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1월, 2009

[88만원 세대론]을 조선이 낚은 사태

토요일, 1월 31st, 2009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1351.html

이정환닷컴에서 RSS구독하다가 읽었는데….

사태의 전말은 조선일보에 변희재가 실크세대론을 88만원세대론에 대한 대안으로 들고 나왔고, 이에 우석훈이 맞장구를 쳤단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88만원세대 공저자인 박권일이 우석훈 잘못했다고 딴지를 놓은 것.

구조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구조 속에 들어 있는 인간들을 무력한 인간으로 본다는 의미도 함께 갖는다. [88만원 세대론]이 갖는 불편함은 20대와 10대들의 처지를 세대 구조적 측면에서 설명해낸다는 측면만큼이나 88만원 세대들만을 무력한 주체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변희재의 글을 잠깐 살펴보자.

젊은 세대를 위하겠다며 88만원세대론을 주장하는 386세대 우석훈 박사는“한국의 386세대는 세계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했으며, 변화대처 능력 또한 탁월하여 앞으로도 한국사회를 주도할 것이다”라고 예찬했다. 반면 그는 88만원세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장점을 부각시킨 바가 없다. 물론 우석훈 박사의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의 88만원세대론은 386세대가 그 아랫 세대를 영원히 지켜주겠다는 흑기사형 담론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변희재가 말한 것처럼 『88만원세대』는 88만원 세대들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함으로써 88만원 세대들을 오히려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386세대에 속하는 우석훈이 지금의 20대에게 세대 구조 속에 무능하고 무력한 세대상으로서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을 내렸다면, 변희재의 그것은 무력한 인간으로 규정되지 않고 앞선 세대에 대항하고 쟁취하는 적극적인 세대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변희재의 그것을 20대 당사자 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우석훈의 시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비록 자신이 무력한 인간으로 20대를 규정하였지만, 사실은 20대가 실존적 질문 앞에서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침으로써 자신의 규정을 거부하기를 우석훈은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석훈의 시각은 오히려『88만원 세대』가 세대론을 취한다는 점에서 일관된 시각이다.

그런데, 이제야 박권일이 『88만원세대』의 본질은 계급론이라며 세대논쟁을 계급논쟁을 위한 발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88만원세대』는 계급론으로 가기 위한 도정으로써의 세대론이 아니라, 계급론과 대립하고 있는 세대론이다. 『88만원세대』에서는 세대론이라는 방법론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세대’라는 용어는 이런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종종 세대 담론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것이 ‘역사성’과 ‘공간성’이라는 구체성을 추상성에 덧붙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_ 『88만원세대』, 77.

이렇게, 『88만원세대』에서 세대론을 ‘역사성’과 ‘공간성’마저 부과된 담론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계급론을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세대론이 ‘역사성’과 ‘공간성’마저 부과된 담론이라면, 계급론은 추상적이기만 한 논의라는 말인가?

조선일보가 세대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자신들의 세대론을 이용하고 있다는 박권일의 문제인식은 조선일보가 담론을 그렇게 이용해서 문제가 아니라, 세대론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박권일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세대론적으로 지지되고 있는 20대 당사자 운동 내부에서도 계급으로 나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만약 박권일이 계급문제가 본디 말하고자 했던 바였다면, 더 이상 88만원 세대냐 실크세대냐를 놓고 다툴 것이 아니라, 세대론을 버리고 계급론으로 담론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세대론을 계급론으로 비틀고 있는 것은 박권일 자신이며, 오히려 우석훈은 일관적 태도를 갖는다.


범죄자 얼굴 공개에 대한 얄팍한 견해

토요일, 1월 31st, 2009

* 주의 : 대충 생각해 본 견해, 그냥 생각의 얼개. 영감과도 같은 아이디어 일뿐이니, 사실이리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 이 영감을 보다 심화시켜서 개별연구 논문이나 써볼까? 싶은 생각이 약간 들긴 하지만…. 게으르고 귀찮아서 원….

얼핏 듣기로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곳은 미국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음. 현재 연쇄살인범 사건으로 인해, 살인범의 얼굴 공개에 대해서 찬반 논쟁이 심하게 일고 있는 것 같음. 국내 메이저 언론 몇 곳은 벌써 범죄자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한 상태. 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한 제도적 논의는 뒤로하고라도, 언론사의 이윤을 위한 자극적 기삿거리로 신상 공개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뭐 어쨌든,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어떠한 전제들과 정서, 문화를 깔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

범죄자 얼굴 공개 자체가 일종의 징벌적 의미로 접근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범죄자 얼굴 공개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중 하나가, 그 징벌의 감정으로 접근되고 있는데, 만약 범죄자 얼굴 공개가 이 같은 정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면, 범죄자 인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는 쉽게 예상할 수 있음.

얄팍한 견해로는 미국과 유럽지역의 문화적 인식적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나 하는 가설을 생각해 볼 뿐임. 내 얄팍한 지식으로는, 미국의 경우 총기소유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총기협회의 금전적 이유와는 별개로, 아메리카 대륙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넘어오면서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킨다.”는 인식적 전제를 깔고 있음. 미국 국민들이 타 국가들과는 달리 강하게 가지고 있는 ‘저항권’에 관한 인식도 이것이 단초,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므로, 국가 따위는 시민이 충분히 엎어버릴 수 있다.”는 배짱이 이런 느낌은 아닐까?

국가에 대한 권리의식은 책임의식으로 연결되고, 결국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는 결론. 어쩌면 보기 든든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몸은 결국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는 냉혹한 논리.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흉악한 범죄자이니, 시민들의 입장에서 미리미리 조심하라는 말. 이것은 단순히 범죄자 인권에 관한 논쟁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범죄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기도 하다는 생각. 조금 더 쉽게 말해 보자면,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시민들이 ‘알아서’ 대비하도록 하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범죄방지 책임을 시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음. 이 같은 논리를 편협하게 전개하면, 개인이 범죄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책임지는 형태…. 우리나라도 조만간에 총기소지를 합법화 하자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다면, 국가가 범죄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책임지는 경우를 또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음. 이 같은 논리구조는 ‘사회방위’의 논리, 인권문제를 이유로 폐지된 사회보호법의 부활?

결국 범죄에 대해 국가나 시민이 얼마만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에 대한 정도에 대한 논의. 하지만, 비교적 범죄발생률이 낮은 우리나라를 보건데, 시민들이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범죄가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지는 않음. 충격적 사건에 흥분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범죄자 얼굴 공개 보다는 다른 제도적 차원에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는 면면들이 있다고 생각함.


사라짐

목요일, 1월 29th, 2009

“소설가 박상륭선생의 표기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원래 표기는 ‘앓음다움’이다. ‘앓음’이란 알다시피 ‘육체적, 정신적 아픔, 혹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는 상태’이다. 그런고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아픔과 고난을 이겨낸 사람답다’는 뜻이된다. ‘아름다움’의 어원에 대한 다른 주장도 여럿있는데 대체로 좀 억지스러운 반면, ‘앎음다움’이란 표기는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진실로 아름다운 것들을 찾는데에 어떤 실마리를 던져준다.”_[생각도감]-21 아름다움에 대하여/김형태

요즘 계속 ‘삶’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아름다움의 알ㅎㅡㅁ다움이 떠오르면서 문자해체 글자놀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한번 긁적.

*

삶=사라짐?

해놓고 보니, 적멸지교(寂滅之敎)적인 느낌이 난다. 삶은 사라짐??


사물과 관계하는 방식

월요일, 1월 12th, 2009

그러나 존재자를 눈앞의 대상으로 지각하는 것이나 그것을 이론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과 관계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자들을 눈앞의 대상으로 지각하기 이전에 그것들을 사용하고 향유하는 것 같은 구체적인 삶의 행위에서 그것들은 이미 드러나 있다. _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파주: 동녘, 2004), 87.


블로그 설정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토요일, 1월 10th, 2009

사실 조금 조금씩의 스킨 수정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블로그의 주소를 바꾸었습니다. http://deokkyu.net 으로 설정되어 있던 텍스트 큐브 설정을 http://deokkyu.net/blog 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유인 즉슨, 티스토리를 통해서 이용하던 스크랩 로그가 타 사이트로 이동 이유 때문에 약관 위반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서브 블로그를 설정해서 스크랩 로그로 사용하고자 했는데, 여러 블로그 설정을 위해서는 블로그 주소를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저작권이나, 전자 매체 낭비 등의 이유로, 하이퍼링크를 권하는데,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데드링크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퍼링크를 통해 갈무리한 방문자들을 배려하기 위함입니다. 계속해서 데드링크를 발생시킨다면, 하이퍼링크를 더 이상 권할 정당성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이 같은 평소 생각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된 데드링크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존에 http://deokkyu.net 으로 연결되어 있던 하이퍼링크 문서들은 주소 부분만 http://deokkyu.net/blog 로 바꾸면, 여전히 이용 가능하십니다. 앞으로는 데드링크를 발생시키지 않겠습니다.


김기덕,<시간> (2006).

수요일, 1월 7th, 2009

1. 지식이나 질문은 어쩌면, 그 이면에 상처를 갖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조건 유무에 대한 질문 또한, 그 질문을 필요로 하는 상처를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랑이 이유 없을 때, 우리는 그 이유 없는 사랑의 크기만큼이나, 그 사랑이 이유 없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고, 그 사랑에 이유가 있을 때, 그 사랑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상실되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불안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종종 조건 없는 사랑을 미화하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 조건 없는 사랑이 은혜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이 조건이 없어서 뿐만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신의 영속성이 또한 담보되기 때문이다.

2. 김기덕의 <시간>은 인간의 사랑을 조건 있는 사랑으로 규정짓고 그것을 획득하려 노력하는 인간들의 비극을, 또는 조건 없는 사랑을 끝내는 상대방에게 인지시켜 줄 수 없는 인간들의 비극을 그려내는 듯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인지 가능한 조건은 얼굴이나 몸으로 상징되며, 그 인지가능성은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사회적 정체성의 문제는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과거, 즉, <시간>과 연관된다.

3. 새희(성현아 역)가 얼굴을 바꾼 이유는 똑같은 자신의 얼굴을 지우(하정우)가 지겨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새희는 ‘새로움’을 사랑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 ‘새로움’이라는 조건은 견고한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이다. 예쁜 얼굴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고정된 특성으로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역동하는 ‘새로움’이 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성형외과가 나오고 그에 대한 비극을 다룬다는 점 하나만으로 이 영화가 단순히 플라스틱 신드롬만을 다룬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

“얼굴을 바꾸면 더 오래 지우씨와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런데 지우씨가 과거를 여자를 잊지 못해서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새희는 세희를 세희라 칭하지 않고, 과거라고 칭한다.

4. 그런데 이러한 ‘새로움’이라는 조건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지우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아니, 지우가 과거를 잊었다 하더라도 새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지우의 말대로 ‘세희’는 ‘새희’이기 때문에, 잊혀진 세희로서의 고통을 관객들에게 토로한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네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라는 방백은 새희라는 인물 속에 남아있는 세희라는 분열된 자아가 토로하는 고통이다. 또한, ‘새로움’이 곧 사라지게 될 새희가 얼마간의 시간 이후에 또한 토로하게 될 고통이기도 하다. 새희는 세희이지만, 세희가 아닌 분열상황인데, 새희는 세희가 잊혀지길 바라지만, 새희는 곧 세희이기 때문에 잊혀지길 바라지 않는다. 때문에 새희는 세희로서 지우의 사랑을 다시 확인해 보고자, 세희의 이름으로 지우에게 쪽지를 보내게 되고, 과거를 잊지 못하는 지우 앞에서 결국 가면으로 자기 정체성이 통일된 상태로 지우 앞에 나서고자 하지만, 세희와 새희를 동일인물로 여기고자 하는 지우의 시각을 견뎌내지는 못한다.

5.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바꾸고자 한다. 이것은 간혹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되돌리고자 하는 욕망이나,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자 하는 도피욕구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욕망은 ‘자신을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한 형태가 영화 속 정우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정우는 새희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비록 사진이 없어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이 상당히 잘 생겼었다고 말한다.

*

등장인물이 얼굴을 가린 채 혹은 얼굴을 가리는 장면, 자기부정의 욕망,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부정의 쾌감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정우는 사회적 자아의 개변을 의미하는 인물이다. 정우는 새희의 일부분이고 어떤 해석이기도 한데, 새희의 얼굴고침이 단순히 새로움에 대한 추구뿐만이 아니라, 식어버린 사랑과 지우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의 개변이 또 한 가지의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정우는 지우를 찾는 새희 앞에 나타나서 “누구인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새희는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6. 분석과 총체

* * *

잡지 찍찍 잘라 붙인 저 얼굴이 성현아의 웃는 얼굴이기도 하고, 미쳐버린 얼굴이기도 하다는 것. 그 얼굴의 정체, 사랑의 정체, 사람의 정체는 저러하다는 것. 사랑의 조건을 분석해서 찍찍 아름답게 잘라 붙여 봤자, 성형하기 전에 눈-코-입 잘라 붙이는 기괴한 몽타쥬 밖에 안 된다는 것,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 해 보았자,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 눈-코-입 잘라 붙이는 행위를 시작하게 된 자체가, 눈-코-입 잘려지듯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돌이키려 해 보았자 그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득템인줄 알았던 날

화요일, 1월 6th, 2009

팔자에도 없는 TA질을 하고 있는데, 앞서 거쳐간 TA들이 책장을 조금 채워놓고 떠나간지라, 그저 그리 있으면 먼지만 쌓여 있겠다 싶어, 교수님께 여쭙고 치우기로 하였다.

*

▲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평전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었고, 나름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평전이다. 사실 교수님께 이 책장의 물건들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여쭐때, 가장 먼저 물어봤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사야 벌린은 사상사가 중에 사상가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2001년도에도 미다스 북스라는 출판사에서 새로이 나왔는데, 이 또한 절판이다.

나름 초특급 레어 득템이라고 생각하며 가슴 뿌듯하게 집으로 가져 왔다. 그런데, 두둥!!! 맨 마지막 장에 교수님 존함이 적혀 있다. 내일 다시 학교로 가져가, 자신의 소유물을 인지하지 못함으로 인해, 제자의 가슴을 설레게한 교수님께 책임을 물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