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 쓰인 책은 리처드 미들턴·브라이언 왈시著,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파주: 살림출판사, 2007), 김기현·신광은譯. 을 사용하였다.
1. 학문의 현실성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잃지 않아야 할 태도 중의 하나가, 현실에 뿌리박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모든 학문은 그 현재성이 그 학문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그 학문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의의 이다. 그 현재성이 상실되었을 때, 그 학문은 더 이상 인류의 자산으로 존속하지 못할 것이며, 그래야 할 당위도 찾을 수 없다.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그 학문이 현실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 없이,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하면 현실에서는 쓰이지 않는 상아탑에 갇힌 학문이 될 우려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 세계관 수업을 듣고 있는 우리들이 제기하게 되는 질문 즉,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논의가 지금 이곳에서도 과연 유효한 논의인가?”에 대하여, 미들턴과 월시의『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2. 대구적 구성
이 책의 구성은 서문 이후에 1부에서 포스트모던 조건(현실인식)에 대해서 다루고 2부에서 성서의 자원들(문제해결책 제시)에 대해서 다룬다.
3. 모더니즘 – 진보의 신화
저자들은 세계관1)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4가지 질문을 던지는 형식을 취한다.2) 콜럼버스의 일화를 통해서 살펴본 모더니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인간은 신세계에 살고 있으며, 잃어버린 에덴을 발견한 정복자로 보고 있다. 이 인간은 발견된 신대륙의 원시성과 야만성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3) 이어 이들은 존듀이를 인용하여 근대인에 대해서 설명한다.
첫째, 근대는 초자연적인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에 자연, 현세, 그리고 세속 세계에 호감을 갖는다.
둘째, 교회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던 중세와 달리 “근대인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진리를 얻는데 관찰, 경험, 사유의 방법을 따라가는, 개인의 정신 능력에 대한 믿음이 커져가고 있다.”
셋째, 진보에 대한 신념이 근대의 특징이다. 듀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황금시대Golden Age는 우리 뒤가 아니라 우리 앞에 있다.” “인간은 그가 정말 하려고만 한다면, 또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용기, 지혜, 그리고 노력을 훈련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넷째, “이 세계의 진보는 근면함과 자연에 대한 실험을 통해 연구하고, 자연을 통제하고,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드는 노력으로 가능하다.”4)
그들이 듀이를 인용하면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근대의 정신이 진보의 정신이었다는 것5)이다. 이 진보의 정신은 단순한 이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역할을 했다.
이 신화는 미들턴과 왈시가 보기에 일종의 자기 확신의 ‘우상숭배’ 였는데, 이 같은 근대정신을 성경의 바벨탑에 비유한다.6) 과학으로 대변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이 바벨탑의 가장 근저에는 인간의 “강인한 어깨” 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근대인들은 인간이 계몽을 통해 합리적 인간이 된다면, 불가능한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근대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실재가 무엇인지, 실재를 어떻게 탐구하고, 이해하며, 지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7)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이처럼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 이를 미들턴과 왈시는 ‘우상숭배’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4. 모더니즘 – 실재론과 자율론
- 데카르트의 실재론
근대의 대표자 하면 데카르트를 떠올린다. 데카르트는 근대의 합리성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데카르트 사상의 핵심은 실재론이다.8) 근대인들은 인간정신이 실재를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또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로 그 같은 확신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 같은 절대적 주장들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성된 관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9)
실재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미들턴과 왈시는 야구경기의 심판을 예로 들며, 이 세 관점을 설명한다.10) 이 세 관점 중 소박한 실재론은 점차로 쇠퇴하고 있고, 관점적 실재론과 관점주의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의 규범이나 기준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11)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우리가 구성하는 실재 속에 있다.”12)
실재란 인간의 구성물이며 사회의 구성물 이었다.13) 실재는 항상 당대의 사회적 삶을 인도하는 지배적 구성물이었다. 리처드 로티는 언제나 “누구의 실재”인지, “어떤 사고의 다발”인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이제 그들은 “실재를 역사, 개체성, 변화와 같은 우연적인 것을 초월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주장은 인간의 또 다른 종류의 지배욕을 드러낸다.”15)고 생각하는데, “진리의 통일성은 폭력이라는 대가를 지불할 때에 비로소 살 수 있는 것”16)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이질성을 거부하고, 이질성을 체계 안으로 지배하고 제거한다.17)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폭력성을 해체하고 폭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실재를 인간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치가 균등한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그 어느 것에도 의미와 질서를 부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더니티의 폭력성 또한 우리 인간들이 모두 공모하여 구성한 것이었음을 폭로한다. “우리가 구성한 실재와 대면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오만함, 상처, 불확실성, 그리고 악을 만나게 된다.”18) 이제 우리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상실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같은 방향상실은 모더니스트였던 자들이 해체요법에 의해 겪는 고통과는 별도로, 극도로 ‘실재적’ 인 ‘이미지’에서 양방향 적으로 일어난다.19) 모더니즘의 “인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은, “인간은 세상을 바꾸어 왔다.”는 과거에의 평가로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인식론적 확신과 절대 진리 체계라는 데카르트적 이상은 모더니티만의 특성은 아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 같은 인식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지속이며 어떤 점에서는 강화된 모던이다.20) 앞서 서술된 ‘극실재’는 본질적으로 모던한 것이다.
- 베이컨의 자율론
근대의 또 다른 대표자는 베이컨이다. 그는 과학을 대중화 시킨 사람으로서, 지식을 자연 지배와 인간 개선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 여겼다.21) 베이컨 사상의 핵심은 자율성이다. 모더니티는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독립적이며, 자기 의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통합적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규정하고 결정할 수 있다.22)
인간중심적 근대적 자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인간의 구성물이라는 인식,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우리가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차로 인간이 실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졌다. 인간이 인간을 규정한다는 자율성은 점차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 확신의 폭력성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다.23) 폭력성은 자연파괴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외하는 현상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이유로 피지배 계층은 지배자들을 향해 더욱 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24) 인간은, 지배적 주체에서 “무한한 순응을 강요하는 강력한 패권적 세계관 아래, 조정되고, 지배되고, 순응되어야 할 주체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로 인간은 자신들의 자율성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25)
우리는 점차로 자아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26) 많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안정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슬퍼하지 말고 탈중심적 자아가 도래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한다. 원래부터 본질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구성하는 내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지간에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7)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이 같은 입장에서 베이컨적 전통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우리의 자아를 우리가 규정하는 자율성을 더욱더 기뻐하라는 태도는 자율성을 핵으로 하고 있는 베이컨적 전통을 보다 전개한 것인지도 모른다.
5. 포스트모더니즘적 폭력 – 진지함의 폭력에서 유머의 폭력으로
저자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카니발에 비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재를 우리가 구성하고, 우리의 자아 또한 우리가 구성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관성 없는 여러 태도들의 연속물로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포스트모던 자아상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 우리는 그저 “그날그날의 진리들과 함께 즐기면 된다. 익살맞게 생긴 모자를 흔들어보거나 한번 모자를 써보면 된다. 심각한 생각들은 카니발 입구에 그냥 두고 들어와라”28)
이 같은 가벼움과 익살의 문화는 저자가 책 앞에서 제시한 모터니티의 비극적 묘사와도 동일하게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29) “자기 조롱을 일삼는 포스트모던적 코미디언”은 “관계를 위해 헌신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장애를 겪을 것이 뻔하다.30) 친밀한 관계는 참 자아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31) 이른바 관계론은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그 무엇도 측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실재나 주체는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판단하는 규준 또한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모더니티의 폭력에 대한 판단 또한 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 혼란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이제 카니발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다른 담론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담론도 일종의 놀이와 유희로 전락 되었다. 놀이이기 때문에 진지할 필요가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지한 관심은 카니발 입구에 놓아두고 와야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이웃의 얼굴도 오랫동안 떠올려서는 안 된다. 결국 규범성도 포스트모더니티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폭력성은 이제 다시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게 될지 모른다.
6. 기독교 세계관적 대안 제시
저자들은 이 같은 폭력성의 문제가 포스트모더니티가 주장하듯이 담론이 거대 하느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심성 속의 폭력성의 문제로 보았다. 거대담론에 대항하는 지역적 담론들 또한 거대담론 못지않은 폭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티 또한 숨겨진 거대담론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담론이 담고 있는 내용이며, 기독교 세계관적 담론이 가지고 있는 윤리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인식 하에서, 저자들은 출애굽 이야기 속에 담겨진 윤리성이나 고대근동의 신화와 대비시켜 창세기 설화를 이해하기를 시도한다. 이들은 이 이야기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 성서 기저에 흐르는 반제국주의적 태도, 정의를 실현하는 이상적 국가상을 제시하고, 고대근동의 신들의 노예로써의 인간관에 대항하여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들은 성서가 하나의 도그마적 교리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내러티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성서는 성서 내부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긴장과 테러의 텍스트다.32) 우리는 미완성 대본인 성서 속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대본과 조화를 이루고 플롯의 의도와도 일치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성서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충실히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7. 마치며…
이 책은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꼭 기독교세계관을 대안으로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근대정신과 포스트모던 정신의 비판적 검토는 우리 시대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주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실재를 알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인간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로 이어진다. 이 같은 믿음은, 인간이 세상을 구성해 왔다는 과거에의 평가로까지 이어지고, 인간은 이 세상의 구성에 ‘권리’를 가진 것처럼 이야기 되었다. 하지만, 그 ‘권리’행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잃어버렸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 굶주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만용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과거의 모더니즘이 자기 신념과 확신에 찬 ‘플라톤의 일그러진 얼굴’로 묘사되는 ‘진지함’의 폭력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누구의 말에도 진지하게 응해주지 않는 그저 ‘웃음 가득한 광대’의 ‘가벼움’의 폭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아픔에 절대 공감하지 못하고, 왜 그리 심각하냐며 조롱하기만 한다. 그 ‘가벼움’은 오히려, 모더니즘의 ‘진지함’ 보다 사뭇 폭력적이다.
이 책은, 이 같은 포스트모던시대의 문제에 대해서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서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함과 전체주의의 경계, 그리고 주권적 창조주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은 칼뱅주의 신학의 어떤 특징으로 볼 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만 주목한 복수심에 찬 종파주의는 해방신학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들은 이 양자 모두가 불완전한 것으로 본다.33)
이 책은, 또한 기존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언급하는 태도와는 조금 새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성서를 이야기로 읽는 것 외에도, 드라마적 즉흥연기를 강조하는 측면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드라마 기법과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결국 기준이 없다고 여겨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결국 그것들을 판단하기 위한 나의 기준들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으로 기준을 제시하는 사상들을 더 많이 접하고 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