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9월, 2008

버너데트 호이, [[누가 아이의 마음을 조율하는가]](서울: 율력, 2008), 황헌영-김세준

화요일, 9월 30th, 2008
누가 아이의 마음을 조율하는가
버너데트 호이 지음, 김세준 외 옮김/울력

책의 구성

이 책은 아동심리치료와 사이코드라마에 관한 책이다. 먼저 1부에서 이론적 부분들을 개괄하고, 2부에서는 저자가 실제 아동 치료에 있었던 사례들을 살펴보고 각 사례를 통해 저자가 배운 점 들을 이야기 한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앞서 살펴본 이론적 부분에서 전제하고 있는 아동들의 자발성이 없는 문제의 경우와 사이코드라마와 아동치료의 연계성, 그리고 아직도 열려있는 연구 가능성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책을 마친다.

책의 내용

서문

이 책의 서문은 책의 저자 버너데트 호이가 적은 것이 아니라, 맥스 클레이튼 박사가 써 주었다. 맥스 클레이튼 박사는 이 책이 아동을 대하는 치료사나 부모들이 이 책을 읽어 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어서 책을 읽으면서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대략적으로 서술한다. “모든 아동은 자기 내부에 마르지 않는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인간을 치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이 창조적 원천을 우리는 존중해야 합니다. 버너데트가 작업의 매 단계에서 보여 주는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이 창조적 원천에 대한 존중입니다.”1 이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부분은, 아동을 치유함에 있어서 아동의 자발성과 창조적 원천이 아주 핵심적인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클레이튼 박사가 말한 것 처럼, 버너데트는 책 전체적으로 아동을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책이 이 부분을 강조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들어가는 말

버너데트는 피리부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버너데트의 이론적 틀은 모레노의 이론에서 연원하고 있는데, 서문을 작성한 버너데트의 스승 클레이튼 박사는 모레노의 제자이다. 모레노의 경우 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함으로써 아이들의 자발성을 고양시켰고, 저자 버너데트의 경우 인형과 장난감이 아이들의 자발성을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이야기 된다.

들어가는 말에서 나에게 인상깊게 다가온 부분은 저자가 브라우닝의 피리부는 사나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브라우닝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해믈린 마을의 지도자들과는 떨떠름한 관계를 보인다. 인간은 고립되어서는 그 존재를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사안들을 떨칠 수 없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이 책의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방해 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치료의 첫 번째 초점은 치료에 임하는 아이의 1차적인 정황에 맞춰지지만, 동시에 아이의 삶에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 다른 체제에 대한 인식, 이를테면 가족(혹은 가족을 대신할 만한 보호자), 이웃의 영향력, 정부나 국가의 시책, 급변하는 세계관들에 대한 인식까지도 포함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야기로 인해 혼란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는 아이들에게 마치 무기력한 드라마의 배우가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책, 23.)

나는 이 부분에서 심리치료가 사회의 정치권력이나 이웃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님을 느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이들의 삶과 충돌을 일으키는 사회 체제의 복잡한 내용들에 대한 완벽한 개관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아이들의 소리를 실어 나르는 도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책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이 같은 내용들을 다루지 않지만, 문제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단순히 심리 치료적 역할 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도움들 또한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은 이후에 저자가 인용한 마노니Mannoni의 글에서도 드러난다.2

1부 – 이론적 고찰

이론

저자는 어린이를 위한 사이코드라마를 하는 여러 연구자들을 알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여러 연구자들의 적용방식은 다양하지만 그들의 방식에 담긴 공통적인 기본 원칙은 같다고 이야기 한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탐구 과정을 통해 경험한 자신의 방식을 언급하고 그 공통된 기본 원칙을 설명하고자 한다.3 이러한 저자의 근본적 철학적 태도는 이 책을 단순한 기법연구에만 사용하려는 시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드러난다.4

저자는 아동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켈리와 모레노의 이론을 소개한다.5 또한 이와 관련하여 에릭슨의 수용이론, 버지니아 액슬린의 책, 위니컷의 자료를 소개한다.

또한 정신분석학과 사이코드라마 간의 상징해석의 차이를 언급한다. 정신분석학의 경우 성(性)적 측면 위주의 해석을 주로 하며, 사이코드라마에서의 해석은 좀 더 모호한 성격을 띤다. 저자의 경우 해석을 아이의 몸짓언어나 심상을 통해 의미심장한 요소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본다.6 그런 이유로 사이코드라마 디렉터는 몸짓 언어를 재빠르게 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7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와 게슈탈트 치료사들이 쓴 글을 비교한다.8 프로이트와 게슈탈트 치료사들은 몸의 언어에 대해서 동일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몸의 언어를 거짓말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의견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아이의 정서적 윤곽을 나타내는 지도”와 같다. 이는 어쩌면 환자를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저자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멜라니 클라인의 놀이치료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해석에 큰 강조점을 두지만, 저자의 사이코드라마는 분석보다 은유적 상징들을 강조한다. 사이코드라마는 분석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치료자의 자질을 강조한다. 이러한 치료자의 개입은 아이의 자발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앞서 언급했듯이 자발성이야 말로 아이의 문제를 끌어내는 에너지이고 아이를 치유하는 원동력이다.

이어서 자발성에 대해서 서술하는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의 특징은 대니얼 스턴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업하기”라고 명명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정신분석학 이론은 과거의 객관적 외상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반면, 사이코드라마는 그것에 대한 행위를 현재에 행함으로써 승화시킨다. 이 같은 사이코드라마의 현재성은 심리적 외상의 객관성보다 치료대상자의 주관적 내면과 상징들이 비록 객관적으로는 허구라 할지라도, 현재에 보다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그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또한 그것을 행위 하여 봄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 이론이 단지 ‘인지’에 그치는 한계를 갖는 것과는 달리 상당한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 이 처럼 주관적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에너지가 바로 자발성과 창조성이다. 이 같은 사이코드라마의 속성은 저자가 모레노를 평가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저자는 “모레노의 천재성은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가설 창출에 있다기보다는 사이코드라마가 가진 “치료적 효과”에 있다.”9고 평함으로써 이 같은 속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애초부터 객관적 외상의 증명에 중점을 두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객관적 과학성은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 치료대상자의 주관적 내면과 그의 변화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치료의 효과측면에서는 사이코드라마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이코드라마의 준비

이어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준비 단계에서는 아동과 관련된 부모나 주요 관계에 있는 어른들과의 인터뷰로 시작하게 된다. 이 인터뷰는 부모에게 아동을 치료하고자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기능을 하고, 아이에 관한 기본적인 배경 정보를 얻는 데에 있다. 또한 아동의 치료에는 가족들의 협력이 중요하다.10 인터뷰는 앞으로의 협력 관계를 이루는 데 큰 밑바탕이 된다. 또한,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치료사는 “아이 때문에 부모가 갖는 좌절감을 현실적으로 이해”11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첫 인터뷰의 취지는 아동을 치료 현장에 무리 없이 초대할 수 있는 방법을 부모와 함께 모색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제 인터뷰를 끝낸 치료사는 인터뷰를 통해 접한 정보들을 통해 아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아동을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우겠다는 개방적 자세를 준비하는 것이다.12 저자는 인터뷰를 통해 접한 정보를 통해 아이의 문제에 대한 잠정적 가설을 세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의 견해를 아는 것이다. 이 같은 잠정 가설은 언제라도 기각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이제 첫 인터뷰에 들어간다. 저자는 자신을 아이와 같이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아이를 “교정 받아야 하는” 존재로 마주하게 될 경우 자칫 치료자가 권위자로 비치기 쉬워, 아동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킬 우려가 있다.1314 첫 인터뷰에서 아이가 처음 치료자를 보았을 때 보이는 몸짓 언어는 특히 중요하다. 아이 또한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다.15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동이 선호하는 놀이를 알고, 특정한 인형이 어떤 특별한 은유적 중요성을 갖는지 파악하는 정도의 시간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은유에 대하여

사이코드라마에서는 은유가 상당히 중요한데, 저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심상을 소개한다. 어린이는 자신들의 생각과 정서의 소용돌이를 어른의 논리적인 문장을 들어 설명하기 전까지는, 모순된 생각이나 행동을 여기지 않는다.16 이러한 특징을 디오니소스에 비유한 것이다. 어린이들의 상징체계는 놀이가 진행되는 가운데 떠오르는 상상에 맞추어, 은유와 상징을 표현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린이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부분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 같은 상징을 파악하는 방법의 장점은 정신분석적 접근보다 시간이 덜 드는데, 그 이유는 “은유는 우뇌의 기능을 상승시켜 목표 지점에 곧장 도달하게”17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사이코드라마는 디렉터가 주인공을 계속 상상의 영역으로 인도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도록 촉구하는 등, 우뇌 활동과 연관이 깊다. 아동들은 어른에 비해 은유와 환상에 개방적이어서 그것이 더 유효할 수도 있다.

은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융의 이론을 많은 부분 소개하고 있는데, 융을 인용한 부분에서 또다시 프로이트의 이론과 사이코드라마의 차별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작은 것보다 더 작지만, 큰 것보다도 더 크다”는 모티프는, 아동으로 하여금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기적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수단이 되어 아동의 무력감impotence을 낫게 해 준다.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영웅적 삶의 본질을 이루어 아주 힘든 운명까지도 관통한다. 아동은 이제 가장 큰 위험에도 대처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외상에 대하여)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리려는 행위는 더는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Ibid: 167) (책, 77.에서 재인용)

2부 – 아이들의 사례

안드레아의 경우 심인성 탈모증을 겪는 여자아이였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 친구 트루디에 대해서 서운함을 이야기 하였지만, 그가 현재 실제 삶에서 부모의 이혼이 가장 큰 문제임이 점차로 드러났다. 아이는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그 같은 상처들을 치유하였으며, 저자는 “심인성 질환을 앓는 아동의 경우, 먼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추는 것보다 현재 아동이 직면한 실제 삶에 초점을 맞추는 단기 치료가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밝힌 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18 이 같은 부분도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점으로 보인다. 먼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추고 원인을 분석하기만 하는 방법이 프로이트 적이라면, 현재 실제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융 적인 방법이고, 이같은 방법이 사이코드라마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많은 사례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제이미의 경우가 특별히 염두하며 읽을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제이미에 대해 서술하면서, 아동들의 진술이 법정에서 효력을 갖기 힘든 점이나 어른들을 위주로 한 법 체계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언급한다.19 법정에서 아이들이 위주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많이 마련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저자는 제이미와 제이미의 누나 켈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한 명의 치료사가 두 아이의 필요를 한꺼번에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0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의욕 앞선 심리치료사들이 염두해 두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제이미는 저자의 동료 치료사에게 소개됨으로써 저자의 곁을 떠났다. 저자는 변화의 대상인 개인과 사회는 “조화롭게 조율”되어야 한다며, 쿡의 언급을 인용하는데 인상 깊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이 진화의 과정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 일어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human beings”이기보다는 “human becomings”이다. 인간은 상호 연결된 존재의 거미줄 위에 놓여 있는 “되어 가는 존재”인 것이다. (Cooke 1996: 512) (책, 199-200. 재인용.)

3부 – 연계

저항다루기

이제 이러한 아동치료의 사례를 살펴본 후, 치료사가 치료 중에 부딪히는 저항에 대해서 언급한다. 아동의 저항은 치료 자체가 거부되는 경우로,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저항들을 유형화하여 설명한다. 첫 번째 유형은 사회복지시설을 너무 자주 옮겨지게 됨으로써 혼란을 겪었던 아동의 유형이다. 두 번째 유형은 손인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아동이 나타내는 저항의 경우이다. 세 번재 유형 또한, 손 인형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경우에 드러나는 아동들의 저항이다. 이는 저자가 아동치료에서 인형을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로 보인다. 손인형을 이용한 치료가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기 위한 다른 수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21

이러한 저항에 대해서도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아동에 대한 존중이 또 한번 강조된다. 아동의 방어 기제 또한 존중되어야 하며,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22

사이코드라마와 아동 치료

이어서 기존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이코드라마와 아동의 치료에 이용되는 사이코드라마의 차이점을 서술하고,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사이코드라마를 시행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서술한다.

아동의 경우 고전적인 사이코드라마에서처럼, 그룹단위로 모여 다른 사람을 보조자아로 사용하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저자의 경우 인형을 이용한 아동 사이코드라마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공격적이고 충격적인 기법을 사용할 경우 어른들의 경우 그를 감당해 내어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아동들의 경우 사소하고 직접적인 지적에도 망연자실 하는 경우가 있어 공격attacking 이나 충격shocking 기법은 적절하지 않다.

계속되는 연구

저자는 마지막으로, 모든 연구가 아이들로부터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사이코드라마 치료사들은 워크샵에서 많은 훈련을 받지만, 대게는 관찰자가 되곤 하는 점을 지적한다. 치료자의 목표는 아동의 치유가 아니라 아이의 놀이 자체가 목표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모든 통찰은 아이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아이의 치유는 아이 스스로 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체적 감상

나는 평소에 ‘객관성’이라는 것을 불신하고 살아왔다. 이성을 신봉하여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하는 학문들은 불변하는 영원성을 갖는 동시에, 역동하는 인간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머나먼 진리들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인간 바깥에 있는 객관적 진리들이 되어 버렸다. 합리주의가 결국에는 형이상학적 교조주의로 빠지고, 경험주의가 소통할 수 없는 관념론으로 빠져버리는 것은, 우리의 바깥에 있는 불변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지는 않을까?

인간은 너무 인간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여부가 아니라,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나의 내면이다. 우리 바깥에 있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이상과 당위)이 우리를 움직이는 정작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프로이트적인것과 융적인 것의 대립은 우리 내면을 대상으로 다루는 학문 중에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내면을 다루지만 그것이 발생한 객관적 기원을 따지므로 현재와는 상관없을 수도 있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융은 현재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재의 주관(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는)을 직접적으로 해결한다.

비록 이 한 권의 책으로 심리학에서 이루어지는 이론적 논의들을 모두 접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심리학 분야에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될 부분은 프로이트적인것 보다는 융적이고 모레노적인 것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같은 학파적·이론적 논의보다 앞서야 할 것은, 무엇보다 치료 대상자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치료자에 대한 존중과 치료를 위해서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개방된 태도 등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이 모든 탐구활동의 원동력이며 지혜의 원천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1. 책, 12. [본문으로]
  2. …게다가, 분석가는 매번 욕구와 죽음, 그리고 법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야 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현장에 서게 된다. (Mannoni 1967: 14). (책, 60.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책, 28. [본문으로]
  4. 이 책은 “도구 세트kits and packages”나 즉흥적으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그런 공식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이코드라마의 배후에 있는 철학적인 이해를 뒤로 한 채, 기술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책을 훑어 내려간다면,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일전에 한 치료사가 내게, “저는 꼭 필요한 요점만을 빨리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불필요한 사족에 얽매이지 않고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지요.”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참 좋은 말이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필요한 요점만 집어낼 수 있다니…. 하지만 그런 치료에는 앞을 내다보는 비전이 없다. 이런 식의 치료는 처음부터 끝까지 통찰력이 결여된 채 진행되다가 끝나고 만다. 치료의 본질과 동떨어진 그런 “기법”은 사실상 죽은 것이다. (책, 29. 인용.) [본문으로]
  5. 켈리의 경우 각 개개인의 ‘핵심적 구성 개념core construct’가 위협받게 되면 방어 기제defence mechanism이 작용하기 때문에 더 이상 치료사가 아이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말하였고, 모레노의 경우 확실하지 않은 세부사항에 대해서 치료사가 언제라도 주인공에게 확인해 볼 것을 당부한다. (책, 30-31. 참고.) [본문으로]
  6. 말로 표현한 생각의 이면에 아직 표현되지 않은 감정, 몸동작, 또는 강한 움직임을 표출하게 한다. (책, 33. 인용.) [본문으로]
  7. 책, 34. [본문으로]
  8. 책에서는 Freud, 1905: 94. 와 Fragan and Shepherd, 1970: x. 를 인용하여 보여준다. [본문으로]
  9. 책, 47. [본문으로]
  10. 가족의 구조와 가치관들이 아동에게 접근하는 치료사의 방법과 큰 차이를 보여 치료의 첫걸음조차 내딛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어떤 때는 치료가 명백히 진전을 보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치료를 끝내기로 결정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의 바람과 치료사의 목표가 서로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 58. 인용.) [본문으로]
  11. 책, 60-61. [본문으로]
  12. 저자의 경우에는 해변을 산책함으로써 자신을 환기한다. (책, 62. 참고.) [본문으로]
  13. 책, 64. [본문으로]
  14. 저자는 아이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첫 회기에서는 치료자를 편안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15. 아이의 눈은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힘든 삶에 특별히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희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책, 65. 인용) [본문으로]
  16. 책, 70. [본문으로]
  17. Mills and Crowley 1986: 17-8 (책, 7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8. 책, 112. [본문으로]
  19. 여태까지 사회는 어른을 감싸고 피해자인 아이만을 탓해왔다. 아이들은 교활하고 악하고 거짓말을 만들어서 결백한 부모를 공격한다는 구시대의 이론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책, 191. 재인용.) [본문으로]
  20. 책, 198. [본문으로]
  21. 치료사는 앞 장에서 언급한 방법들을 두루 사용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접근 방법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책, 221. 인용) [본문으로]
  22. 1. 아동의 방어 기제를 존중하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라. 필요한 경우 부드럽게 반응을 요구하고, 어떤 경우에라도 강요하는 것은 금물이다. 2. 아동이 겪는 어려움의 핵심이 무엇인지 세심히 관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정확한 가설을 세우도록 하라. 3. 세심한 정확성을 가지고 아동에게 가정 적절한 치료 방법과 도구를 찾아라. (책, 231. 인용) [본문으로]

수강신청과 소비

토요일, 9월 27th, 2008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것을 유지하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의를 갖는다. 가령, 값싼 대형슈퍼마켓 대신에 동네슈퍼를 이용하는 것은 단순한 소비의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고, 헐리우드 영화 대신에 독립영화를 돈 주고 본다는 것은 독립영화가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물질적 기여를 한다는 의미이다. 조중동 대신에 경향신문를 읽고 인터넷 신문을 후원하는 것 또한 단순한 선택의 의미를 넘어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번 유영익 교수의 사태에 대해서, 순수학문과 학문의 자유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소비의 정치적 의의를 간과한다. 우리가 유영익 교수의 수업을 ‘수강신청’한다는 것은 어떤 정치적 의의를 갖는가? 대학이라는 곳은 ‘학문의 자유’를 방관하는 수동적 의미가 아니라, 이미 보장된 학문의 자유 속에서 어떤 독자적 이념적 학문을 조장하는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학문이 유지, 존속, 발전할 수 있는 인적-물적 토대를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곳이 대학이다.

이러한 대학의 한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대학이 어떤 학문에 대해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대학 구성원으로써 지극히 당연한 주인의식의 발로이다. 우리중에 그 누구도 유영익 교수의 연구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공동체가 유영익 교수에게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에 반대할 뿐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권리이다.


누가 역사학 이야기 하쟀냐?

금요일, 9월 26th, 2008

1. 좀 쌩뚱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과학 이야기 좀 하자. 많은 분과학문들이 있겠지만, 그 많은 분과학문들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학문’으로 여겨지는 것이 ‘과학’ 이니까. 그런데 그 ‘과학’ 중에서도 ‘핵 기술’이라는 것 가지고 한번 이야기 해보자.

2. ‘핵 기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과학하시는 분들이 기술적 측면에서 더 잘 알테지만, 우리는 일단 북한이 ‘핵 개발’하고 ‘핵 실험’ 한다고 하면,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입장중의 하나로 ‘반핵주의자’들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저 과학적 원리로 아주 큰 에너지를 내는 하나의 순수한 학문적 성과일 뿐인데, 온갖 정치색 입혀서 ‘핵 개발’ 반대하고, 졸라 궁극적으로는 ‘핵 협상’까지 한다. 졸라 순수한 과학기술일 뿐인데, 왜 미국이 맨날 북한한테 쩔쩔 매면서 돈주고, 우리나라는 쌀퍼주고, 협박도 하고, 으르고, 그러는걸까?

내 생각에는, 유영익 교수가 ‘탈 정치적’이고, ‘정치적 논란’을 하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학문의 순수성 운운하시는 TA 분들은 아마도, 이런거 이해 못할거 같다. 그러니까 너무나도 순수하시게 유영익 교수 밑에서 배운 ‘순수한 역사학’ 운운하고 조낸 아는척 하는거다.

그러니까, 아무리 순수한 학문적 성과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쓰이지 않을 때, 그 순수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물어보아야 하며, 그 순수한 학문적 성과가 인간에 의해 ‘올바르지 않게’ 계속 쓰이고 있다면, 그 순수한 학문적 성과는 폐기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순전히 사람을 죽이는 곳에만 쓰이고 인류를 자멸시킬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은 ‘핵 무기’처럼, 또는 아주 순수한 ‘핵 무기’를 ‘전쟁’과 같은 정치적인 행위에 사용하고 있는 위정자들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핵’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을 한번 상기시키자면, 학문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3. 학문과 정치? 그것의 관계에 대해서는 졸라 논의가 분분하니 이야기 좀 적당히 하자. 언제나 근본적인 질문은 대답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유영익 교수의 그 ‘순수한 학문적 성과’가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좀 지적으로 성실하셨으면 한다. 적어도, 유영익 교수에게 ‘정치색’을 입히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유영익 교수의 ‘역사학’에 대해서는 조금 지적으로 불성실할지는 몰라도, 지금 우리 시대에 대해서까지 지적으로 불성실하리라는 생각은 접어두시길 바란다. 물론 초주관적 견해이지만, 적어도 ‘유영익’ 교수에 대해 정치적 논란을 하시는 분들의 고민의 무게는, 오피스에 처박혀 ‘한 사람’이 ‘주는’ 논문만 쳐읽고 있는 니놈보다는 무거울거 같으니까.

4. 유영익 교수 스스로는 정치와 연관이 없고자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영익 교수의 학문이 이렇게 대중화(교과서화) 되는 것은 전혀 정치와 연관이 없을까? 우리는 현재 이미 기독교가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뉴라이트’라는 정치적 운동에 ‘한기총’은 절대적 지지를 보이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또 다시 ‘장로’ 대통령의 당선이라며 축하되어 지고 있다. 이쯤에서 이미 신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또 어디에선가, 이명박 대통령의 대통령직 당선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소리가 마치 악령의 속삭임처럼, 또 다시 보는 하나의 악몽처럼, 스믈스믈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뉴라이트는 ‘좌빨’들의 ‘민족주의’ 사관에 태클을 걸기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 ‘교과서 포럼’은 만들어졌고, 그들의 코드에 맞는 몇몇 역사학자들을 그들의 감수로 세웠다. 그 중 한명이 유영익 교수인 것이다. 특히나, 유영익 교수는 ‘장로 대통령’ 중의 원빠따인 ‘국부’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학자 중의 한명이기도 하니,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학자’인가??

세태가 이렇다 보니, 바보같은 TA는 지금껏 논의된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못한 체, 마치 똥으로 글을 읽은 마냥, 이승만의 편지 한통을 운운한다. 또 어떤 학우는 이 편지를 보고, 이승만의 시대를 앞서간 이상에 대해 공감하고 감탄한다. 정말 학문이 ‘정치’와 관련없이 평가되어야 한다면, 또 신앙이 정치와 관련이 없어야 한다면, 또 학문과 신앙이 관련이 없어야 한다면, 정치인 이승만에 대해서 그의 정치적 행위와 행적에 대해서만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촛점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기독교인’ ‘장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평가되고 있다. 유영익 교수가 수업시간에 보여주었다는 ‘이승만의 편지’는 순전히 학문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신앙적이지도 않다. 이 자료는 유영익 교수가 기독교인이라는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인 코드에 맞는 자료이기 때문에 그에게 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5. 유영익 교수가 ‘순전히 학문적’ 이기를 원하는가? 나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유영익 교수를 ‘정치적 논란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유영익 교수의 역사학에 반대하는 이들이 아니라, 유영익 교수의 역사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뉴라이트’세력이다. 우리는 ‘뉴라이트’ 세력에 반대하기 위해서, 유영익 교수의 역사학 또한 함께 반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유영익 교수가 ‘순전히 학문적’인 인물로 남기를 바란다면, 유영익 교수의 역사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뉴라이트’ 세력에 대해서도, 우리를 향한 공격과 똑같은 강도의 공격을 해야만 할 것이다. 역사는 과연 ‘탈 정치적’인가? 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법안이 발의되고는 할까? ‘역사’는 과연 정말로, 순수한 ‘학문’의 영역일까? 아니, 순수한 과학 마저도… 과연 그것이 순수한 것일까??

6. 평소에 잘 보지도 않는 신문을 검색해본다. 과연, 한 언론에서도 역사학의 논쟁을 ‘이념논쟁’이라고 명명하였다. 본질을 정확히 짚은 진단이다. 유영익 교수의 수업 자체를 듣기 이전에, 우리가 터잡고 있는 한국사회의 맥락이 무엇이며,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보다 명확하게 아는게 ‘지적 성실함’의 첫단계이다. 모든 학문은 그 ‘현재성’ 이 상실되었을때 더이상의 의의는 없기 때문이다.


아 쒸벨

월요일, 9월 22nd, 2008

1. 어떤 교수는 강압적 방법으로 학생의 사과를 받아내기가 일쑤고 2. 학우들 사이에서는 ‘학생과’불려갈까 무서워 이야기 못하겠다는 소리가 농담처럼 튀어나오고 3. 어떤 쒸벨교수는 뉴라이트 역사학자 초빙해서 강의까지 열리게 만들고 4. 뉴라이트 역사학자의 강의에 우려를 표명한 신문사 기자는 여러 교수들에게 불려다녀야 했었고(다른 기사로… 피드백차 이야기가 오간것으로 확인됨.) 5. 뉴라이트 역사학자의 강의에 우려를 표명한 한 학회의 대자보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를 초빙한 그 교수에 의해 갈갈이 찢겨졌고 6. 뉴라이트 역사학자의 강의에 우려를 표명한 한 학회의 대자보는 뉴라이트 역사학자를 초빙한 그 교수를 추종하는 한 학우에 의해 또 한번 때어지고 7. 뉴라이트 역사학자의 강의에 우려를 표명한 총학생회의 사무실에 뉴라이트 역사학자를 초빙한 그 교수가 들이닥치고…

이상… 사실확인 되지는 않은 졸래 신뢰도 높은 이야기들… (휴… 별로 놀랍지도 않다 ㅡㅡ)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닌거 같은데…

금요일, 9월 19th, 2008

까놓고 말해 ‘편향’되지 않은게 어딨어. 모든 책이라는게 저자의 주관이 담긴 편향된 책이지. 그러면 모든 책들은 그 ‘편향성’ 때문에 교재로 채택되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우리가 떠받드는 ‘고전’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구…

‘실증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온갖 ‘주관적’ 가치판단과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역사학’의 특성에 대해서 운운하는 것은 차지로 하더라도, 지금 그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사관’ 또한 ‘편향성’이 있는 것이지 않나?? 그래서 ‘뉴라이트’ 아저씨들이 그걸 문제시 하는 것이고…

솔직히 ‘뉴라이트’의 저작을 쓰는 수업을 내 또 하나 알고 있지,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무슨 ‘금서’인들 못읽을게 뭐있어?? 그런 정신이 있으니까 우리내 국방부는 ‘읽어서는 안될 책’ 따위를 선정하고 있는것은 아니냐는 말이지… 좌파는 좌파 책만 읽고, 우파는 우파 책만 읽으라는 법이 어딨어?? 그딴 옹졸함이 소통없는 폐쇄사회를 만드는 것이리라고…

좀 더 솔직해 지자구, 다 알잖아?? 이거 이념논쟁인거. 졸라 지리하고 지루한 이 논쟁에 뛰어드는 그대들에게 박수를…

근데 나는 총학이 진짜 열받는데… 쟤들 뭥미?? 밥상 차려놓으니 숫가락 놓는 격?? 아니면 언제나처럼 뒷북??


명준에게 여성의 의미?

수요일, 9월 17th, 2008

또 다시 [[광장]]… [[광장]]을 이야기 할때, 명준의 여성관에 대해서 간혹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명준의 여성관은 남성적 시각이며 폭력적이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번에도 또 한 여학우의 질문. "명준에게 여성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자? 도피처? 도구?" 이 질문은 세가지 답을 예정해 놓고 그 중 딱 하나만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질문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명준은 여성을 도구로 이용한 거에요." 그들이 말하는 ‘도구’ 앞에는 ‘성적(性的)’이라는 말이 아주 미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따지고 보면, 구원자-도피처-도구는 딱 하나로 나누어져서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자의 의미-도피처의 의미-도구의 의미는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나는 질문을 던진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럼 예수가 도구는 아닙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요!!!" 구원자-도피처-도구는 땔레야 땔 수 없다. 류 교수는 이를 삼위일체에 비유한다.

현재의 사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이미지로 형성되어 있다. 여성들은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페미니즘적 피해의식을 학습한다. 그리고 의식있는 여성이라면 당연 ‘페미니스트’적이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사랑의 상을 대어보라면 이야기 하지는 못한다.

피해의식만 이야기 하는 얼치기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사랑에서 ‘몸’ 을 빼앗아 갔다. 여성들은 여성 스스로를 타자화 시켰다. 그들은 참으로 쿨하게 이렇게 말한다. "몸이 중요한가요?" ‘몸’이 중요하지 않다면, ‘몸’을 주건 안주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들은 심층에 학습된 피해의식, 성에 대한 혐오로 철저하게 반(反)육체적이다.

"육체적’사랑’은 저급한거에요. 가능하기나 한건가요??" … 아서라 아해야. 神마저도 육화되셨는데, 하물며 사랑이야…

나는 오늘도 페미니즘적 ‘순결주의’, ‘처녀막 주의’를 발견한다.


최인훈, [[광장]]

화요일, 9월 16th, 2008

"더구나 이미 더 이어질 길이 막혀 버린 지난 일이고 보면, 피고가 유리한 쪽으로 풀이하는 것이 어느 편을 위해서나 좋을 일이다. 그녀와 만나고 헤어지면 으레 사로잡히게 되던, 죄지었다는 느낌. 어찌 보면 그것은 커다란 오만이 아니었을까. 어떤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이긴 사람의 느낌이다. 과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 만큼이나 해칠 수 있을까. 남의 앞길을 끝판으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이 죄악감이라면, 그는 하느님의 자리를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사람의 팔자를 망치지 못한다. 다만 자기의 앞길을 망칠 뿐이다. 어떤 뜻에서건 나와의 사귐은, 윤애에게 한 가지 겪음이었을 거다. 그 겪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얕보는 일이다." 최인훈, [[광장]]


다시 ‘내 사랑 한동’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화요일, 9월 9th, 2008

오랜만에 횡수에 들어왔더니 ‘내 사랑 한동’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왔었네요. 그래도 좋은 의견들을 펼쳐주시는 선배님들이 남아있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1. 논의 양상에 대해.

저도 사실은 ‘내 사랑 한동’을 다시 언급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와서 ‘내 사랑 한동’을 언급하는 것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내 사랑 한동’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현실도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인간이 취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천국’만을 말하는 내세지향적 종교처럼 아주 먼 미래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경우고, 또 다른 반쪽은 아주 먼 과거의 것들(이상향이나 추억?)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방향은 다르지만 현실을 도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부정적인 면을 지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고, 과거 선배들의 문건인 ‘내 사랑 한동’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 ‘불온문건’을 읽는다는 짜릿함과 이것을 언급함으로써 얻게 되는 어떤 ‘자아상’을 즐기는 측면으로 이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것입니다(정신적 자위행위는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로써 인트라넷에서 과거의 인물들이나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 했던 모든 논의들은 대게 "과거에 별스럽게 시끄러웠던 인물이 있었다."정도의 수준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시끄러웠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았었습니다. 더 나아가,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할때 이 같은 ‘과거’에 대한 논의들의 한계는, ‘과거’ 사실에서 의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한계로 보입니다.

이 같은 한계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내 사랑 한동’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내 사랑 한동’을 언급하시는 학우분께서는 그것이 다시 읽혀져야만 하는 의의를 다른 분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내 사랑 한동’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역사’의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제가 볼때는 오히려 이들은 ‘역사’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전설’로 이야기 되어야 할것이며, 여기서 또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로써의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된 외적인 힘들에 대해서도 고민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과거의 일이 현재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큰 개념으로 ‘역사’를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하기는 쉬워도, 과거의 특정 사건이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이라는 주장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과거의 일들이 ‘역사’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려져 학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면, 이야말로 학습 근거에 대한 설명은 결여된체, 반계몽 적으로 주입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을 읽는 학우님들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염두하고 대하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최근에 이루어진 논의에서 불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과거의 한동은 과거의 한동이고 현재의 한동은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내 사랑 한동’은 다시 읽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내 사랑 한동’은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 의의를 설명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2. ‘내 사랑 한동’에 대한 평

저는 결론적으로 ‘내 사랑 한동’이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과 동일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주 유효한 문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한동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것 외에도, 언급된 한동의 민주성, 교수임용, 신앙교육의 문제, 교육문제, 연구대학이나 교육형대학이냐의 문제, 등은 최근에도 문제시되는 사안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이 같은 문제들은 아직도 같은 내용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이들이 우리보다 먼저 이 주제들에 대해서 고민한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 한동’은 ‘홀리’하고 ‘착한’ 학우들을 결국에는 이 땅의 부조리에 대해 입 밖으로 토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당시 현실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한동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은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시끄러웠던 학생’으로 밖에 평가되지 않는 ‘나단’도 있었지만, ‘내 사랑 한동’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봐야 할 점은 그 문건을 작성한 학우들이 교내 ‘주류’문화의 대표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이들이 결국에는 ‘사과’를 하고 끝나버렸다며, 이 문건의 의의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한 다른 외적인 요인을 무시한 평가입니다. 그들이 그 ‘압력’에 굴복했다고 해서, 그들 목소리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굴복시킨 외적인 힘은 그들의 주장을 ‘실증’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인식을 가졌던 과거의 한동과 현재의 한동은 과연 다를까요? 지금 아주 가까운 실례로 ‘식대 인상’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은 ‘식대 인상’에 대해서 아무런 투명한 자료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학생식당 운영을 통해 이윤을 남겼다는 발표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총학생회는 단지 한번의 반대의사를 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교수의 역정내는 전화를 받았다고 하네요. 이같은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총학생회도 포기해 버렸는지 이제는 입을 다물어 버렸네요. 한 학우는 인트라넷에 댓글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학생과에 호출을 받았답니다. 어떤 한 학우는 호출될 것이 두려워 공개적으로는 말 하지 못하겠다며, 자신이 개인적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저에게 쪽지로 보내줍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아직도 ‘내 사랑 한동’이 현재 지금의 한동에 유의미한 이유입니다.


내 사랑 한동

월요일, 9월 8th, 2008

또다시 [[내사랑 한동]]에 대한 언급이 인트라넷 횡수에 올라왔다. 내사랑 한동은, ‘홀리’하고 ‘착한’ 학우들을 결국에는 이 땅의 부조리에 대해 입 밖으로 토로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현실의 결과물이다. 이 문건은, 사유에 능한 철학자가 쓴 문건도 아니오. 불평불만쟁이 학우가 배설용으로 쓴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주목해서 바라봐야 할 것은, 이 문건을 쓴 저자들이 교내 ‘주류’문화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과거의 것들만이 언급되는 것에 아쉬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동’의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 한 체, 한국사회의 정치를 논하고, 저 먼 나라의 자연재해에 대해서 논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부정의, 불투명성, 비민주성을 지적하기는 쉬워 하면서 한동의 그것에 대해 입을 다무는 태도를 우리는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이같은 태도는 사람이 정작 눈앞에 있으면 아무말도 못하면서 뒤에서 호박씨 까는 비겁한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를바 하나 없다.

내사랑 한동 읽기도 결국에는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은 ‘현재’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들은 한때 교내에서 시끄러웠던 말썽쟁이 아이들로 치부될 뿐이다.


치마

수요일, 9월 3rd, 2008

요즈음 나는, "점점 높아진 학교 도서관 만큼이나, 여학우들의 치마라인도 점점 높아지고있어!! 과연 세상은 진보한다!!"고 농담처럼 내뱉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신입생 시절 예비역 형님들은 별로 짧지도 않은 치마를 보며 치마가 짧아졌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 기준으로는 아무리 쳐다봐도 짧지가 않은 치마였는데, 어쨌든 ‘치마’를 주제로 ‘환장’ 하는 예비역 형님들을 보면서, 나로써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짧은치마’를 ‘소환’해 내는 그들의 능력이 신기하기 까지 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고, 치마를 주제로 능글대며 농을 던질 줄도 아는 ‘까진’ 남자가 되었다. 이즈음 되고 보면, "요즘 젊은 것들은 치마가 너무 짧아!"라고 큰소리 치며 ‘환장’ 하시는 노친네들을 보면서, 그들의 ‘짧은치마’ ‘소환’능력을 한번쯔음은 경탄의 눈으로 바라봐도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