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10월, 2008

염세적 비관과 부정직한 낙관 사이에서…

목요일, 10월 30th, 2008

여러 사람들에게 익숙한 노신이 했다는 말 한번 인용해보자.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없는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는 희망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염세적 냉소와 부정직한 낙관 사이에서, 희망의 있고 없음에 대해서 말하는것 자체가 과거로 남을 자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선배들이 위기를 말했으나 우리는 지금 여기 살아 있고, 수많은 선배들이 희망을 말했으나 우리는 여기 고통하고 있다. 결국 그 길을 걷고, 안걷고는 후배들이 알아 할 일이다. 선배된 자는 성급하게 희망을 말하거나,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선배된 우리는 그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 냉소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그대의 문제인식에는 십분 동의하나, 부정직한 낙관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또한 반성해야 하지만, 낙관으로 우리의 잘못 또한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정직하자.


좌파가 주식투자를 해도 좋은가 – 이정환닷컴

목요일, 10월 30th, 2008

이정환, [좌파가 주식투자를 해도 좋은가], 이정환닷컴 글 링크, 인권오름 글 링크


우리를 옥죄는 금제적 감정에 대하여

금요일, 10월 24th, 2008

자료 보고 싶어요

학기초에 식비 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총학생회 사무실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제가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는 지난 학기 평의회에서 다뤄진 수준의 PPT 몇 장 밖에 제시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학기 평의회 의논중에도 자료의 불충분함이 지적되었었는데, 그 수준의 자료를 가지고 몇달을 끌어 방학중에 식비인상이 되었다는 것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같이 총학생회에 방문했던 학우와, 저는 당연히 불만을 표하였고, 회계자료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총학생회의 하소연 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측에서 자료를 주지 않습니다."

총학생회 학생복지부국장의 하소연에 따르면, 총학생회에서는 식비인상에 관한 협의에 굉장한 노력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총학생회측에서는 최대한 자료에 근거한 협의를 진행하려고 노력하였고, 학교측이 알게 모르게 입수한 자료를 기반으로 인상 요인들을 조목조목 따지니, 학교 당국은 놀라는 눈치였고, 그 이후에는 자료 공개를 꺼리더라는 것입니다. 식당운영위원회에서 회계자료를 놓고 이야기를 하기는 했었으나, 회계자료에 수정할 것이 있다는 이유로 가져가 버렸고, 총학생회는 더는 회계자료를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총학생회는 지속적으로 학교당국에 공문만 계속 보내고 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10월 초에 식당운영위원회가 열리는데, 그곳에서 회계를 요구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저희는 그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였습니다.

약속했던 회계공개는 없는데…

이제 10월 말입니다. 총학생회에서 약속했던, 회계공개는 없고, "[총학생회]학생식당 공개질의"라는 글만 게시판에 뎅그라니 올라와 있네요. 뭐, 언제나 처럼, 학생대표로써 학생의 입장을 이야기 하는 부분은 없고, 학교당국의 입장만을 내보이는 기회가 되었네요. 그 부분에 대한 조목조목 비판은 여러분들께서도 많이 하고 계시니 중언부언 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학생들의 대변자인 총학생회가 결국 학우들의 입장에 대해서 대변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고, 학교 당국의 변명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학우들의 권익 침해 – 아무것도 안하는 총학생회

총학생회가 학교당국에 언제나 타협적 입장을 취해왔던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지금 행정당국의 처사는 도를 지나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비단 식당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학우들의 기본적 의사표현을 제재하는 인권적 문제로 까지 연결되고 있습니다.

학생처장은 현재 학생식당에 대해서 인트라넷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학생처장실로 학우 하나하나를 호출해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각개격파를 하고 계시네요. 이같은 일이 횡설수설에서도 계속적으로 보고되고 있고, 이러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나돈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대표라는 총학생회는 이에 대한 아무런 대처를 하고 있지 않네요.

건의는 총학생회로 교육은 개개인에게로…

학교당국이 개개인의 학생들의 의사를 모두 듣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학우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의사 표명을 할 때, 학교 당국은 절차를 이야기하고 학생대표들을 거치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왜 이번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의사 표명을 하지 않고, 개개인을 호출해서 "각개격파" 하는 걸까요?? 불만있는 몇몇 학생만 조지면, 학교가 평온하리라는 착각을 하고 계신 건가요??

학생들이 학생식당 관련한 건의를 총학생회에 절차를 지켜 공개적으로 해야만 한다면, ‘교육’ 도 절차를 지켜 공개적으로 해주세요. 습하고 음침한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 하는거, 옛날에 많이 보던 방법 아닌가요?? 뭐가 그렇게 구려서 하나하나 부르고 계시는지 참…

우리는 이쯔음 되면 눈치를 까야 되요. 학교측에서 귀찮은건 총학생회쪽으로 건의하라고 담당을 넘겨 버리고, 학우들은 만만한 총학생회 조낸 두들겨 팰 거고, 학교 당국은 총학생회 말 안들어 주면 끝난다는 것을요. 그리고 몇몇 불순분자들만 조용히 불러서 해결보는… 이건 굉장히 오랜시간 관찰되어 온 ‘현상’ 아닌가요??

고객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세요

맘은, 여학우들이 밥을 많이 퍼면 이런 말을 하고 있답니다. "얘, 너 그렇게 많이 먹어서야 살은 빼겠니?" 우리 팀의 한 여학우는 밥이 나오기 전에 반찬을 펐다는 이유로 "교양 없게…"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네요.

저는 밥 먹으면서 그런 취급 받아본 곳, 학교밖에 없어요. 부페식은 당연히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만큼 자유롭게 먹기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가는 곳 아닌가요?? 명색이 부페식인데 "양심" 운운하며 교육적 의미 부여하시니, 고매한 "양심"이라는 단어가, 정당한 소비자 권리를 억압하기 위한 헤게모니따위로 추락하는 모습이 참 보기 고까워요. 제가 좀 민감한건지 모르겠는데, 트웰브 바스켓 아주머니들도 밥 많이 퍼가는 학우보고 그러세요. "밥이 산이네~." 그런 말이 왜 필요한건가요??

제가 생각할때, 학생식당 직원분들 친절교육이 절실히 필요한거 같아요. 특히 맘이요. 오죽하면 계모라는 별명이 붙겠어요. 솔직히, 밥값 비싸고 질 더러운건 돈드는 문제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눈치 안보고 밥좀 편하게 먹게 해주세요. 그건 돈드는거 아니잖아요.

총학생회가 유용하긴 한가요??

총학생회를 열렬하게 비판하려면, 총학생회가 할 수 있는데 못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죠. 그런데, 저는 그런 전제가 굉장히 회의적으로 다가옵니다. 총학생회가 공문을 보내고 협의체 위에서 이야기를 해도 학교당국은 들어주질 않거든요. 총학생회가 학생처장님보고 "님하 자제효~." 한다고 해서 학생처장님이 그걸 들으실 것 같지도 않고 말이에요.

이즈음 되면, 총학생회라는 단체가 과연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사실 총학생회 단순노동 부분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생 쓰고, 축제 같은 것도 외주 주고 하는데, 그런건 그냥 경제논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학우들 복지의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침묵하고 있는 총학생회가 어디 믿을만한 학생대표가 될수나 있나요??

아… 그냥 총학생회 없애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도 하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학우분들, 저는 요즘 생각하는건데요. 펜은 칼보다 강하지 않아요. 그 펜이 칼을 소환해 낼 수 있을때에만,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습니다. 누가 옆에서 어퍼컷 날리는데 주둥이로 막을 수는 없는거 아니겠어요? (이빨 다 날라가요.) 공문 보내고 말로 하고, 아삼에서 키보드 두들겨도 변하는거 하나도 없거든요. 총학생회도 우리 모두도 빨리 자각하시어 공문보내는거 즉각 중단하시고, 좀 다른 방안으로 모색해 보심이 어떠하실런지??


혹시 학생처장님이 이글을 보신다면…

  • ps. 학생처장님은 맘스키친만 모니터링 하지 마시고, 건강하고 규칙적인 식사생활을 위해 75식 의무식 카드를 구매하신 후, 학우들과 함께 한달에 75식의 학생식당을 함께 드셨으면 좋겠어요. 학교에서 ‘집밥’ (맘의 표현을 빌리자면…)’1인 정량’ 이상으로 과다하게 드시면서, 학생식당이 그렇게 먹기 싫냐고 학우들에게 말씀하시면 듣는 입장에서는 매우 마음이 상해요.
  • ps 2. 학생처장님, 저는 부르면 안갈꺼니까 부르지 마세요. 저 학기 마무리 잘 해야죠.
  • ps 3. 프린트 하셔서 두고두고 읽으시면, 마음만 상하실테니… 처장님의 건강을 생각하셔서라도… 그러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그리고 마지막 짤방

어제 핑크 플로이드의 벽(Pink Floyd The Wall , 1982)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배우가 대사를 치는 영화는 아니고, 계속 영상물과 핑크플로이드의 노래만 나오는 영화인데요. 개인적으로 82년작이라고는 해도, 에니메이션 처리 등등 보기 깔끔하고 좋은것 같아요. 요즈음 학교당국이 학생들한테 하는 행동이랑 부합하는것 같아서 그 영화에 나오는 부분을 붙여봅니다.

We don’t need no education 처장님 젭라


이영훈 교수를 옹호한다.

목요일, 10월 23rd, 2008

http://yhhan.tistory.com/entry/이영훈-교수를-옹호한다

친일파 검색하다가 한윤형 블로그에서 괜찮은 글을 발견했다. 몇 줄 추려 적어두기.

그가 언급한 자발적인 참여의 예는 팸프, 그러니까 포주인 셈이다. 권력의 작동은 통치기관 하나의 작용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고 당연히 그에 참여하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존재한다. 이영훈 교수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의견은 친일파청산 문제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논의지형을 바꿔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전쟁중 성노예 문제만큼 인륜에 어긋나고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범죄에 한국인 포주가 개입했고 일본군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공범 역할을 했다면, 이들에 대한 처벌은 일본군이나 일본경찰의 일정한 직급에 종사한 이들보다 훨씬 정당한 일일 것이다.

이영훈 교수 발언의 핵심은 정신대 문제가 해방 이후 한국의 여러 성매매 문제의 뿌리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의할만한 주장이다. 사실 과거청산을 운위하는 이유는 그 과거가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구속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제의 전쟁 성노예 문제는 그것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화와 인과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적어도 이영훈 교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한국인 포주뿐 아니라, 학도병으로 참가해 위안소를 이용한 이들의 자발적인 반성과 고백을 통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는 실제로 시행되어 온 일이고, 이것이 친일파진상규명법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친일파진상규명법 시행 이후에도 진정한 과거청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친일파진상규명법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이영훈 교수의 논변의 합리적 핵심을 취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친일파진상규명법은 일제시대의 범죄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일 뿐이라는 합의를 통해 당신이 말씀하신 면죄부 효과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 최소한의 것을 시행하면서 학문적 연구와 자발적 반성과 고백을 이끌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대다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말은 물타기다. 따라서 당신은 수구세력이다" 그런 생각으로 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리 수구세력으로 몰아붙인다면, 법안을 통해 예상되는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너무나 위험한 일 아닌가.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라는 말에서 곧바로 자발적인 매춘여성을 떠올려 버리고 공분하는 것은, ‘순결한 희생자’ 상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화에 대한 윤리적인 비난을 피하면서, 아니면 적어도 성매매 문화와 일본제국주의를 연결짓지 않고 일본제국주의만 단죄하고픈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영훈 교수가 이 소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은 한국 남성 사회에 보편화된 성매매 문화와 연결되어 버렸다.

종군위안부 피해자가 강제로 잡혀갔음을 강조하고 그들을 매춘여성과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것은 일본군의 전쟁 성노예 문제를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데에는 효력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매춘부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키고 ‘자발적 성매매’라는 환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후자에 대해선 아무도 입도 벙긋 하지 못한다. 벙긋했다가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질타를 받거나, 그분들의 감정을 대리하는 이들에게 질타를 당할 것이다. 사과하러온 이영훈 교수에게 한 종군위안부 피해자는 "어떻게 우리를 동두천 여성과 비교한단 말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닌데 왜 학살했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는 민간인 학살 생존자의 말만큼이나 비극이다. 한 범죄의 피해자가 다른 범죄의 피해자를 경멸하는 것이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사태를 판별한다면, 여러 종류의 기준에서 볼 때 생겨나는 여러 부류의 피해자를 고루고루 고려하는 것이 우리의 윤리적 의무다. 민족에 의해 신비화되고 깊숙이 감춰진 피해자를 자기 필요에 따라 호출해내며 다른 이의 견해를 억압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이영훈 교수의 주장 중 일부는 지식의 정치성을 고려해 볼 때 순진한 것이다. 안병욱 교수의 주장처럼, 서울대 김민수 교수처럼 친일 문제를 단지 언급만 하고도 쫓겨난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학계는 친일 문제에 대해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학계 스스로 친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견해는 천진난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인이 지식의 정치성에 밝아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지식인에게도 전공분야가 있고, 모든 지식인이 본격적인 사회참여 지식인은 아니지 않은가. 주로 연구에 종사하면서도 자신의 전공분야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간혹 견해를 피력하는 지식인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인 역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학적 논쟁이 주책없이 정치적 맥락 속에 들어"왔다는 진중권의 주장은 매우 주책없는 소리다. 상아탑 지식인은 뭘 모르니 입닥치라는 얘기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회참여 지식인들만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을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많은 시청자들이 별 관심없이 지나쳤던 부분이지만, 한국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영훈 교수는 자신이 필드워크를 다니던 남부지방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마을들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을들 중 많은 마을의 ‘어른’들이 그 사실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아이들이 서로 손잡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할게 아니냐며. 그리하여 민간의 상처는 겨우 아무는 중인데, 진상규명법의 내용엔 피해자의 신고가 있으면 가해자를 조사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 자칫하면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전체토론과정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조사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되었건 정부나 군대에 의한 학살은 조사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비일비재했던 민간인끼리의 학살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 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안병욱 교수의 답변은 "진실이 있어야 진정으로 상처가 아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지식인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로 흔하게 운위되는, 계몽주의적인, 자기확신에 찬, 대중의 삶에 대한 고려가 없는 주장을 찾는다면 이 경우 누구의 주장이겠는가. 나는 오히려 안병욱 교수의 주장이라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이영훈 교수의 대안이 빛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인식을 가능토록 한 그의 성실한 학적 연구와 조사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마이뉴스가 이영훈 교수에게 손해배상을 하는 그 날, 저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자발적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 혹은 법원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며 손해배상금 대신 내주기 모금운동이라도 벌일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옳았고, 나는 대중의 건전한 상식을 신뢰한다는 의견이 인터넷에 올라온다. 그런 말들에 나는 절망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하나의 원본텍스트를 가진 사건을 두고도 이러한 전쟁을 벌여야 하는데, 우리의 양식(良識)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정당한 전쟁과 그 기록

화요일, 10월 21st, 2008

역사도 ‘평가’라는 가치판단 행위이다. 전쟁을 일으킬 것인지 말것인지의 문제도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맹자를 읽다 보면, 이웃나라를 쳐야 할지 묻는 제나라 선왕에게 맹자가 대답하는 부분이 있다.

齊人 伐燕勝之

宣王 問曰 或謂寡人勿取 或謂寡人取之 以萬乘之國 伐萬乘之國 五旬而擧之 人力 不至於此 不取 必有天殃 取之何如

孟子對曰 取之而燕民悅則取之 古之人 有行之者 武王 是也 取之而燕民不悅則勿取 古之人 有行之者 文王是也.

以萬乘之國 伐萬乘之國 簞食壺漿 以迎王師 豈有他哉 避水火也 如水益深 如火益熱 亦運而已矣.

-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下 10

맹자에 의하면, 침략당하는 국가의 백성들이 기뻐 반길 경우, 전쟁을 일으켜 취해야 하고,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을 경우 전쟁을 일으켜 취해서는 아니된다.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피침략 국가의 백성들이 진실로 기뻐하여 침략자를 반길 경우, 그렇게 침략된 국가와 그 이후의 역사적 기록은 어찌되는가 하는 질문을 한번 던져본다. 가령, B급좌파 김규항의 경우 그의 블로그 광복절이라는 글에서, 기존에 그가 취하는 계급론적 관점에서 광복절을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주체가 일본인에서 조선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 이다. 오늘 광복절은 것을 바로 그걸 기념하는 날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라는 기록이 대부분 ‘승자’의 기록이고, 상위계급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조선인민이 피지배를 반겼음에도 ‘기록’을 남기는 자들에 의해서 그것이 왜곡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인민들의 목소리가 ‘기록’ 되는 것은 필연일까?

실재로 일본작가의 어떤 만화는 일본의 침략에 피침략 국가의 민중들이 환호하며 반기는 장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맹자의 언급처럼, ‘쳐야 할 만한’ 국가가 바로 조선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일진회라는 친일 단체는 합방요구 성명서를 발표한 사실이 있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이라는 자뻑에 빠질 수 있도록 단초를 제공한 것은 ‘우리 안의 배신’ 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선이라는 국가에서의 인민의 삶은 일본 침략을 반길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는지도 모르는것 아닐까?

내가 역사라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역사’라는 것이 단지 ‘대중적 평가’의 집합에 그칠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국가’는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것을 단지 국가운영에 이득되는 방향으로 이용할 뿐이다. 또한 평가라는 것이 결국 인간 안에서 나온다는 ‘가치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경우, 그 ‘역사’의 옳고 그름은 결국 나의 판단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역사를 경계한다. 내 눈 앞의 적들에 침묵한 체, 과거 죽어버린 적들을 상대한다는 것. 그것은 무덤에 침 뱉는 비겁한 행위에 그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白紙 3

금요일, 10월 17th, 2008

白紙 3

                                                                 조정권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苦痛,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가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蓄積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有情한 눈길을 주다 보면
  白紙는 비어 있음으로써 充溢한 불을 켜고 있다.


일기와 편지

목요일, 10월 16th, 2008

일기장 앞에 앉으면 편지가 생각난다. 사실은 일기를 쓰고 싶어서 일기를 쓴다기 보다. 편지를 쓰고 싶은데, 쓸 사람이 없어서 일기를 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편지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을진데, 내 내면을 보이고 싶은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아니, 어쩌면, 그 이후의 대책없음이 나는 너무나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매일의 독백을 채우는 일기를 쓸 때 마다. 그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한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 원함 만큼이나 두려움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외소해 져 가고 있다. 당당히 직면하지 못하고, 힐끔거리는 늙은 거지처럼, 그렇게 나는 외소하다.

격문이 익숙한 나, 분노의 정서가 익숙한 나에게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무엇이 그렇게 심각했던지, 내가 썼던 편지들은 전부다 힘이 들어간 문체였고 각진 문체였다. 공격과 공격, 이성의 문제라기 보다 살과 살이 부딪힌 이전투구의 전장에서, 부단히도 언어를 붙들었던 자는 결국 비언어적인 것이 가지는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한번 꺽인 듯 하고, 지금 꺽여 있는 듯 하다. 벌써 반십년이 다되어 가도록 간헐적으로 꾸는 이 악몽은 내 언어의 업보인 것일까. 그래서, 이제 나는 그렇게 많은 말들이 싫다. 나의 말들이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더불어 타인의 말들도 혐오스럽다. 다시 주먹잡이가 되어 가는 나는 그렇게 삭막해져가고 있다. 차라리 주먹을 맞대어 보는 것은 어떤가?

주먹잡이가 썼던 편지는 쓸때의 부끄러움 만큼이나 읽을때의 부끄러움이 더 크다. 너무나도 큰 부조화. 그 속에는 갈망을 비롯해 두려움이 결국에는 드러난다. 자신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보는 주먹잡이는 그 두려움과 불안함이 건네어 졌을 때, 그 두려움과 불안함이 건내어지지 않았을 때의 안정감이 깨어질까 무서워. 아니, 그 두려움과 불안함이 건네어 지는 그 순간에 그 두려움과 불안함이 현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불안함 때문에, 종국에는 그 편지를 자신의 일기장 속에 고이고이 숨켜둔 체, 다시 주먹을 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즈음 되면 또 다시 하나의 질문이 등장하는 것이다. 과연,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내민 손을 잡아주는 존재의 존재가 어려운 것인가?


아이디어 작살인 뮤비

수요일, 10월 15th, 2008

Fatboy Slim -THE BPA TOE JAM ft. David Byrne & Dizzee Rascal

완전 너무 참신하시니까 ㅡ;;


잔디밭에서 아이스크림

월요일, 10월 13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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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지양이 찍어준 사진


금요일, 10월 10th, 2008
*

언젠가 산더미 만한 욕에 깔려 뒈질날이 올것이다.

입만 열면 아주구리 시빠빠. 화나서 갈긴 낙서… 욕 끊어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