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3월, 2009

학교단상

일요일, 3월 29th, 2009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i3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예전보다 줄긴 했지만, 아직도 불필요한 접속이 많다. 학교는 여전하고, 또 새로운 논자들은 등장한다.

 

“대자보라도 붙여보고 그러던가.”

예전에 기독교대학 발전위원회에서 주최하여 학교 교수들이 순서대로 주제별 강연을 연 적이 있었다. 나는 그날 강연이 있는 줄도 몰랐고, 지나가다가 보니 우리 학부 교수가 마침 강연을 하고 있어 시간도 조금 여유롭고 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막바지에 들어가, 내용을 전부 듣지는 못했지만, 학우들의 질의응답 시간에 인상 깊은 대화가 있었다.

한 학우는 자신이 느끼는 학교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교수에게 깊은 좌절감을 토로했다. 당시에도 아마 학교의 비민주적 의사결정구조가 논의되었었던 듯싶은데, 교수의 대꾸는 이것이었다. “대자보라도 붙여보고 그러던가.”

 

한 논자의 주장

최근에 새로이 보이는 한 논자는 [지금 한동은 이렇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학교를 지극히 사랑하는 졸업생이 다시 우리학교에 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입니다.” 라는 대안제시를 했다.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문제인식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제시한 대안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논자의 주장이 타당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학생 차원에서의 대안이 되지 못하거나, 구체적으로 학우들이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말 밖에 안 된다. 이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논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또,

그런데, 앞서 말한 이 논자는 또 다시 글을 쓴다. 제목은 [푸념]. 그 글을 보면서, 왜, 나는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그저 하는 것 없이 좌절하는 모습이, 학생들의 힘으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졸업생에 의존하는 모습이. 마치 자구책을 세우기보다는 기부에만 의존하는 학교당국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이른 좌절

물론 학생차원에서 적극적인 대안 제시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정당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학교 대신에 학생이 자구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부당하다. 하지만, 정말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수준은 이것뿐인가?

좌절하기 이전에 내가 무엇을 해보았는지 물음을 던져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와 학생들은 너무 닮아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대신 싸워주는 로봇이 필요하다. 그들의 좌절은 너무 이르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서문

금요일, 3월 27th, 2009

책은 사두었지만 좀체 읽어내질 못하는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저, 강성위 옮김, 『서양철학사』(대구: 이문출판사, 2005). 서문만 반복적으로 읽어내고 있는데, 철학공부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서문 발췌 pdf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아고라여러분들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수요일, 3월 25th, 2009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403650&t__nil_agora=uptxt&nil_id=2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아고리언과 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오늘 24일부터 포털사이트인 다음 아고라에 참여하여 네티즌과 적극 대화하고 아고라에 상식을 유통시키고자 합니다.

아놔. 첫문장에서 빵터지네. 아 재미있어.


Closer

화요일, 3월 24th, 2009

closer poster

영화가 나왔을 때, 봤었는데, 이제는 기억도 안 나고, 노래만 남았다. 이게 2004년 작이었나? 이거 진짜 작품이었는데.


인문학 스터디 강연

화요일, 3월 24th, 2009

인문학 스터디 강연

일반심리학 책 한권 읽지 않고 지젝이나 라캉을 읽겠다고 설치는 것은 허튼 수작이다.

내 아들이 철학과 다닌다고 하면 친구들이 그런단다. “니체는 좀 읽어봤냐?” 그러면 우리 아들은 그런다. “플라톤부터 읽자.” 그러면 친구들이 그런다. “플라톤이 누군데?”

니체 굉장히 중요하지만, 니체는 원래 고대 그리스 비극은 연구한 고대 문헌학자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니체의 끄트머리에 있는 말들 몇 마디에 꽂혀서, 블로그에나 긁적거리고 있다. 정통적인 것에 대해서 고지식할 정도로 집착하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원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커다란 주제를 잡아라. 자유, 존재, 필연성 같은 무시무시한 주제에 대해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연구하라.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고 싶을 경우에는 빡세게 공부해야 한다. 일주일에 A4 2매 이상씩 써야 한다. 그러면 선생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칭찬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대를 가르쳐 주기 싫다는 것이다. 칭찬을 듣고 끝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서평을 내밀었다. “좀 더 도전적인 책을 골라서 써 보시오.” 라고 말했었다. 그럼 그걸 듣는 사람은 야단맞았다고 생각하고 실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르쳐 줄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날 바로 “무슨 책을 쓸까요?”라고 물어봐야 한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간극 때문에 인생이 망한다. 그 간극을 줄여야 한다. 이명박이 그런 것 아닌가? 이 간격을 좁히려면 자신을 괴롭히면서 욕을 먹을 각오하고 선생에게 도전하고 물어야 한다. 독학은 안 된다. 이상한 교과서 말고 정통적 교과서를 읽어라. 차근차근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인문학 공부를 해라. 영혼은 불멸한다. 다음 생에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는 생각으로 공부해라.


[세속적 인문주의]의 애매성과 불필요성

일요일, 3월 22nd, 2009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라는 책을 읽고 있다. 상당히 흥미롭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하기로 하고, 방금 눈에 들어온 부분이다. 아무래도 타인으로부터 “인본주의자”로 규정당한 경험 때문인 듯. 그 “잔치”님은 요즘 뭐하시나? 갑자기 궁금하네….

그렇지만 오늘날의 원리파 기독교도들이 즐겨 사용하는 <세속적 인문주의>는 애매하고도 쓸모없는 개념이다. 이 구절은 자칫 독자들에게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비록 무신론적이지는 않았어도 반종교적일 수는 있었다는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 쉽다.

  이러한 상상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실제로 16세기의 주역들은 양심에 비추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독단적 교리를 조롱한 『우신예찬』을 썼지만 카톨릭 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는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가 가장 존중한 친구 중 한명이기도 했다. 아마도 에라스무스로서는 루터의 개혁 열정이 막다른 골목까지 치닫지 않도록 그 독일인 친구를 설득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터에 대한 우호적 비판자였던 에라스무스는 문제를 자기들끼리 조용하게 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공적인 대결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가 몹시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설득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가 죽은 1530년대에 어린아이였던 몽테뉴도 비슷한 맥락에서 신학적 확실성에 대한 주장을 주제넘고 독단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몽테뉴 역시 독실한 카톨릭 신자를 자임했다. 더구나 그는 로마 방문 시에 교황의 알현을 청할 정도로 권위있는 신자였다. 이런 점에서 원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세속적 인무주의>는 착각에 불과하다. 15-16세기에 형성된 실생활에서의 인문주의는, 학문영역에서의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 문화 <내부의> 현상이었다. 실제로 인무주의자들은 종교개혁에 크게 이바지 했던바, 칼뱅처럼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로서 기여하기도 했지만 로마 카톨릭 체제 안에서 인문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_ 스티븐 툴민 지음, 이종흡 옮김,『코스모폴리스』(마산: 경남대학교출판부, 2008), 48-49.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세속적 인문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한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몽테뉴는 교황을 알현할 정도의 권위있는 신자였는데, “신학적 확실성”에 대한 주장을 비판했다는 것. 이 문단 이후에는 이러한 내부의 인문주의자들의 정직한 회의에 대해서 계속 서술한다.

함부로, 인본주의 낙인찍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세속적 학문 운운 따위도 다 개소리라는 교훈을 알려주는 주옥같은 문장이다.


김기덕, <비몽>, 2008.

토요일, 3월 21st, 2009

나는 김기덕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 그것이 비유하는 상징들에 붙들려, 플롯 자체를 무화시키는 해석을 하는 것이 영 껄끄럽다. 예술이라는 것은 가장 개별적인 것인데, 아무리 보편적 상징으로 해석 가능하다 하더라도, 혹은 보편적 상징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은 작자가 보편적인 것들을 얼마나 개별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흐름을 없애버리는 그런 해석은 올바른 것일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하나의 ‘꿈’으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정말 꿈과 실재의 구별이 없다면, 우리는 꿈마저도 실재처럼 해석해 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애초부터 우리는 꿈을 실재로 해석해 왔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실재에 가까운가, 꿈에 가까운가?

<비몽>은 꿈을 꾸는 남자와 그 남자의 꿈을 행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한 남자는 옛 애인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사랑하여 여자를 찾아가는 꿈을 꾸고, 한 여자는 옛 애인을 끔찍하게 증오하지만, 몽유병 때문에 매일 그 남자를 찾아간다. 그런데, ①그 여자의 행동은 한 남자가 꾸는 꿈의 내용이라는 것. ②그리고 그 남자의 옛 애인과 그 여자의 옛 애인은 현재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

*

▲ 4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장면, 영화에서는 4사람 각각의 위치가 뒤바뀌는 장면을 보인다.

신비의 지점은 첫 번째 설정, 즉 진과 란의 꿈과 몽유병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신비로운 설정 뒤에 잇따르는 보충 설정이 바로 서로의 옛 애인들이 현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개연성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다. 만약, 이처럼 뒤따르는 설정이 없다면, 꿈과 몽유병은 영화 내에서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로 남게 된다.

의사(장미희 역)가 란과 진은 하나라는 말을 하는 장면. 그것은 진과 란의 내면이 동일성을 지니는 것을 포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의 사랑과 란의 증오는 하나라는 것. 결국엔 그들의 감정이 상대를 파멸로 이끈다는 것.

4사람이 들판에서 각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장면들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진과 란은 과거를 회상하기도, 진은 옛 애인의 남자에게, 란은 옛 애인의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사 식으로 말하자면, 저 4사람은 모두가 한사람이다.


working class hero

금요일, 3월 20th, 2009

[Working Class Hero] John Lenon이 원곡인건가? Cyndi Lauper랑 bushman(ㅋㅋ)이 부른 것이 제일 귀에 꽂힌다.

As soon as your born they make you feel small
by giving you no time instead of it all
Till the pain is so big you feel nothing at all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They hurt you at home and they hit you at school
They hate you if you’re clever and despise a fool
Till you’re so fucking crazy you can’t follow their rules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When they’ve tortured and scared you for 20 odd years
Then they expect you to pick a career
When you can’t really function you’re so full of fear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Keep you doped with religon, sex and T.V.
And you think you’re so clever and classless and free
But you’re still fucking peasents as far as I can see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There’s room at the top I’m telling you still
But first you must learn how to smile as you kill
If you want to be like the folks on the hill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Yes , A 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
If you want to be a hero well just follow me
If you want to be a hero well just follow me


텍스트큐브와 워드프레스간의 소통

목요일, 3월 19th, 2009

http://ani2life.com/

A2님의 워드프레스 블로그. A2님은 텍스트큐브와 티스토리의 백업자료를 워드프레스로 가져갈 수 있는 툴을 개발하셨고, 텍스트큐브와 티스토리의 댓글알리미 기능을 워드프레스에서도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플러그인을 만드셨다.

워드프레스 이용자들은 참으로 편리한 이런 툴을 사용해 주신다면, 텍스트큐브 이용자들도 덩달아 편리할텐데~.


『당신들의 천국』단상

목요일, 3월 19th, 2009

상류층은 법, 중류층은 상식, 하류층은 연대. 각 계층의 투쟁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간혹 하는데, 그 분류 자체가 거칠고 대개는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것 그대로 삶의 형태 마다 알맞은 싸움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의 절정 부분.

  “그런데 참, 언제던가, 그 육지 사람들이 원장을 데려간다고 했을 때 말이야. 일이 결국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들이 원장을 원했을 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임자를 그만 놓아보내주는게 좋았을 걸 그랬어. 공연히 그때 원장을 붙들었지. 하지만 그땐 누가 용케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을 알 수가 있었나…… 그래, 이젠 때가 너무 뒤늦은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앞일을 분간하지 못했다는 건 아마 우리가 일찍이 주님의 참뜻을 깨닫지 못했거나 그것을 깨닫고도 그 뜻에 복종하고 따르기를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게야.”

  황장로는 짐짓 한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거듭거듭 원장의 주위를 맴돌았다.

  “참 묘한 일이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지어주시는 주님의 뜻을 그나마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항상 이 추하고 권세 없는 문둥이들뿐이었거든. 원장들은 한사코 그걸 알아차리려 하질 않는단 말씀야. 그게 화근이야. 그 벌써 20년 저쪽 시절의 일이지만, 그 주정수 원장 말씀이야. 그 사람 때도 그랬었지…….”

_ 이청준,『당신들의 천국』(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5), 273.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자의적 신앙이 투쟁양식이기도 하다. 아니, 자의적 신앙이 저들의 직관에 대한 표현양식이라고 해야 할까? 이상욱의 논리가 그들의 투쟁양식이 될 수 없고, 조원장의 권력, 명분이 그들의 투쟁양식이 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