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2월, 2009

웹 서비스 몇개, 그리고 블로그 변화 몇개

토요일, 2월 28th, 2009

http://friendfeed.com/ 이라는 서비스는 Youtube, Flickr, Twitter, delicious, Last.fm 등등의 서비스를 한곳에 모아서 위젯도 만들 수 있고 그것들을 ATOM으로 발행시켜주는 서비스다. 인터넷에서 이용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한 페이지에 모아주기 때문에, 자신이 이용하는 서비스들을 모두 등록시켜 놓으면 이놈이 컴퓨터 할 때 무슨 짓을 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Logger가 된다.

현재 내 블로그 사이드바에 “최근 입력”란은 friendfeed에서 제공하는 widget을 이용해 놓았다. 방명록, 댓글, 트랙백, 유튜브, 본문을 friendfeed에 모두 모아 놓았기 때문에 어떤 입력이든지 순서대로 정렬된다.

http://xfruits.com/ 라는 웹 서비스는 여러개의 RSS를 하나의 RSS로 통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야후 파이프도 이 같은 기능이 있다.) RSS를 메일로 발송하기도 하고, 또 그 역으로도 가능하고 RSS온 문서를 블로그 API를 이용해 자동으로 포스팅도 가능하게 해준다. 또, RSS를 PDF파일로 만들어 주기도 하는데, 뭐 이것 외에도 다양한 서비스가 있으니 참고해 보시길. (현재 deokkyu.net 문서들을 RSS 자동 포스팅 기능을 이용하여 이글루로 연결해 보았다. 텍스트큐브와 티스토리는 현재 블로그api 기능이 일부 오류가 있는 것 같아 이글루로 연결했다. [이글루] 이글루에는 트랙백과 덧글은 막아 두었다. 이글루는 그냥 저장소로 이용될 듯.)

현재 xfrtuits를 이용해서 평소에 사진을 올리는 fotobada의 RSS를 받아 Blogger.com 에 자동 포스팅 되도록 연결해 두었다. 사진 블로그 주소는 http://fotologger.deokkyu.net/. Blogger.com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이는 DNSEVER에서 CNAME을 설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도메인도 쉽게 연결 가능하다. 다만 트랙백 기능이 없는 단점이 있다. 이 fotologger 도 friendfeed 에 추가해 두었다. (그래서 사진을 포토바다에 올리면 그것을 RSS를 이용해 xfruits가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확인한 것들을 E-mail을 이용해서 Blogger.com 블로그로 포스팅한다. 그럼 그 블로그의 ATOM 서비스는 friendfeed로 알려주고 friendfeed의 위젯은 “최근 입력”을 통해서 보여준다. – 아따 복잡네.)

RSS 기능은 참 편리하다. 이게 정확하게 표준화 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블로그 API 와 E-mail, RSS 서비스 등을 잘 이용하면, 연쇄적으로 돌아가는 웹의 세계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지금은 산만하게 흩어 놓았지만, API 기능이 온전히 돌아가면 조금 집중시켜볼 예정이다.


야경

금요일, 2월 27th, 2009
야경야경야경야경야경

요즘 저녁 10시에서 12시 사이에 집을 나가 줄넘기와 달리기를 하고 있다. 자세가 점점 잡혀가는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도 줄넘기 천개 정도는 쉬엄쉬엄 금방 해버린다.

오늘은 야경을 좀 찍어 봤다. 주로 우리 집 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와 줄넘기를 하는데, 그렇게 달리면서 초등학교 주변의 빽빽한 건물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인간 스스로를 구속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가파른 언덕, 차가 들어오기 어려운 곳에서나 우리는 마음껏 달릴 수 있다.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금요일, 2월 27th, 2009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833743

알라딘에 들렀더니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라는 책이 신간으로 나와있다. 지난번에 학교에 강의 왔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도 공저자로 이름이 올라있다. 얼마 전에 김기협의 뉴라이트 비판 서평을 올렸었는데, 뉴라이트에 대한 내 입장이 정해진 지금에 별로 읽을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블로그를 블로그 그 자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목요일, 2월 26th, 2009

블로그스피에서 일어나는 논쟁들을 잘 살펴보면, 블로그라는 도구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부여한 결과이거나 블로거로서 과잉된 자의식의 부산물인 경우가 많다. 최근 테터앤미디어와 관련된 물품 리뷰관련 논쟁들도 블로거들의 자의식 과잉으로 블로그라는 도구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케팅 도구로 이용되는 것에 반발하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떡이떡이와 김도연 사장의 논쟁이라는 것도 블로그의 포스팅이 기사로 인정되는 정도의 신뢰도를 갖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 또한 겹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인터넷 매체에 무조건적인 신뢰도를 요구할 수 있을까? 개별 매체 하나하나의 파급력을 놓고 구체적으로 살펴본 뒤 그 파급력에 비례하는 책임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지우고자 하는 욕구가 파급력을 과대포장하게 하기도 하는데…. 좀 대게는 쓸데없는 논쟁들이 많은 것 같다.


크롬에서 딜리셔스 북마킹 하기

수요일, 2월 25th, 2009

http://choonn.tistory.com/221

정말 멋진 정보다. 어쩌다가 컴퓨터가 2대가 되어 버려서 딜리셔스를 이용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브라우징은 크롬으로 하고 있는데, 검색을 하다가 정말 좋은 정보를 발견했다.


자기비판한 -88만원 세대론-

월요일, 2월 23rd, 2009

좀 뒷북 -

자기비판한 ‘88만원 세대론’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36868.html


사회를 ‘세대’로 나누어 보겠다는 시각 그것 자체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다. 박권일씨 말대로 ‘선전 팜플렛’ 용도였다면, 더 이상 그것이 우리 사회를 설명해 내는 데에 학문적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고 버려야 할 것은 아닐까. 88만원 세대론은 대화를 이끌어 냈다는 그것 자체에서 만족해야 한다.

한윤형도 그의 블로그에서 변희재를 비판하면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포스팅을 쓰긴 했는데[1, 2], 88만원 세대에서 말한 내용이라기보다, 한윤형 자신의 의미부여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런데 기사 내용에서 조금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박씨의 이런 비판은 불평등연구회에 소속된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과)의 지적과 맥을 같이한다. 한 교수는 “88만원 세대론은 사회적 불평등을 세대간 문제로 협애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며 “결과적으로 ‘젊은 세대가 단결해 기득권 386세대와 싸우라’는 우파 논리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쉽다”고 꼬집은 바 있다.

내가 읽기로는 한준 연세대 교수가 지적한 바는 세대론 자체가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협애화 했다는 지적이고, 박권일이 주장한 바는 세대론을 통해서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 하고자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가 ‘맥’을 같이 한다고?


계급에 입각한 경제분석의 의의 – EM

금요일, 2월 20th, 2009

계급에 입각한 경제분석의 의의 http://blog.jinbo.net/ethereal/?pid=516


야자 빡쉐이~

화요일, 2월 17th, 2009

아이돌 이야기를 하다가 카라 이야기를 잠깐 했다. 카라 하니까 "학교 빡쉐이~"가 생각났다. 언제 스타킹을 보다가 카라의 Rock U를 개사해서 부르는 대학생이 잠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UCC는 야자 빡쉐이다. 아 조낸 웃기네 ㅡ;;

그들의 두꺼운 지지거림에 나는 숨이 넘어가는 듯 하였다.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파주: 동녘, 2004)

화요일, 2월 17th, 2009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지음/동녘

I. 들어가며

  저자는 “모든 철학은 인간의 삶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 한 모든 철학은 자신의 시대와의 대결이다.”1)라고 책을 시작한다. 이런 시각에 기초하여 하이데거 역시 그의 철학이 그의 삶에 뿌리박고 있는 한에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과 생애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2)3) 저자는 하이데거의 철학 또한 하이데거가 살았던 시대와의 ‘대결’로 규정함으로써 하이데거가 대항 했던 사상적·시대적 전선을 보다 명확히 표현해 내고 있다.

II. 데카르트의 자연관과 플라톤의 존재이해

  하이데거가 살았고 하이데거 자신이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시대는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기술문명과의 사상적 대결이다.4) 저자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전선 중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이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규정한 것도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이 착취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대항적 맥락에서 나온 규정이다.

  먼저 과학기술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와 종래 플라톤류의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반성작업을 언급한다. 데카르트의 자연관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는’ 연장적 사물〔res extensa〕로서5) 보는데, 이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을 분리하고, 그 둘 사이에 공통점은 없는 것으로 본다. 데카르트 자신은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철학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을 적합한 모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인식(표방하는 새로운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것이다.”6)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근대가 진행되면서 세계를 계산 가능한 에너지들의 연관체계로 보는 자연관으로 심화되었으며7), 인간 자신도 자연에 속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인간마저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계산 가능한 에너지’로 규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8)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대상화하고 에너지를 뽑아낼 객체로 보게 된다. 이 같은 데카르트의 자연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이해마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주의적인 이성관에서는 데카르트적 자연관을 전제로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그 작용법칙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능력으로 이성을 규정한다. 하이데거는 이 같은 이성관이 데카르트를 비롯한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자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구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인간이 지각하거나 이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왔다.9) 이러한 존재 이해는 우리가 언제든지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존재자를 간주한다.10)

III. 쇼비니즘과 자유민주주의국가에 대한 비관

  하이데거가 살았던 당시의 독일은 바이마르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경제공황과 1차 대전의 패배에 따른 연합국의 배상요구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11)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적인 바이마르 정권이 이 같은 난국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이데거 또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특별하게 우려한 것은 바이마르 정권의 무능으로 볼셰비즘과 같은 극좌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염려하였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주의와 서구 전통 형이상학이 그러한 것처럼, 볼셰비즘 역시 모든 사물을 기술적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전체주의의 전형으로 보았다. 자연 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를 국력 증대를 위한 총동원 체제로 보았다.12) 하지만, 자유주의적인 바이마르 체제 역시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볼셰비즘과 다를 바가 없는 체제였다. 자유민주주의적인 바이마르 체제가 말하는 자유라는 것 또한, 마르크스가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13)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하고 실질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금권 지배를 강화하는 바이마르 체제는 미국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보았다. 하이데거는 러시아의 볼셰비즘과 미국의 자본주의 양자 모두를 ‘모든 존재자를 계산 가능하고 얼마든지 착취될 수 있는 에너지로 환원하려는 광기와 물질 만능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들로 보았다. 그리고 독일민족과 유럽이 이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14)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나치 운동’에 희망을 걸었다. 히틀러는 나치운동을 시작하는 당시에는 반유태인 정서와 세계정복의 야심을 숨긴 체 기술문명과 도시문명, 대부르주아 세력을 배격하고 농촌과 농민들의 정신을 이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기술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농촌의 삶을 강조한 하이데거15)는 자신의 사상과 나치즘의 이념에서 사상적 유사성까지 발견하였다. 특히나 히틀러는 1933년 5월의 ‘평화연설’에서 “민족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사랑과 충성은 다른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다.”라고 말하였을 때, 하이데거는 물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마저도 히틀러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16)

  하이데거는 이렇게 ‘나치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하이데거는 대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에 참여하도록 하고, 대학의 문턱을 낮추고 노동자들에게 배울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더불어 맹목적인 학문의 자유보다 조국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하이데거의 총장 취임 연설17)과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18)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이데거는 나치당의 인종 이데올로기와 제국주의 정책에는 찬동하지 않았으나 초기의 나치운동에 적극적인 하이데거의 태도는 많은 비판자들에 의해 나치와 동일시되었다. 이후, 나치당의 권력은 점차로 강해졌고, 나치당은 대학의 요직에 나치당과 가까운 사람들을 임명하도록 대학총장인 하이데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에 하이데거는 자신이 총장직을 사임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이데거는 비록 나치당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초기 나치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었다는 오명을 업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하이데거는 나치즘에 대해서도 반성적 작업을 행하게 되는데, 특히 니체와의 대결을 통해서 나치즘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하이데거는 나치즘 또한 기술적 전체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극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IV. 존재와 근본기분 그리고 망각과 회피

  하이데거가 지적한 플라톤의 전통 형이상학이 갖고 있던 존재에 대한 태도는 이제 정말로 그 태도에 대해서 물어보아야 한다. 전통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는 ‘명제’가 아니라, 명제나 질문이 물어지는 명제 발언자 혹은 질문자의 기분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하이데거 철학에서 ‘근본기분 〔Grundstimmung〕’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용어해설 부분을 보자.

  기분 Stimmng과 근본 기분 Grundstimmung

하이데거는 기분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심대한 의의를 드러낸 키에르케고르의 통찰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기분은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고립된 주체의 내면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엄습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를 개시하는 힘이다. 불안이라든가 깊은 권태와 같은 기분은 내가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면서, 나에게는 나 자신의 존재가 문제 된다는 사실을 개시한다. 기분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전체에 열려 있다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본능에 의해 제한된 환경세계에 사로잡힌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는 있어도 기분을 가질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분 중에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완전히 달리 드러내면서 우리를 결단에 직면케 하는 기분을 근본 기분이라고 하였다.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에 대한 이해가 보편적인 이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 반면에, 하이데거는 우리 각자가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이러한 근본 기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_ 책, 280. (밑줄은 필자)

  하이데거는 우리의 모든 이해는 ‘기분지어진 이해’라고 말한다.19) 본래, 그리스인들의 사유에서는 ‘경이’라는 근본기분으로 존재자들이 엄습해 오는데, 플라톤에서부터 존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언제든지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이데아로서 ‘망각’되어 가고 있었으며, 데카르트는 ‘회의’라는 근본기분을 바탕하고 철학적 물음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20)

  여기에서 한 가지 강조해야 할 점은 하이데거는 존재의 대상적 성격뿐만이 아니라, 존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체적 성격 또한 보았다는 점이다. 과학은 존재자가 눈앞에 이미 드러나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가 개현되는 사건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존재자의 진리를 근원적으로 개시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이나 과학처럼 이미 드러난 존재자들을 실마리로 하여 파악된 그것들의 본질과 전체적인 질서로부터 존재자들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개현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진입해야만 한다. 이러한 진입을 통해서만 존재자들은 자신들을 근원적으로 드러낸다. 이에 반해 형이상학이나 과학이 탐구의 실마리로 삼는 눈앞의 존재자들은 존재자들의 근원적 개시가 퇴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개시를 위한 근본 전제가 되는 존재를 망각했다고 보며 이러한 망각이 극단에 이른 것이 현대의 과학기술이라고 보았다. 현대과학은 존재자의 개시를 위한 전제를 존재 자체의 개현에서 찾지 않고 인간이 기투하는 조작적인 가설에서 찾는다. _ 책, 281.

V. 예술과 철학의 관계

  과학주의적 입장에서 철학은 과학과 유사한 학문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은 예술과 유사성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철학을 역사적으로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가 근본기분을 통해서 개현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개념이 하이데거의 ‘존재 역운’이다.21)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역운을 우리가 흔히 영감〔Inspi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의 하이데거 특유의 해석으로 보는데,22) 하이데거는 진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표현들을 곳곳에서 드러낸다.23) 이렇게 보았을 때, 영감을 긍정하는 예술이야 말로, 진정 철학에 근접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를 작품 안에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24)

  이 책에서도 특별하게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빗대어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는 철학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저자 박찬국의 시각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저자는 『존재와 시간』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관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존재와 시간》은 각자적인 현존재가 갖는 본질적인 존재 구조를 분석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일반이 갖는 유형적인 특성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상실하고 어떻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지, 그리고 일상속의 자기의 본질은 무엇이고 진정한 자기는 무엇인지를 분석한 것이다. …(중략)…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라는 한 개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문학적인 형식을 취한 반면에, 하이데거는 각자적인 개인으로서의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존재 구조를 분석한 것이 다를 뿐이다. _책, 77. (밑줄은 필자)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창작과 감상에 대한 태도도 특기할 만하다.

  하이데거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 못지않게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존재의 진리를 생기하게 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작품을 보존하는 것〔Verwahren〕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작품이 개시하는 존재의 진리 안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을 주관적인 체험 안으로 끌어들이지도 않고 체험의 유발체로 만들지도 않으며,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진리에 진입하면서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다. _ 책, 239.

VI. 전쟁과 기술문명과의 관계

  하이데거가 살았던 시대는 전후의 독일이다.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적 검토는 과학기술문명과 전쟁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박찬국의 말하는 하이데거 사상의 의의 부분을 보자.

  기술문명은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전쟁은 해롭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전쟁과 과학기술문명의 급속한 발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하이데거와 같은 사상가는 양자 간에는 본질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둘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기술문명을 깊이 반성하기도 전에 단순히 전쟁만을 중단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_ 책, 276.

VII. 마치며

  아무래도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은 존재의 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며, 그 속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존재자에게 진리를 뱉어내라는 공격적 태도가 아니라, 존재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듣고 진리가 우리 앞에서 개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진리의 개현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하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신비주의적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합리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사유를 좁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를 가르고 그것의 불명확성을 비판하는 기준 자체가 합리주의자의 그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신비가 사라진 세상, 감사가 사라진 세상, 모든 것을 에너지로만 환원하는 세상, 하이데거가 안타까웠던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이데거가 보기에 지금은 또한 얼마나 안타까울까?


1) 책, 14.

2) “그러나 필자는 하이데거 사상의 형성에는 다른 여느 사상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가정환경이나 성장 배경, 그 시대의 사회적·정신적 상황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서 그의 삶에 대한 검토가 상당 부분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_책, 42.

3) 책, 39. 에서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시기별로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고 요약한다.

4) 책, 15.

5) 책, 28.

6) 책, 29.에서는 《데카르트 전집》6권, 질송(Etienne Gilson)판, 1925, 61쪽 이하.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를 재인용 하였다.

7) 책, 29-30.

8) 책, 31.

9) 책, 33.

10) 책, 33.

11) 책, 158.

12) 책, 158.

13) 책, 159.

14) 책, 160.

15) 책의 곳곳에서는 하이데거의 사상이 농촌이었던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와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책, 45.에서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에 대한 연가이자 찬가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하다. 하이데거는 황폐해져만 가는 기술문명에 대해서 자신의 고향 메스키르히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라고 말한다.

16) 책, 162.

17) 하이데거는 총장 취임 연설 ‘독일대학의 자기주장’에서 “그 동안 찬미되어온 ‘학문의 자유’는 대학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는 부정하는 자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라고 말함으로써 맹목적 자유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책, 164. 참고.

18) <노동봉사로의 호소>라는 글에서는 “그러한 봉사를 통해서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민족공동체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매일 분명하면서도 철저하게 경험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민족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강조한다. 이는 책, 164-165. 참고.

19) 책, 103.

20) 책, 214-216. 참고.

21) 책, 217-218. 참고.

22) 책, 218.

23) “우리가 사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우리에게 온다.” _ 책, 219. “그것이 내 안에서 사유한다. 나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 _ 책, 220. 같은 표현들이 그 단적인 예이다.

24) 책, 225.


김기협, 『뉴라이트 비판』(파주: 돌베개, 2009)

화요일, 2월 10th, 2009
뉴라이트 비판
김기협 지음/돌베개

I. 역사와 정치

『김기협의 역사에세이 – 뉴라이트 비판』이다.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정치적 작업에 역사 에세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그만큼 역사와 정치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또한, 애초에 정치운동이었던 뉴라이트가 역사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사회적 맥락과도 관련되어 있는 서적이다. 저자는 책의 맨 첫 페이지에 “과거사의 탐구는 아득한 옛날부터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띈 활동이었다.”라고 서술한다. 문자시대 이전부터 제정일치라는 정체(政體)가 등장하는 이유 또한 주술사의 행위가 그 부족이 공유하는 기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인상 깊다.

저자는 역사학의 정치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이 순전히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졌을 뿐이고, 학문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현실과 학문의 관계는 단순히 학문에서 현실로, 혹은 현실에서 학문으로 영향을 주는 단순히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다. 저자는 역사학의 발전 역시 정치적 필요로 촉발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니까, 뉴라이트의 역사관이 순전히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졌을 수도 있으며, 순전히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 이라 할지라도, 그것 또한 학문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문제인식을 갖는 부분은 어디일까? 다음을 보자.

뉴라이트 역사관의 부실은 뉴라이트 정책노선의 부실과 맞물린 것이다. 뒷받침하려는 정책 노선이 건실한 것이었다면 이처럼 부실한 결과를 얻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뉴라이트 역사관이 제대로 된 역사관인지 따져보는 작업은 뉴라이트 정책 노선이 제대로 된 것인지 따져보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지 않을 수 없다. _ 책, 8.

현 정권의 정책노선이 ‘부실’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일 뿐 아니라, 나아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기 때문이다. _ 책, 9.

이 같은 부분을 통해서, 뉴라이트의 정치적 측면, 역사적 측면에서 전방위적 비판이 행해지는 책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II. 뉴라이트와 우파적 개념들의 역사적 맥락

뉴라이트의 등장과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 또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 들이다.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이라는 것이 순수하고 명징한 개념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뉴라이트가 민족주의와 좌파를 등치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원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민족주의가 우파의 원동력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주의가 우파에게 있어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것은 뉴라이트가 자주 보이는 태도들인 친미, 친일, 신자유주의, 반공 이라는 개념들이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어떻게 의미연관이 되는지 역사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본인이 읽기에는 해방기의 미국이라는 변수가 이 개념들이 정치적으로 비슷하게 이용될 수 있게 하는데 큰 요소였던 것 같다.

미국은 일본과 피터지게 싸웠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자 일본 제국의 반공 전통을 요긴하게 여기는 입장이 되었다.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등 일본의 개조를 최소한으로 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국에도 일본의 통치 체제를 최대한 되살려내는 것이 미국의 기본 방침이었다. _ 책, 86.

소련과 대치되는 미국의 반공정책은 일본의 그것과 결합되어, 소위 ‘역사청산’이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친일 청산 요구는 반공의 정신을 유지시키는 그것에 대한 대항이었으며, 좌파와 빨갱이와 민족주의는 등치되는 의미로 우파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III. 주류 역사학계에 대한 비판

이 책은 뉴라이트의 역사관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판하지만, 주류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편향성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한다.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그들이 어떤 역사관을 펼치는 지와는 별개로 민족주의적 편향성에 대한 비판의식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 저자가 비유하기에 한국은 일제수탈의 “유·소년기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해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 상태이다. 저자는 일제를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인간으로”이해해야 우리의 눈길도 안정을 얻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무엇보다 인간이 오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비록 비판지점은 수탈론을 지지하는 주류 역사학계이겠지만, 누구라도 생각해 볼만 하다.

수탈론을 지지해온 연구와 논설 중에는 지적 나태를 보여주는 것이 많다. 민족의 피해를 따지는 데 다소 과장하는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의로운 오류’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무비판적 분위기가 언론계만이 아니라 학계에까지 만연해 있었다.

인간이란 원래 오류를 저지르는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오류는 도움을 줄 대상이지, 처단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오류’는 용서해서 안 된다. 정의란 주관적 가치관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이것으로 객관적 사실을 재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질 나쁜 폭력이다. 파시즘의 길을 여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오류’는 정의 자체를 망가뜨린다. 오류를 품은 정의는 활인活人의 칼이 아닌 살인의 칼이다. 살인의 칼이 당장은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두려움에 몰아넣을지 몰라도, 정의의 의미에 조그만 흠이라도 드러나는 순간 진정한 날카로움을 잃고 자신을 공격할 새로운 정의를 불러내게 된다. _ 책, 147.

IV. 역사학계에 대한 대안제시지점

기존의 트라우마에 휩싸인 역사학을 구제하려면 어떠한 방식을 사용해야 할까? 저자가 보기에 뉴라이트의 강압적인 방법은 결코 아니다. 저자는 민족과 민족이 대립하는 우리와 같은 사례인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며, 절차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읽기에는 지속적인 연구와 꾸준한 대화가 그 구체적인 내용인 것 같다.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 보자. 평화를 지향하는 수정주의 역사관은 1980년대 들어 이스라엘 역사학계의 일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매국노, 반역자로 몰렸다. 그러나 학자적 양식과 지성인의 양심에 따라 이 방향 연구가 쌓이고 넓혀진 결과, 1990년경까지 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역사교육에 수정주의를 적용하는 작업이 1994년 시작되어 1999년 교육 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20년에 걸친 차분한 전진으로 역사교육의 새 원리를 안정시킨 것이다. _ 책, 197.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뿐만 아니라, 기존의 역사학계에게도 요구하는 태도가 있다. ‘진보’적 학자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뉴라이트 측에서는 근현대사와 관련해 학계 주류를 ‘좌파’라 몰아붙이지만 내가 보기에 학계 주류는 ‘수구 보수’다. 기존 민족주의 패러다임의 정상상태normal state를 유지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패러다임 전환을 심각하게 모색할 때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패러다임을 내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에 대한 진보적 학자들의 지적을 적어도 귀담아들을 필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가 ‘좌파’로 지목하는 이념성 강한 학자들을 ‘진보파’라 부르기도 하지만, 내가 여기서 ‘진보적’ 학자라 함은 이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노력을 가리킨다. 지금 상황에서는 ‘탈이념’을 학문적 진보성의 주된 지표로 보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정치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민족주의의 관철에 정치적 진보성의 의미가 있지만, 학술과 사상에서는 민족주의 이후를 모색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_ 책, 153.

V. 마치며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에세이 묶음이다. 18개의 에세이를 구성한 책인데, 그 에세이들은 서로서로가 연관되어 있지만, 주제별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책 한권을 전체로 읽을 필요 없이 한 부분씩 잘라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버스에서 한 파트, 잠자기 전에 한 파트 읽으면, 쉽게 술술 읽힐 수 있는 쉬운 책이다.

무엇보다, 뉴라이트의 책『해방 전후사의 재인식』과 『대한민국 이야기』등을 저자가 직접 인용하며 조목조목 비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뉴라이트의 인간관 대미관 대북관 국가관 등등 여러 부분에서 조목조목 따지지만, 저자가 핵심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은 인간을 ‘이기적인 동물’로만 규정하는 뉴라이트의 인간관과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그들의 정책노선이다.

정치 이념은 역사관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_ 책, 206.

역사관이라면 역사의 일부분을 보는 눈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보는 눈이다. _ 책, 207.

역사관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인간관이다. _ 책, 207.

저자의 가장 근본적인 인식은 인간관을 기초로 하는 것 같다. 역사학 또한 인간에 대한 이해로 바라보고 정치는 역사관을 기본으로 하며, 그 역사관은 인간관이 기초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또한 신자유주의의 인간관에 대한 저항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