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11월, 2008

주절주절

토요일, 11월 29th, 2008

#1
나는 내 나름대로, 여성주의나 녹색을 ‘자존’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령, 여성의 가사 노동에 의존하는 남성은 여성의 가사 노동을 착취한다. 자연에 의존하는 인간은 자연을 착취한다. 이처럼, 의존과 착취는 양면적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이 같은 여성에 대한 착취를 피하는 법은 자신의 의존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남성들 또한 가사 노동을 해야 한다. 여성이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바깥’으로 나갔을 때, 남성은 여성의 가사 노동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 같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녹색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연에의 의존을 탈피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물도 마셔야 하고, 음식도 먹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존’을 말한다. 인간의 물리적 조건을 수용하고 그것을 아껴야 한다는 말이다. 녹색은 의존의 탈피와 공존을 함께 말한다.

#2
어제 저녁에는 같이 사는 형님과 손님이 녹색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다. 어떤 녹색주의자들은 실천적 측면에서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아낌’ 실천 속에서, 각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녹색’을 실천하는 것이리라. 그러자 손님이 말한다. “아, 나도 걸어 다니는데, 그럼 나도 녹색?”

지향하는 바와 실천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지만, 결국 평가는 이상이 아니라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녹색에서 말하는 그 ‘대안적 삶’을 우리가 살아냈을 때에야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채식주의’, ‘자전거 이용’, 뭐 기타 등등의 녹색의 이상 앞에서 우리 형님은 ‘하지 않는 것.’ 이라 주장하고, 손님은 그것은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3
요 몇 일간 많이 아팠다. 아니 아직도 아픈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컨디션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게, 누워서 신음하고 바닥을 치고 벽을 치다가 일어났다. 부엌에는 어제 형이 마신 술과 과자 껍질이 널브러져 있다. 또, 주로 만나는 여성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내버려 두고 나간 것이리라. 아하, 것 참.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 못하는 것’ 일까? 자칭 ‘페미니스트’인 그는, 진보적인 것에 많이 끌리는 사람이다.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의 유학을 꿈꾸고 있다. 그가 보다 더 진보적인 생각들로 머리를 채우는 것은 걱정이 되지 않는다. 다만, 점점 더 실천과 멀어지는 사람이 되어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볼 뿐이다.

#4
그러는 나는, 또, 정서적 의존도 높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정서착취를 끝내고 나서야, 힘을 내어 본다. 자존의 이상? 참으로 힘든 길이다.


mangatar

수요일, 11월 26th, 2008

자신의 캐릭터를 만드는 Mangatar 라는 것이 있네요. 저도 한번 해봤습니다. 그런데, 제 사진을 보면서 아무리 맞는걸 고르려고 해도, 제 모습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힘들 것 같네요.

*

이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http://www.faceyourmanga.it/faceyourmanga.php?lang=eng 에 가면 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투표 안 할건데요…

수요일, 11월 26th, 2008

이번 선거 볼 거 없었잖아요. 중선관위도, 후보도 단독후보라서 그냥 저냥 선거 대충 하겠다는 느낌만 들었던 건 저뿐인가요?

저는 투표할 때 공약 안 봐요. 다만 공약 속에서 드러나는 후보를 볼 뿐이죠. 정책선거를 지향한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과정에서의 가치이지,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삶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앞으로 닥쳐올 변화무쌍한 이벤트들에 후보가 어떻게 대처할지는, 그 후보가 어떤 가치관을 바탕하고 있는지가 영향을 끼친다고 봐요. 결국 중요한건 그 후보의 가치관과 관심사겠죠. 그 후보의 가치관과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공약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총학생회장 후보는 후보로써 사안에 대한 구체적 입장 표명이 ‘유쾌한 동행’에 대한 결례라고 말하네요. 그럼 모든 ‘구체적 공약’은 이전 정권에 대한 ‘결례’ 인가요? 자치회 후보는 ‘야식금지’가 공약이라네요. 학우들을 야식을 조절조차 못하는 주체적 인간으로 보지 않는데, 어떤 운영을 하실지 눈에 뻔하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투표 안할래요. 투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투표 하는 분들은 그래도 총학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냥 경험적으루요.) 그래서 차라리 투표율 50% 안 넘어서, 다음에 다시 투표 하는 게 저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회칙 안에서의 방법이겠네요.

투표 안하는 사람들이 모두 무관심하다고만 생각하지는 마세요. 결국 정치라는 건 주어진 조건들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 아니겠어요? 저는 관심도 많지만 지극히 정치적으로 투표를 안하는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제 투표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고려해 볼 만하지 않겠어요?

이 글은 혹여나 투표율이 낮다고 하여, 한동학생들 정말 관심이 없네 어쩌네 하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한동에 희망이 없니 있니 하며 오바하시는 분들 계실까봐 쓰는거에요.


로버트 제임스 윌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화요일, 11월 25th, 2008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시공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영화작품이 먼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의 원작인 소설을 읽게 되었다. 대략적 줄거리는 유부녀와 이혼남이 4일간 사랑에 빠지고, 그 기억을 죽을 때 까지 못 잊어 한다는 낭만적 내용.

하지만 읽는 동안, 낭만적 사랑을 나누고 낭만적 사랑 속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삶의 무게보다. 그들을 스쳐간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남자 주인공 로버트 킨케이드가 약간 외로울 때면 만나곤 했던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그녀가 그의 마음을 맴도는 이야기를 했다.

  “로버트, 당신 안에는 내가 들춰낼 수 없는 뭔가가 있어요. 나는 거기에 닿을 힘이 없어요. 때때로 당신이 여기 오랫동안, 한 사람의 생애보다도 더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혼자만의 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구요. 당신은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나는 당신이 두려울 때가 있어요. 당신을 향하는 내 마음을 제어하려고 나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난 내 중심을 잃게 되고 말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찾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_ 책, 24.

그녀는 아마도 사랑하는 로버트 킨케이드의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이 닿을 수 없음을 느꼈고, 그 무력함, 좌절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 프란체스카의 유품으로 남긴 편지에서 드러나는 여주인공의 남편에 대한 서술에서, 남편 또한 어떤 좌절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부분이 보인다.

  리처드는 그가 다다를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해. 때로는 그가, 화장대에 숨겨 놓은 마닐라 봉투를 몰래 본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어. 그이가 죽기 직전, 내가 디모인의 병원의 침상 곁에 앉아 있을 때,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어. “프란체스카,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꿈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미안하오, 당신에게 꿈을 심어 주지 못해서.” 우리가 함께 살았던 생애 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지.

_ 책, 192.

남편의 좌절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 부인에게는 감동으로 이어졌다. 서로에게 파괴적인 이 관계 아무래도 괴롭다.

남녀 주인공의 낭만적 사랑과 그 주변인들에 대해 생각하면 미심쩍거나 꺼려지는 부분이 생긴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고양시켜 감상해야 할 부분은, 아무래도 합리화 기계화 문명화 되어 가는 사회에서 낭만과 신비의 가치에 대해서 노래하는 주인공 간의 대화는 아닐까? 머리 식히기는 좋을 듯한 내용. 일상의 탈출… 낭만에 취하고 싶은 여성에게 권한다.


요즘 드는 생각들 1

금요일, 11월 21st, 2008

그들의 수사란… 완전 쓰레기글 배설… 자꾸 이런 글을 쓰니까 ‘비분강개형’문체가 손에 익으려고 그런다. 버려야할 못된 습관이다.


요즘 드는 생각들 1 (총학의 제언 관련해서)

총학의 제언 관련해서

나는 솔직히 얼마 전에 있었던 現총학의 제언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로이 드러난 버스, 공간, 규정의 문제는 그 정보공개의 측면에서 학우들에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작 총학이 학기 내도록 역량을 집중했으며 학우들 사이에서도 주요 사안이었던 식당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인식이 진전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총학생회의 제언 내용 속에는 그들의 짧은 임기를 핑계하며, 온갖 역겨운 수사로 실효성이 없어 보이는 정책을 내어놓고 있는데, 그것이 One Stop Service 제도이다. 특히나 One Stop Service 제도에 관한 설명에서, 총학생회는 이상한 말을 한다.

학우 여러분의 불편 및 불만 사항은 대부분이 ‘셔틀 버스’, ‘식당’, ‘부분적 학점 철회제’ 등으로 총학생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민원이 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략)…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처리절차는 길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들이 직접 학교 측에 민원을 전달하고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까놓고 말해, 이번 학기에 있었던 식당 문제에 대한 학우들의 민원이 총학이 그 민원을 학교측에 전달하고 다시 전달받는 과정상의 지체 문제였던가?? 총학생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셔틀 버스’, ‘식당’, ‘부분적 학점 철회제’가 일개 학우들이 학교당국을 방문하면 쉽게 해결 될 수 있는 사안인걸까? 정말로 만약 그러하다면, 총학생회의 존립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개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총학생회는 두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셔틀 버스’, ‘식당’, ‘부분적 학점 철회제’ 같은 거대 사안이, 일개 학우가 행정당국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라면, 일개 학우가 못 해결할 사안이 어디 있겠으며, 총학생회는 도대체 왜 있는 것일까?

학교측이 정보를 선점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총학생회가 운운한대로 정보비대칭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학우들이 이런 저러한 상황을 모르고 건의하여 학교측에 방문한다면, 학교측은 그것을 시행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가르쳐’ 줄 것이다.

학우들이 식당에 관한 불평불만 글을 올리면 학생과로 호출 받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현 상황은 총학생회가 One Stop Service 운운하며, 엄청난 공과를 올린마냥 설레발치지 않아도, 학생처장님의 None Stop Calling 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말 One Stop Service 가 정말 필요한 제도인가? 차라리 공개 설명회 몇 회를 더 하는 게 유익하고 건강하지 않을까?

총학생회는 학우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학교당국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학생 대표로써 접근하고, 그 정보를 분석해서 학우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단체이다. 그런데, 학우들의 욕구가 있으면 행정당국에 직접 연결시켜주겠단다. 그럼 뭐할래? 대부분 외주로 주는 축제? 버스회사에 전화해서 버스 대절? 에라이…그냥 니들 해산하던가.

문득, 식당사안을 문의하러 총학생회 사무실을 방문하니, 식당매니저나 학생처장님을 만나게 해드릴깝쇼~하고 묻던 총학생회 측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ps. 久ECMD 아니고, 舊ECMD.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일요일, 11월 16th, 2008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드라마 | 1977.09.17 | 129분 | 미국

감독 밀로스 포만

출연 잭 니콜슨, 루이스 플레처, 윌리암 레드필드, 브래드 듀리프 더보기

줄거리 범죄자인 맥머피(Randle Patrick McMurphy: 잭 니콜슨 분)는 교도소에서 정신 병원으로 후송된다. 정신 병원이 감옥보다는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던 맥머피…더보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1977년 작품이다. 배경은 정신병원, 이 정신병원을 그냥 정신병원으로 읽어 내기만 해서는 안 될 듯하다. 가령,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인디언으로 병원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는 Chief는 사실상 말을 들을 줄도 알고 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그가 ‘인디언’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통해 이 영화가 그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나 McMurphy가 정신병원에서 도망치자고 Chief에게 제안했을 때, Chief가 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있는 이유가 인종적 차별 때문임을 암시한다. 그의 아버지는 Chief보다 컸었고 유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당했다. Chief와 그의 아버지를 ‘산송장’처럼 만드는 ‘그들’ 이 있다는 것.

정신병원, Ratched 간호사가 환자들의 자발성을 떨어뜨리는 부분은 영화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월드 시리즈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McMurphy. Ratched 간호사가 말하는 병원의 소중한 일과표라는 것은 월드 시리즈가 방영되는 시간에 환자들이 보드 게임을 하고 있는 것. 이후 다시 요구된 재투표에서 10명이라는 환자 과반수를 넘기는 찬성이 있었음에도, 정해진 시간에 결정되지 않았다는 절차를 문제로 Ratched 간호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치료의 명목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환자들을 더욱 병들게 만든다. 흡연권 보장을 주장한 Cheswick의 발언과 그로 인한 병원 내의 난동을 이유로 병원측은 McMurphy, Chief, Cheswick은 전기충격을 가한다. 병동 내에 원장이 등장하기만 하면, 병원 환자들은 그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후에, Billy가 자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McMurphy는 병원측에 의해 폐인이 되어 버리고, Chief는 그러한 McMurphy는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McMurphy를 죽게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들 수 없었고, McMurphy가 들어 병원을 탈출하려 했던 세면대(?)를 들고 병원 벽을 뚫고 탈출한다.


몸의 생명력

금요일, 11월 14th, 2008

심리치료과목 교재로 쓰고 있는 [[비블리오 드라마]] chapter 6 에 나오는 말이다. 대게 정신과 육체의 분리. 육체의 놀림. 게으름. 나의 정신적 고통은 아무래도, 몸이 열심히 살지 않아서 생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이 본문을 읽으면서 했다는…

의자에 앉아서 루돌프 스테이너Rudolf Steiner 작품 5권을 읽어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이것뿐이었다.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사탄은 우리 몸의 다른 부분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머리에 몰리게 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1961:40.” 이러한 관점을 통해 몸과 마음의 분열은 사탄의 승리와 같다고 비난할 수 있다. 몸과 감정으로부터 분리된 명료한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윌리엄 포티트William H. Poteat가 말한 것처럼 데카르트의 사상서구 사회의 이분법을 인정하게 만든 데카르트 철학은 우리를 “문화적 정신병자culturally insane”로 만들었다1985:6.

<<Bjorn Krondorfer 엮음, [[비블리오 드라마]](서울: 창지사, 2008), 황헌영·김세준 옮김, 254.>>

그런데, 또… 그렇다고 해서 한가의 철학이 언제나 사탄적인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리처드 미들턴과 브라이언 왈시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살림출판사, 2007

목요일, 11월 13th, 2008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브라이안 왈쉬 외 지음, 김기현 외 옮김/살림

※ 본 리뷰에 쓰인 책은 리처드 미들턴·브라이언 왈시著,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파주: 살림출판사, 2007), 김기현·신광은譯. 을 사용하였다.

1. 학문의 현실성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잃지 않아야 할 태도 중의 하나가, 현실에 뿌리박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모든 학문은 그 현재성이 그 학문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그 학문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의의 이다. 그 현재성이 상실되었을 때, 그 학문은 더 이상 인류의 자산으로 존속하지 못할 것이며, 그래야 할 당위도 찾을 수 없다.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 그 학문이 현실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 없이,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하면 현실에서는 쓰이지 않는 상아탑에 갇힌 학문이 될 우려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 세계관 수업을 듣고 있는 우리들이 제기하게 되는 질문 즉,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논의가 지금 이곳에서도 과연 유효한 논의인가?”에 대하여, 미들턴과 월시의『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2. 대구적 구성

이 책의 구성은 서문 이후에 1부에서 포스트모던 조건(현실인식)에 대해서 다루고 2부에서 성서의 자원들(문제해결책 제시)에 대해서 다룬다.

3. 모더니즘 – 진보의 신화

저자들은 세계관1)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4가지 질문을 던지는 형식을 취한다.2) 콜럼버스의 일화를 통해서 살펴본 모더니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인간은 신세계에 살고 있으며, 잃어버린 에덴을 발견한 정복자로 보고 있다. 이 인간은 발견된 신대륙의 원시성과 야만성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3) 이어 이들은 존듀이를 인용하여 근대인에 대해서 설명한다.

첫째, 근대는 초자연적인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에 자연, 현세, 그리고 세속 세계에 호감을 갖는다.

둘째, 교회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던 중세와 달리 “근대인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진리를 얻는데 관찰, 경험, 사유의 방법을 따라가는, 개인의 정신 능력에 대한 믿음이 커져가고 있다.”

셋째, 진보에 대한 신념이 근대의 특징이다. 듀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황금시대Golden Age는 우리 뒤가 아니라 우리 앞에 있다.” “인간은 그가 정말 하려고만 한다면, 또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용기, 지혜, 그리고 노력을 훈련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넷째, “이 세계의 진보는 근면함과 자연에 대한 실험을 통해 연구하고, 자연을 통제하고,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드는 노력으로 가능하다.”4)

그들이 듀이를 인용하면서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근대의 정신이 진보의 정신이었다는 것5)이다. 이 진보의 정신은 단순한 이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 역할을 했다.

이 신화는 미들턴과 왈시가 보기에 일종의 자기 확신의 ‘우상숭배’ 였는데, 이 같은 근대정신을 성경의 바벨탑에 비유한다.6) 과학으로 대변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이 바벨탑의 가장 근저에는 인간의 “강인한 어깨” 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근대인들은 인간이 계몽을 통해 합리적 인간이 된다면, 불가능한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근대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실재가 무엇인지, 실재를 어떻게 탐구하고, 이해하며, 지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7)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이처럼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 이를 미들턴과 왈시는 ‘우상숭배’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4. 모더니즘 – 실재론과 자율론

- 데카르트의 실재론

근대의 대표자 하면 데카르트를 떠올린다. 데카르트는 근대의 합리성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데카르트 사상의 핵심은 실재론이다.8) 근대인들은 인간정신이 실재를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또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로 그 같은 확신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 같은 절대적 주장들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성된 관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9)

실재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미들턴과 왈시는 야구경기의 심판을 예로 들며, 이 세 관점을 설명한다.10) 이 세 관점 중 소박한 실재론은 점차로 쇠퇴하고 있고, 관점적 실재론과 관점주의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의 규범이나 기준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11)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우리가 구성하는 실재 속에 있다.”12)

실재란 인간의 구성물이며 사회의 구성물 이었다.13) 실재는 항상 당대의 사회적 삶을 인도하는 지배적 구성물이었다. 리처드 로티는 언제나 “누구의 실재”인지, “어떤 사고의 다발”인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이제 그들은 “실재를 역사, 개체성, 변화와 같은 우연적인 것을 초월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주장은 인간의 또 다른 종류의 지배욕을 드러낸다.”15)고 생각하는데, “진리의 통일성은 폭력이라는 대가를 지불할 때에 비로소 살 수 있는 것”16)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이질성을 거부하고, 이질성을 체계 안으로 지배하고 제거한다.17)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폭력성을 해체하고 폭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실재를 인간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치가 균등한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그 어느 것에도 의미와 질서를 부여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모더니티의 폭력성 또한 우리 인간들이 모두 공모하여 구성한 것이었음을 폭로한다. “우리가 구성한 실재와 대면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오만함, 상처, 불확실성, 그리고 악을 만나게 된다.”18) 이제 우리는 그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상실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같은 방향상실은 모더니스트였던 자들이 해체요법에 의해 겪는 고통과는 별도로, 극도로 ‘실재적’ 인 ‘이미지’에서 양방향 적으로 일어난다.19) 모더니즘의 “인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은, “인간은 세상을 바꾸어 왔다.”는 과거에의 평가로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인식론적 확신과 절대 진리 체계라는 데카르트적 이상은 모더니티만의 특성은 아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 같은 인식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지속이며 어떤 점에서는 강화된 모던이다.20) 앞서 서술된 ‘극실재’는 본질적으로 모던한 것이다.

- 베이컨의 자율론

근대의 또 다른 대표자는 베이컨이다. 그는 과학을 대중화 시킨 사람으로서, 지식을 자연 지배와 인간 개선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 여겼다.21) 베이컨 사상의 핵심은 자율성이다. 모더니티는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독립적이며, 자기 의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통합적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규정하고 결정할 수 있다.22)

인간중심적 근대적 자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인간의 구성물이라는 인식,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우리가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모더니즘을 지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차로 인간이 실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졌다. 인간이 인간을 규정한다는 자율성은 점차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 확신의 폭력성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다.23) 폭력성은 자연파괴나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외하는 현상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이유로 피지배 계층은 지배자들을 향해 더욱 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24) 인간은, 지배적 주체에서 “무한한 순응을 강요하는 강력한 패권적 세계관 아래, 조정되고, 지배되고, 순응되어야 할 주체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로 인간은 자신들의 자율성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25)

우리는 점차로 자아를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26) 많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안정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에 슬퍼하지 말고 탈중심적 자아가 도래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한다. 원래부터 본질적인 나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구성하는 내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지간에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7)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이 같은 입장에서 베이컨적 전통의 파편을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우리의 자아를 우리가 규정하는 자율성을 더욱더 기뻐하라는 태도는 자율성을 핵으로 하고 있는 베이컨적 전통을 보다 전개한 것인지도 모른다.

5. 포스트모더니즘적 폭력 – 진지함의 폭력에서 유머의 폭력으로

저자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카니발에 비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재를 우리가 구성하고, 우리의 자아 또한 우리가 구성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관성 없는 여러 태도들의 연속물로서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포스트모던 자아상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 우리는 그저 “그날그날의 진리들과 함께 즐기면 된다. 익살맞게 생긴 모자를 흔들어보거나 한번 모자를 써보면 된다. 심각한 생각들은 카니발 입구에 그냥 두고 들어와라”28)

이 같은 가벼움과 익살의 문화는 저자가 책 앞에서 제시한 모터니티의 비극적 묘사와도 동일하게 맞아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29) “자기 조롱을 일삼는 포스트모던적 코미디언”은 “관계를 위해 헌신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장애를 겪을 것이 뻔하다.30) 친밀한 관계는 참 자아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31) 이른바 관계론은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그 무엇도 측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실재나 주체는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판단하는 규준 또한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모더니티의 폭력에 대한 판단 또한 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 혼란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이제 카니발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다른 담론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담론도 일종의 놀이와 유희로 전락 되었다. 놀이이기 때문에 진지할 필요가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지한 관심은 카니발 입구에 놓아두고 와야 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이웃의 얼굴도 오랫동안 떠올려서는 안 된다. 결국 규범성도 포스트모더니티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폭력성은 이제 다시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게 될지 모른다.

6. 기독교 세계관적 대안 제시

저자들은 이 같은 폭력성의 문제가 포스트모더니티가 주장하듯이 담론이 거대 하느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심성 속의 폭력성의 문제로 보았다. 거대담론에 대항하는 지역적 담론들 또한 거대담론 못지않은 폭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티 또한 숨겨진 거대담론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담론이 담고 있는 내용이며, 기독교 세계관적 담론이 가지고 있는 윤리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인식 하에서, 저자들은 출애굽 이야기 속에 담겨진 윤리성이나 고대근동의 신화와 대비시켜 창세기 설화를 이해하기를 시도한다. 이들은 이 이야기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 성서 기저에 흐르는 반제국주의적 태도, 정의를 실현하는 이상적 국가상을 제시하고, 고대근동의 신들의 노예로써의 인간관에 대항하여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들은 성서가 하나의 도그마적 교리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내러티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성서는 성서 내부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긴장과 테러의 텍스트다.32) 우리는 미완성 대본인 성서 속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대본과 조화를 이루고 플롯의 의도와도 일치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성서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충실히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7. 마치며…

이 책은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꼭 기독교세계관을 대안으로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근대정신과 포스트모던 정신의 비판적 검토는 우리 시대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인간의 주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실재를 알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인간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로 이어진다. 이 같은 믿음은, 인간이 세상을 구성해 왔다는 과거에의 평가로까지 이어지고, 인간은 이 세상의 구성에 ‘권리’를 가진 것처럼 이야기 되었다. 하지만, 그 ‘권리’행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잃어버렸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 굶주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만용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과거의 모더니즘이 자기 신념과 확신에 찬 ‘플라톤의 일그러진 얼굴’로 묘사되는 ‘진지함’의 폭력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누구의 말에도 진지하게 응해주지 않는 그저 ‘웃음 가득한 광대’의 ‘가벼움’의 폭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아픔에 절대 공감하지 못하고, 왜 그리 심각하냐며 조롱하기만 한다. 그 ‘가벼움’은 오히려, 모더니즘의 ‘진지함’ 보다 사뭇 폭력적이다.

이 책은, 이 같은 포스트모던시대의 문제에 대해서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서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함과 전체주의의 경계, 그리고 주권적 창조주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은 칼뱅주의 신학의 어떤 특징으로 볼 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만 주목한 복수심에 찬 종파주의는 해방신학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들은 이 양자 모두가 불완전한 것으로 본다.33)

이 책은, 또한 기존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언급하는 태도와는 조금 새로운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성서를 이야기로 읽는 것 외에도, 드라마적 즉흥연기를 강조하는 측면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드라마 기법과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결국 기준이 없다고 여겨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결국 그것들을 판단하기 위한 나의 기준들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으로 기준을 제시하는 사상들을 더 많이 접하고 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비전]]에서 세계관에 대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책, 19. 참고.

2)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 되었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3) 책, 42. 참고.

4) John Deway, Reconstruction in Philosophy(New York: Henry Holt, 1992), 47-49. 책, 26.에서 재인용.

5) 책, 27.

6) 1층에는 과학지상주의, 2층에는 기술지상주의, 3층에는 경제지상주의로 구성되어 있다고 묘사한다.

7) 책, 37.

8) 책, 82.

9) 책, 56. 참고.

10) 소박한 실재론은 자신의 심판이 정확하다고 말하고, 관점적 실재론자는 자신이 보는 대로 심판한다고 말하고, 관점주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인자는 자신이 선언하는 순간 결과가 된다고 말한다.

11) 책, 63.

12) 책, 60. 참고.

13) 책, 62.

14) 책, 64.

15) 책, 68.

16) 책, 68.

17) 책, 69. 참고.

18) 책, 73.

19)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실재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극대화시킬수록 이미지를 강화하는 극사실적 모의 세계는 우리를 실재에서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끝내 욕구 불만을 낳고 감각을 둔화시킨다. 이 모든 것들에는 인간을 마비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 시뮬레이션은 절대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새로운 과도 ‘실재’를 관람함으로써 이러한 면역성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tv를 보면 ‘리얼 추격real cops’, ‘실생활 속의 비극real-life tragedies’, ‘실재 비상사태real emergencies’등의 수식어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날조된 싸구려, 심지어는 조작된 프로그램일 뿐이다. 과도 실재는 너무나 매혹적이고 화려하다. 그러나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매혹은 퇴색되고 화려함도 사라지고 만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끝나면 극장 직원은 여전히 바닥에 떨어진 팝콘과 엎질러진 음료수를 치워야 한다.” 책, 77-78.

20) 책, 82. 참고.

21) 책, 82.

22) 책, 92.

23) 책, 98.

24) 책, 98. 참고.

25) 책, 103. 참고.

26) 책, 98. 에서는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느낄 수 없다 : 근대적 주체의 죽음” 이라는 시적 표현을 하고 있다.

27) 책, 106.

28) 책, 107.

29) 책, 52. 에서는 모더니즘의 몰락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로 옆방에서 죽어가는 에이즈 걸린 젊은이, 다른 방에서는 남편에게 구타와 강간을 당한 여자가 흐느끼고,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마약을 흡입하고, 노숙자가 넘쳐나고, 기근에 빠진 아이들의 멍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 같은 비극적 묘사는 모더니즘에 그치는 묘사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강자들의 목소리를 공격하기만 하였을 뿐,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30) 책, 116.에서 추림.

31) 책, 116-117.에서 추림.

32) “성서 이야기는 안전하지 않다. 성서 속 드라마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성서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 즉흥 연기의 모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시대 역시 위험하다. 우뚝 솟아 올랐던 옛 세계관과 문화 정치적 제국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책, 398.

33) “만일 인간 고통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없이 하나님을 주권적 창조주로만 강조한다면 결국에는 건조하고 전체주의적 신deity만 남게 된다. 아울러 율법주의적 정신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만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권적 창조주를 강조하지 않고 고통에만 주목한다면 고통과 생존에 대한 무기력한 신학과 복수심에 찬 종파주의자들의 영웅적 자기주장을 낳을 것이다.” 책, 207.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실체

목요일, 11월 13th, 2008

뭘 외우기 싫어하는 탓에, 나는 역사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약한 부분이기도 하고, 싫어하는 부분이 역사 부분이다. 항상, 내가 부족한 부분이 역사학 분야임을 생각하고는 있지만, 또한 부러 찾아 공부하기 싫은 부분이 이 분야이다.

얼마전에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 연구실장이 우리학교로 와서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라는 타이틀이 갖는 ‘민족주의적’ 내음이 강하게 풍겨, 얼마나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용 연구실장이 보여준 것도, 뉴라이트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듯 ‘실증주의’적인 내용이었다. 박한용 연구실장은 뉴라이트에서 제공하는 통계수치 마저도 조작적이라고 폭로한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는 경제인들을 찬양하는 찌라시다. 결국 사료와 사료, 실증과 실증의 충돌이었지만, ‘이념’이라면 치를 떨고 관심 없는 이곳의 지역적 세대적 경향을 생각할때, 딱 이정도의 강의가 적당했다는 생각. 이후에, 뉴라이트의 계보나 그들의 이익이 어떤 식으로 결합되고 있는지에 대한 심화학습을 할 수 있다면 더욱 더 좋을 것이리라는 생각. 하지만… 나중에 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일제시대의 수탈 경험이 박정희 독재의 기반이 되었다는 역사인식. 좀 미묘하긴 하지만, 화폐가 지주들의 소작농 수탈을 더욱 심화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 역사를 말하는 역사학자 조차, 어떤 질문들에 관해서는 ‘철학의 질문’이라고 언급하면서, 타 학문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

한가지 학문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과도한 기대라는 확신이 듬. 아니, 우리는 한 분과학문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는 생각.

무엇보다 새벽 4시까지 이어졌던 뒷풀이 잊을 수 없을 듯. 나중에 언젠가 다시 만나서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음. 잊지 못할 만남. 약간의 비낌을 느낌.


그언젠가 이준구

월요일, 11월 10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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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씨. 잘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