니다. 히히~~~
그저 읽고, 정리하고, 가끔 불평할 뿐이지요.
알라딘에서 E-mail이 와 있길래, 무슨 내용인가 보니 [거짓의 사람들]에 관해 쓴 글이 TTB 리뷰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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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 실재의 열망이냐, 상상적 도피냐 [ 원문링크 ] by 이상한 모자 from 진보신당 경기도당 소식지(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다시 한번 읽었다. 소설이고,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 것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읽었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예전에 누군가가 "조세희는 비겁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기사를 본적이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처음 접했을때, 단지 ‘우파’인사의 선입견에 가득찬 투정같은 것이리라 감히 추측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내가 이러한 감상을 친구에게 말하며, 결국 소설의 마무리가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이다."라는 말로 마무리 지어진다고 말해 주었더니, 아Q의 ‘정신적 승리법’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아마 그것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과도 비슷한 것도 같다.
그런데, 내가 지금 적어두고 싶은 부분은 소설 내용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서울: 이성과 힘, 2006) 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한구절 인용한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 칠십년대는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천구백사십년을 전후해 태어난 우리 세대가 어느 사이에 서른을 넘어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이 평범한 직장인이 된 나의 눈에도 보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 세대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선배 세대들의 경우를 보아도 젊은 시절에 인간의 진짜 척추라고 믿고 애써 간직하려고 했던 귀한 가치들, 그리고 개개인의 마음속 소유인 아름다운 정신을 부양 가족 거느린 가장이 되며 밖으로 던져버리는 일은 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리 무서운 군부 독재 치하라고 해도 그때 우리 모두가 정치적 압제에 시달렸던 것은 아니다. 독재 기관의 감시를 받고, 체포되어 고문받고, 억지 재판 과정을 거쳐 감옥에 갇히는 사람은 구성원 전체를 두고 볼 때 말할 수 없이 적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과거 어느 세대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다는 바로 우리 세대가 윗세대들과 ‘연대’ 라도 한 것처럼 잘 단결해 무서워하고 있었다. 다수가 무서워한 것은 암흑 독재 체제가 냉혈 하수 부역자들을 시켜 올바름에 맹렬한 폭력으로 가한 체포-고문-재판-투옥만이 아니었다. 물론 잡혀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포였다. 그러나 강압 통치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가만히만 있으면 자신과 가족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응과 무저항을 안전한 생활 방식으로 터득한 사람들에게 고문이나 투옥은 밤잠을 빼앗아갈 정도의 공포가 이미 아니었다. 육십년대에 새파랗게 젊었던 우리 세대는 서른 몇 살이 되어 바로 윗세대들과 똑같이 ‘실패자’가 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탄압은 정치와 경제 양면으로 가해졌다. 자세히 보면 지금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만, 그때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 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서울: 이성과 힘, 2006), 8-9.)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악은 국민 대다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한참 지나버린 상태에서 열심히 욕을 먹고 있는 매국노들이라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국가의 안녕’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무서워 했던 것도 어쩌면, 일본 경찰의 체포나 고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창 시끄러웠던 촛불집회에 있어서 전경들의 과잉진압도 국민 대다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물대포는 무섭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러하다, 모든 신념을 가진 투사들이 싸웠던 것들, 그것은 국민 대다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약에 그러한 문제들이 우리들과 상관있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문제는 우리들과 상관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이 문제는 우리들과 상관없기 때문에 더이상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평온할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이 우리와 상관없을 수 있다는 것, 내가 중요시하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절망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조차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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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비전과리더십 |
이 책을 오래전부터 읽고 싶다고 생각 했었는데, 반양장본이 절판되고 양장본으로 개정되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내 서점으로 달려가 재빨리 사두었다. 책의 내용은 변함 없음에도 양장본으로 변화하게 되면 책값만 비싸지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양장본이 아니라 반양장본이다.
스캇 펙의 책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에도 참 좋은 책이다. 보통 읽기 쉬운 책은 책의 질이 너무 떨어지거나, 책의 질이 좋은 책은 읽기가 너무 어렵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은 그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인간 이해에 관한 많은 논점들이 아우러져 있어서 읽을만 하다.
악에 대해서 서술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이 악이라는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스캇 펙 박사는 기독교인이고, 스스로가 책을 적을때 그러한 관점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을 가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비판에 대해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하며, 비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걸 볼수 있는데, 스캇 펙 박사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성서해석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야 말로 엄청난 시대의 비판자는 아니었던가?
‘누구 누구는 악하다’고 딱지 붙일 때 나는 이미 그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도 아주 딱 부러지게 비판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문맥과 상관없이 너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절대로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하고, 그 조심은 바로 자신을 살피는 일에서 시작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스캇 펙,[[거짓의 사람들]] (서울: 비전과 리더쉽,2003), 윤종석 역, 10.)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하나만을 고집해서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악’의 연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도, 도덕적 판단의 위험성이나 과학밑에 도덕을 둘 경우의 위험성 같은 것을 언급해주는 절제의 경우나, 악의 규정에 있어서 ‘선의 결핍이 악이다.’는 종래의 플라톤, 어거스틴류의 주장에 반대하여 악의 실존성을 인정하면서도, 악은 어떤 미성숙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면서 그 내용 속에 ‘수용’하는 사랑, ‘거부’하는 사랑을 언급하여 실천적 측면에서는 긴장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 속에 어떤 논리적 비일관성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스캇 펙 박사는 그의 전작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게으름’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 이번 [[거짓의 사람들]]에서는 ‘교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교만을 나르시시즘과 연관시켜서 이야기 하는데,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자아상을 집요하게 지키고 반성이 부족한 것을 말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즘에 대한 경계로 자기자신을 끝없이 반성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너무 과도한 반성도 ‘죄를 짓는’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너무 과도한 반성’이 신경증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죄에 대한 기독교 교리가 너무 자주 악한 뜻으로 오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독교 교리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이 죄 문제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타당하게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그 접근에는 양면성이 있다. ..(중략).. 기독교 교리가 강조하는 또 다른 한 측면은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제 바른 정신을 가진 기독교 교회가 강조하게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 자신이 지은 사소한 죄들 하나하나에 끊임없이 착념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죄라는 점이다. 자신의 작은 죄에 착념하는 것을 ‘지나친 내성(內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우리를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행위이며, 바로 다른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행위다. (92.)
스캇 펙 박사는 ‘악’하다고 판명되어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악’한 것이 아니며, 깊히 들여다 보았을때 실상 다른 악한 사람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개인의 경우에서 볼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는 한편, 또한 인간들의 거대한 모임 ‘집단 악’에 대해서 언급한다. 스캇 펙이 보기에 “집단은 개인과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집단이 개인보다 훤씬 더 원시적이고 미성숙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심리학적으로 “왜 집단은 부분의 총합보다 항상 뒤떨어지는”지에 대해 모두 설명해 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요인들 중 하나가 ‘전문화’라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많은 악들이 ‘전문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해지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양심분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언급할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개개인이 자신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동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로 인식할 때까지는 어떤 집단이라도 불가피하게 잠재적인 무양심과 악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294.)
권위자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태도는 언뜻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미덕있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전문가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악’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스스로가 과학자가 되는것, 스캇 펙 박사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다.
이어서 새로운 집단의 대표자 선출 과정이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을 지적하며, 이러한 대표선출의 과정에는 타인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의존성이 바탕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정반대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도하기보다는 따르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대개는 게으름의 문제다. 지도자가 아닌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훨씬 더 쉬운 일이다. 추종자에게는 복잡스런 결정, 장래 계획, 주도권 행사, 배척당할 위험, 용기의 구사 등을 겪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300.)
이러한 의존성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스캇 펙은 “이상적인 성숙한 치료 집단은 모두 지도자들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301.)라고 말하는데, 스캇 펙에게 있어서 이상적 정체(政體)는 직접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겠지만, 현실에 있어서 사회가 의회 민주주의로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내었다고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집단은 ‘집단 응집성’을 가지기 때문에 개개 멤버들이 하나로 묶여 작동한다. 이러한 응집성이 없다면, 그 집단이 분해되고 더 이상 집단일 수 없다. 이러한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한 응집력 중의 하나가 나르시시즘이라고 펙 박사는 언급한다. 이러한 “집단 나르시시즘의 실제적이고도 보편적인 유형은 ‘적 만들기’ 또는 ‘비회원에 대한 적대감’ 이라 할 수 있다.”(302.) 건강한 집단의 경우 실패는 성찰과 비판의 계기가 되지만, 악한 집단은 집단에 대한 비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집단 지도자들에게는 실패의 시절이 오면 다른 나라 사람이나 ‘적’을 향한 집단의 증오심을 한층 끌어올림으로써 집단 응집력을 강화하려는 것이 기본이다.”(304.)
이러한 집단 나르시시즘은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단에 속할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개입이 있다.
많은 단계들을 거칠 때마다 나는 그 ‘클럽’의 멤버가 될 만한 자질들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하여 검사를 받았던 셈이다. 어떤 전문 집단이든 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선택과 집단의 선택의 공동 결과로 생겨나는 특별한 분야라 할 수 있다. (305.)
펙 박사의 이같은 언급은, 집단 내부에서의 이야기 되는 ‘객관’ 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국가 전체의 나르시시즘은 때때로 정상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증거에 비춰 입장을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말살해 버려리는 시도를 하게 된다. (322.)
펙 박사는 이제껏 악을 유발시키는 ‘전문화’와 ‘집단’의 나르시시즘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한, ‘전문화’ + ‘집단’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군이다. 스캇 펙 박사는 이러한 전문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징병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징집제야말로 군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게 아니라면 군은 필연적으로 기능 면에서 전문화가 될 뿐만 아니라 심리 면에서도 점점 더 전문화가 되어갈 것이다. 신선한 공기는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기존의 자기 가치관을 강화시켜 점점 자기 우물에 갇히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고삐가 풀어지는 날이면 베트남에서와 똑같이 피에 굶주려 날뛰게 될 것이다. 징병제는 고통이 뒤따르는 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험료 지불과 다를 바 없다. 징집 복무야말로 우리 군의 ‘왼손’을 건강하게 지켜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약 우리에게 군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게끔 되어 있다. 한 국민으로서 우리는 대중 파괴의 수단을 갖고 놀아서는 안 된다. 그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을 분담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우리 대신 그 더러운 일을 수행해 줄 고용 살상자들을 뽑아 훈련시킨 뒤 그들이 무슨 피를 어떻게 흘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우리 자신을 개입시켜 그 고통을 감수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의 행동으로부터 절연시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 국민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서 쭉 얘기해 왔던 그 개인들과 똑같은 존재, 즉 악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악이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되는 까닭에서다. (311-312.)
우리 사회에 군이라는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그 조직을 가능한 한 최고의 수준까지 탈전문화시키는 일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과거의 개념들 즉 보편 병역 및 의무 병역 군대가 있으면 전시에는 지금의 군처럼 군사적인 기능을 감당하지만, 한편 보통 때에는 슬럼가 정비나 환경 오염 예방이나 직업 훈련 교육이나 다른 요긴한 대민 활동 등의 평화적 기능에 전적으로 유용하게 기용할 수 있다. 전원 지원제나 모종의 불균등한 징병제 대신에 이 제도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국가 방위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총알받이로 징집되는 일은 없어질 것이며, 오히려 아주 다양한 요긴한 과업들을 위해 골고루 기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청년 복무 의무화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군의 모험주의를 절제시켜 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전면적인 동원도 한결 쉬울 것이다. 보통 때에도 중요시된다면 징집병들은 그렇게 전시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안이 너무 광범위해 보일지는 몰라도 본질적으로 실행 불가능할 면들은 하나도 없다. (318.)
징병제를 반대하고 모병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 인 듯 하다.
초 귀찮음… 정말 쓸데없는 논쟁이, 돌고돌고돌고돌고… ㅡㅡ;; 짜증나서 다른 사람들 글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싸질렀음.
1. 언제는 95, 96 선배들이 우상화 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황량한 벌판 신생대학에서 맨땅에 해딩하듯이 공부했다고 한다. 그들은 학벌, 지역 등등의 파벌주의가 팽배하는 대한민국 땅에서 아무런 기득권이 없었고 정말 맨몸으로 ‘현실’을 마주대해야 했다고 한다. ‘Why not change the world?’라는 질문과 함께, 그들의 현실은 그들의 ‘도전정신’으로 미화되곤 하였다. 시간적 간극이 커서 실제로 경험해 볼 수도 없었고, 그들의 진정성을 증명해 볼 수도 없었지만. 들려오는 이 전래동화가 담고있는 현실비판과 의지는 나에게 감동이 된다.
2. 한동대학교 네임벨류 논쟁이 한동안 인트라넷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사실 한동대학교 네임벨류 그 자체가 나 개인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한동대학교 네임벨류가 나의 실력보다 허황된 것이라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더욱 노력할 일이고, 한동대학교 네임벨류가 나의 실력에 못미치는 것이라면, 거짓되게 과대포장되지 않은 스스로에 안도하며 스스로의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면 될 것이다.
3. 더불어 이 논쟁은 굉장히 구차하기까지 하다. 한동대학교 네임벨류에 대한 구체적 실증은 발언자 개개인의 체험에서 나오는데, 이 논쟁에 적극적인 논자들은 스스로가 한동대학교의 기득권을 누렸다는 근거, 혹은 자신이 현실에서 패배하였다는 근거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다. 이같은 사고방식은 모두, 학벌주의에 기대거나 혹은 학벌주의에 대한 다른 일면인 학벌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이기에, 논쟁 자체가 구차해지는 것이다.
4. 나는 어쨌든, 이같은 논쟁이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논쟁임에도 불구하고, "한동대학교 네임벨류가 있다."는 주장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인성교육이나 신앙교육을 근거하여 주장하고 있는데, 이같은 주장은 집단 나르시시즘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동대학교의 인성교육 시스템이 효과가 있다면, ‘인성교육’을 핑계하여 학교측이 행하는 온갖 학생규제적 정책들이 나올 이유가 무엇이겠으며, "우리는 한동인입니다."같은 부류의 학생지도위원회의 글은 왜 필요했겠는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성교육이라고 말해지는 각각의 제도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았을때, 정말 실효적인 것이 무엇인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이야기가 구차해지므로 생략하자). 그런가 하면 교수채용 등 교육의 질 문제에 있어서는 한동대학교가 타 학교 보다 나은가?
5. 한동대학교 네임벨류 논쟁이 불편한 것은, 한동대학교 교육의 질 문제와도 결부되어서 이야기 되기 때문이다. 질문 대상자가 바뀌어야 하고 질문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한동대학교는 (재)학생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습니까?
다크나이트 포스터
출처: 네이버
그렇게 사람들이 보라고 추천을 하던 ‘다크 나이트’를 보았다. 꼭 주변 사람들의 평가 뿐만이 아니라, 몇몇 평론가들의 영화해설이 참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보았다. ‘배트맨 비긴즈’의 후속작이라는데, 영웅물의 진화형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다크 나이트’의 구성은 ‘배트맨’이 아니면 불가능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슈퍼맨은 불가능하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계속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배트맨’의 고뇌가 주로 강렬하게 다가왔고, 그리고 하비 덴트의 ‘투 페이스’로의 변화도 강렬하다. 다크나이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보도자료를 보면(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비중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조커’의 무정부주의적 지향성을 인지하기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듯 하다. 그러니까, 통상적인 그저 악행을 ‘즐기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 악행이 나름의 당위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인지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조커’의 내면묘사가 조금 더 있었다면 완벽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번 ‘다크 나이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조커’의 재해석이다. ‘조커’는 참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좀 불필요한 작품일수도 있겠지만, ‘조커 비긴즈’ 따위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혹시 아는가?? 조커의 삶을 통해 또 다시 어떤 ‘해체’가 일어날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라는 말은, 살아있는 것에는 부딪힐 줄 모르는 비겁자들에게 내뱉는 일종의 비꼼이다. 이러한 비꼼에 대한 응수가 정말로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이라면, 그것은 패배자의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일종의 유머러스함으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고 응수하였지만, 그것의 내용은 아직도 살아있는 실재들과 싸우기 위한 격투이다. 비겁하지 않게, 죽어있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들과 부딪힌다는 것은 인신공격과 명예훼손의 논쟁이 어느정도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낯짝에 침을 뱉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우리가 이야기 하는데 현실은 이야기 하지 않은 체 그저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만 하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식과잉에 다름 아니다. 정말 자신이 현실에 뿌리하고 있다면, ‘책’이라는 것도 현실과의 관련성에 의해 읽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책’은 과거의 현실을 이론화 한 결과물이고, 과거에 형성된 그 이론 또한 ‘현재’와의 대화 속에서 검토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이론과 현실간의 관련성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면, 이 주장의 근거는 결여되어 있으며, ‘책을 읽자!’는 그 주장의 ‘계몽성’과는 별도로 주장이 펼쳐지는 방식 자체는 오히려 ‘반계몽’적인 것이다.
심각한 수면조절 실패를 극복해 보고자. 등교길을 도보로 행하고 있음. 보통 웹 싸이트에서 제공하는 지도는 추상화 되어 있고, 등산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음. 이에 반해 구글어스는 위성사진으로 비교적 등산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그와 더불어 오다니는 길 곳곳의 사진을 찍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점도 있음(구글어스에 사진을 함께 연동하고 있는 panoramio). 참으로 세상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처음 지도를 보지 않고 무작정 산을 타고 등교했을 당시에는 2시간 가량의 시간이 걸렸음. 나중에 지도를 보고는 엄청 헤매이다 도착하게 된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음. 그럼에도, 산 주변의 조그마한 사찰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음. 세심사와 대각사. 대각사의 경우 네이버 지도에도 나와있기에 조금 큰 사찰인줄 알았지만, 별로 그다지 큰 사찰은 아님.
오늘 드디어 1시간10분정도 시간이 소요 되었음. 구글어스의 공이 컸음. 그럼에도, 조금 더 짧은 길이 있는 듯도 생각됨. 오늘 지나온 길은 천마지 호수를 지나, 대각사를 지나, 또 조그마한 호수, 그리고 이쁜 집을 지나, 장성동 음식점이 몰려있는 거리가 바로 나오는 길인데, 학우들이 조금만 시간을 내면 좋은 데이트 코스로 활용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등교길에 조금 찍어본 사진들 보러가기
행위자의 언어를 빼앗기 위해 배후세력이 있다는 주장이나,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방법은 정치가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술수인것 같습니다. 그것의 외형이 빨갱이가 되었든 이슬람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의미적 차원에서는 동일한것 같습니다. 뭐 시기적으로 가까운 것은 촛불시위 배후론도 있을 수 있겠고, 우리학교의 경우 우리학교의 스승의 날 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도 들 수 있겠네요.
촛불시위에 참가한 고등학생들의 배후에 전교조가 있다는 발언이나, 학내 시위하는 학생들의 배후에는 평교수연대가 있다는 발언이나, 사실 같은 사고 방식이지요.
역사가 반복된다라는 명제를 결정론적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편은 아닌데, 인간이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들은 끊임없이 반복될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좌파빨갱이에 대한 정치인들의 규정을 그저 ‘시대 착오적 인간들’ 혹은 ‘곧 도태되어 버릴 인간들’ 이라며, 가만히 있는건 지나친 낙관론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