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3월, 2009

『안티고네』단상

수요일, 3월 18th, 2009

『안티고네』에서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하데스의 법과 크레온왕의 명령은 대치되고 있는데,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크레온왕에게 하는 말 중에 하나.

하계(下界)의 신들께 속하는 시신을 장례도 치르지 않고,
매장도 하지 않은 채 욕보이며 이 지상에 붙들어 두고 있기 때문이오.
시신들에 대해서는 그대에게도, 상계(上界)의 신들께도 권한이 없으며,
그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들 신들께 폭행을 가하는 것이오.

『안티고네』, 1070행 -1073행.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영역주권 사상. 다신교적 전통은 각 신이 주관하는 각자의 영역에서의 각자의 질서를 형상화 하는 것에 더욱 강점을 지닌다.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나타나는 유형론의 유용성과 한계

토요일, 3월 14th, 2009
그리스도와 문화 (반양장)
헬무트 리처드 니버 지음, 홍병룡 옮김/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I.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회의하는 편이다. 잠깐 언급하고 가자면, 세계관에서 이야기 하는 용어들이 그것들을 구체적 사례에 적용하려고 할 경우 적용하는 자들의 자의에 달리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행해지는 방법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의 여러 종류들이 형성된 그 구체적 현실에서 떠나, 단순한 도식으로 남아버리기 때문에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본다.

『그리스도와 문화』1)라는 책 또한 기독교 사상을 형성한 사상가들이 어떤 구체적 현실에서 무엇과 싸우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않고, 그 사상가들에 대한 이해는 정말로 ‘도식적’ 차원에서만 소개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그저 기독교 사상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대략 소개하고 이후에 그들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소개하는 기독교 입문서 정도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같은 한계들은 유형론의 한계와도 맥이 닿아 있다. 이러한 유형론의 방법론에 대해서 저자는 머리말에서 소개하고 있으며, 어쩌면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책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저자는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는 유형론의 한계와 독자가 유형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유형론이라는 방법론은 비단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재미거리로 쉽게 접할 수 있는 혈액형이나 MBTI 등의 심리검사나 사회과학 분야에도 널리 쓰이고 있는데, 『그리스도와 문화』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와 문화가 관계맺는 유형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그것이 어떤 방법론에 근거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머리말 첫부분 종이 1장 정도의 분량이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유의하고 읽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II. 유형론의 대두

저자는 먼저 유형론적 방법을 사용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서술하는데, 그 이유는 발생론적 방법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발생론적 방법이란 “단 하나의 아이디어나 원칙이 어떤 개별적 현상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가정”2)하는 방법이다. 원칙의 성숙정도가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상을 볼 때에도 전기나 후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발달의 정도에 따라서 나눈다.

하지만, 이러한 발생론적 방법은 그 방법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하나의 아이디어나 원칙”이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 다른 요인이나, 또 다른 원리들이 한꺼번에 구현된 사례에 있어서는 그 방법이 부적절한 것이 되게 된다. 그래서 유형론적 방법이 대두되는데, “유형론이란 이처럼 많은 요소를 여러 가문으로 나누어 각각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론이다.”3)

발생론적 방법과 유형론적 방법의 이면에 드러나는 차이점은 발생론적의 경우 ‘하나’의 원칙이나 원리가 현상으로 발현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유형론적 방법은 그 원칙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일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유형론은 기독교의 여러 윤리들이 하나의 원리 하나의 원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발생론적 방법이 일원론적 설명방식이라면 유형론적 방법은 다원론적 설명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III. 유형론의 한계 : 경험성보다 합리성을 우선시 하라

저자는 유형론의 한계 또한 서술하고 있는데, 유형이란 정신적 구조물인 만큼 어떤 개체도 거기에 딱 들어맞지 않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대상의 이해를 위해서 이용되어야 한다고 서술한다. 우리가 유형론을 대할 때 취해야 할 태도는 “합리성을 경험성보다 우선시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데, 이러한 유형론은 철저하게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저자는 “양자간의 필연적 연개성을 진술하는 것으로 보면 안된다.”4), “유형론은 … 결정론을 주장하는게 아니다.”5) 라고 서술함으로써 일종의 경험론으로서의 유형론은 결국 합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IV. 유형론을 사용하는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비교적 명확한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서술한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가 관계 맺는 양식에 관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가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사상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유형적 분류들을 바탕으로 기독교 사상에 대한 큰 지도를 그린 후, 저자가 언급한 사상가들을 ‘합리성’의 눈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행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 니버의 이 같은 유형론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인터넷에서 쉬이 접하는 혈액형별 성격테스트 라거나, MBTI같은 성격유형론들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유형론과 동일한 유형론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도 동일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리처드 니버,『그리스도와 문화』(서울: IVP, 2007), 홍병룡-임성빈.

2) 책, 47.

3) 책, 48.

4) 책, 48.

5) 책, 49.


신영철 대법관 사태

목요일, 3월 12th, 2009

I. 신영철 대법관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정보는 오마이 뉴스1)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신영철 대법관은 2009년 2월 12일에 국회에서 임명에 동의함으로써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신영철 대법관은 대법관이 되기 이전에 서울중앙지법원장을 지냈는데, 그가 지법원장을 지내던 당시에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성행하였고, 그때 당시의 신영철 대법관은 그와 관련된 재판에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다.

법원조직법을 살펴보면 대법관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특정 세력에 의해 장악당하다 시피 한,2) 현재 상황에서는 대법관이라는 지위에 오르려면 어떠한 절차를 거치는지 더욱 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법원조직법 [시행 2007.12.27] [법률 제8794호, 2007.12.27, 일부개정]
제4편 법관
제41조 (법관의 임명)
①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③판사는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II. 공정한 재판이라는 이념

국민은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3) 이러한 법치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우리는 사법부를 두고 있으며, 사법부는 공정한 재판을 할 의무가 있다. 사법부는 독립이 보장된 법관4)에 의해서 구성되어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이유로 그 어떠한 이유로도 통제가 불가능하도록 할 경우 오히려 사법권의 독립이 추구하고자 하는 ‘공정한 재판’이라는 이념을 해할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가치는 법치주의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5)

III. 사법행정에 대해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논의에 있어서 신 대법관의 개입이 사법행정의 여지가 있다고 하는 의견들이 있어 이에 대해서 세세히 따져 볼 필요를 느낀다. 신 대법관의 행위가 사법‘행정’행위이므로 괜찮을 여지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행정행위와 사법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사법부도 행정청인 이유로 행정절차가 불가피하게 진행된다. 이러한 행정절차 또한 기타 행정각부의 행정절차와 별 다를 바 없으나, 사법부의 독립을 더욱 더 보장하기 위해 별도로 사법행정이라 부르며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법원조직법 [시행 2007.12.27] [법률 제8794호, 2007.12.27, 일부개정]
제19조 (법원행정처)
①사법행정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대법원에 법원행정처를 둔다.
②법원행정처는 법원의 인사·예산·회계·시설·통계·송무·등기·가족관계등록·공탁·집행관·법무사·법령조사 및 사법제도연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개정 1996.12.12, 2007.5.17>

그런데, 해당 조문에서는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바, 인사·예산·회계·시설·통계·송무·등기·가족관계등록·공탁·집행관·법무사·법령조사 및 사법제도연구에 관한 사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행정이라는 용어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되새길 때 유의깊게 봐야 할 것은 그것이 “사법”행위가 아니라, “행정”행위라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IV. 당연히 재판개입이지

현재 드러난 신 대법관의 전화, E-mail 발송, 훈계 등은 정상적인 사법절차에서 일탈한 행위이다. 원래 법원의 사법행위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기 때문에 3심까지의 거듭된 절차를 두고 있다. 신 대법관이 말하는 양형의 일관성이라는 것도, 거듭된 공정한 재판을 통해 그 과정에서 찾아질 일이지 신 대법관식의 외압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만약 정말로 양형의 일관성이 문제라면, 제각각인 법관들의 판결의 일관성은 여태껏 무엇으로 믿고 있었던 것일까?

신 대법관의 이 같은 행위는 우리의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이며 철저하게 규탄되어야 마땅하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 대법관의 행위는 명백히 정치행위이며, 정치판사라는 오명에 걸맞는 인물이다.


1) 신영철 대법관 임명동의… 국회 “사회적 약자에 관심”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67293

2) sadgagman님도 그의 podcast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해당 podcast (클릭)

3) 헌법 제 11조 1항.

4) 여기에서 독립이 보장된 법관이라는 말은, 법관으로 구성되기 이전에 독립성 있는 법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관이 외압을 받지 않을 독립성은 법관으로 구성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5) 소송의 주체는 법원, 검사, 피고인이 있다. 소송법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판사를 배제하여 공정한 제판을 할 수 있도록 제척, 기피, 회피 제도를 두고 있는데, 이는 법의 정신이 법관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뭐야 이거

화요일, 3월 10th, 2009

더 열 받는 건 기자도 똑같다는 식으로 내뱉는 댓글들. 진짜 정신 제대로 박힌 놈들인가??


저장매체의 변화

화요일, 3월 10th, 2009

인간의 기록매체가 영구적인 것으로 발전한다고 해서 자료가 영구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장매체는 인간이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도록 이미 발전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보다 더 편리한 저장매체를 욕구하고,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 새로운 제품이 개발되는 이유로, 계속해서 예전의 저장매체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더 이상 이용되지 않는 저장매체와 함께, 자료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베타와 플로피 디스켓, 이제 어디서 볼 수 있는가?

yuri poster

유리 VHS 파는 곳 (클릭)

유리… 보고 싶다능… 웹하드에서 유리 검색하면 뽀로로배우 유리만 나온다능…
그나마 인터넷에 파는건 VHS라능…

디지털 시대에도 그러한 문제는 여전하다. File format의 변화. 우리는 이제 pcx 이미지를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는 없고 DVD 플레이어만 있다. 유리야!!! 보고 식쿤화!!!


학사 졸업 논문

토요일, 3월 7th, 2009

컴퓨터도 자주 포맷하고 해서, 학사 졸업 논문 파일을 잃어버린 줄만 알았다. 컴퓨터 뒤지다가, 남아 있는 파일을 발견하였는데, 이게 학부에 최종으로 제출된 파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Psychopath

주제는 “싸이코패스에 대한 형사정책적 대응” 인데, 싸이코패스라는 정체불명의 환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 형사정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논해 본 논문이다. 결국 싸이코패스 범죄가 확대되면, 사회방위의 논리를 바탕으로 인권보장을 위해 폐지된 사회보호감호제도의 부활을 고려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로 결론을 내는 논문이다.

싸이코패스라는 병질규정 자체가 매우 불명확한 개념이고 자의적으로 가져다 쓴다는 느낌이 다분했지만, 결국 내가 이상심리를 전공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심리학 연구를 그저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흔히 ‘싸이코패스’하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살인마의 경우만을 생각하는데, ‘비범죄형 싸이코패스’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사람들하고 이야기 할 때, 아는 척하기 좋다.

개인적으로 ‘형사정책’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고찰하면서, 타 학문들과의 배치지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또한, 범죄자 인권과 관련하여 목적형주의 형벌관이 대게 범죄자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주장되는데, 목적형주의 형벌관이 보다 근본적이고 잔인한 인권탄압의 논리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점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형법의 근본적인 책임이론에 대해서도 논문을 적는 과정에서 세세히 검토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근본적인 논의라 논문을 쓴 후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을 삭제했었다.

다시 읽어보니, ①결국 개별 사안에 대한 논문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과 ②개념어로 슬쩍 언급해주면 법학 전공자들이 거의 다 알아 볼만 한 내용들이었기에 법학 내용의 핵심들은 다 빠져있는 논문이라, 차라리 싸이코패스라는 병질에 대한 대략적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자유학교

금요일, 3월 6th, 2009
*

▲ 활쏘기 묘기를 보고 있었다네.

자유학교에서 2009년 초에 경주를 다녀왔었음. 이제서야 클럽 가입이 어떻게 처리가 되어 당시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는데, 뭐 사진이 그다지 많지도 않고, 나는 별로 많이 나온 것도 없고 그렇던데, 교수님과 같이 찍힌 사진이 요거 있길래 하나 올려봄.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마음

금요일, 3월 6th, 2009

3월 4일 저녁 5시 버스를 타고 포항에 들렀음. 며칠 지내는 동안 지인들을 둘러보고, 생각지도 못하게 나를 만나고자 하는 한 괴짜(?)가 있어서 여러 이야기들을 하였는데, 그냥 한번 정리해 보기.


I. 패션좌파와 짝퉁좌파

허지웅이라는 이가 글을 쓰면서 자주 강조하고, 자신의 블로그 첫 화면으로 고정해 두고 하는 이야기가, 당위론만 가지고 있는 좌파들에 대한 경멸이다. 허지웅이 말하는 ‘패션이라도 좋다.’는 이야기는, 당위론만을 가지고 있지 않고, 비록 패션일지라도, 삶마저 그러한 당위론과 일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 이야기는 그런 자칭 ‘진짜 좌파’들을 위한 게 아니다. 나는 1등급 한우마냥 거들먹거리는 ‘진짜 좌파’들이 싫다. 더 이상 그런 자들을 위해 글 쓰지 않는다. 당위를 빼면 한줌 농담거리도 남지 않는 그들의 글에서 진보 고해성사를 한 뒤 다시 빤한 삶의 굴레로 기어 들어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허지웅이 말하는 “자칭 ‘진짜 좌파’”들은 글이나 말에서만 진보 고해성사를 한 뒤, 자신의 삶은 별반 달라질 것 없는 그런 좌파들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 “자칭 진짜 좌파”들은 결국 이론적 측면에서 선을 긋고 무엇이 더욱 진짜 같은 좌파이념인지를 설파하는 데에서 그 ‘진짜’의 의미를 찾을 뿐, 삶에서 ‘진짜’의 의미를 찾지는 않는다.

‘패션이라도 좋다.’라는 말은 살롱좌파, 강남좌파, 패션좌파 등의 단어들이 함의하는 부정적 의미들, 그런 단어들을 이용해서 비난하는 대상들과도 같은 비판지점을 지닌다. 살롱좌파, 강남좌파, 패션좌파들 모두 이념적 진보성과 비판적 정신들을 자신들을 치장하기 위해 이미지로 소비하는 것들에 대한 비난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어들이 대상을 비난하며 말하는 것들은 모두 말과 행동의 일치, 생각과 행동의 일치, 삶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II. 한동 학생정치 지형에서의 이미지 소비적 행태들

내가 생각하기로는 한동 학생정치 지형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성이나 언행들을 통해서 이 같은 좌파의 ‘지적인’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국제정치학회’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했던 학생정치적 행동들을 살펴보면, ‘지적인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고, 잃을 것이 없는 활동’들만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근래의 경우로 작년에 있었던 ‘뉴라이트 교과서’ 사태에서 취했던 행동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뉴라이트 교과서’에 대한 인식과 반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교과서에 대한 학술모임으로만 모여 있었고, 특강이 모두 마쳤음에도 그것을 정리하고 유영익 교수나 뉴라이트 교과서에 대한 입장발표를 하지 않았다.

작년 총학생회장이었던 이준철 학우에 대해서 등을 돌려버린 국제정치학회 회원들과 당시의 캠프원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사실 그들이 이준철의 신뢰를 저버린 총학생회 운영에 대해서 뒤에서나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들 중 누구하나 공공의 영역에서 당시 총학의 행위에 대해서 제대로 비판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지한 후보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당시 총학생회 집행부에 속해서 내부에서 싸웠던 인물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단지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 지적인 이미지를 한 번 더 획득했을 뿐이다. 결국 행동하지 않을 정도로만 비판적이라면 그것은 냉소일 뿐이고, 지적이게 보이고 싶은 욕망일 뿐이다.

III. 지적이면서 탐욕스러워 보이지 않을 정도의 부

인간의 이 같은 욕망이 비단 학교 내부에서 보이는 시니컬하며 지적인 인물집단의 문제만은 당연히 아니다. 주낙현 성공회 신부의 블로그에서 읽어볼 만한 글을 발견한다.

이른바 강남 대형 교회들이나 그 밖의 “중산층”을 선교 대상으로 한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천주교는 그동안 비판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개신교의 그것과 차별화되기도 해서 더 유효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짐짓 뻐기는 “중산층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와 천주교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_ http://viamedia.or.kr/2009/02/23/462

기독교의 성장 또한 ‘비판적이며 지적인 이미지’에 힘입은 바 크고, 천주교의 보수적인 실체나 천주교 정의사제 구현단이 사실은 종파에서 내어놓은 망나니 집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차지하고라도 정의사제 구현단의 행위들은 천주교의 이미지를 ‘비판적이며 지적인 이미지’로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은 김규항의 ‘교회’라는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 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 달만에 교회에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_ http://gyuhang.net/entry/교회

“중산층 욕망”, 386세대나, 좌파들이 그렇게 좌파가 아니라고 말하는 민주화세력들이 기반을 둔 욕망도 이 “중산층 욕망”이다. 한국사회 내에서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물론이거니와 교내 ‘잘난’ 학생들의 행동들에서도 이 “중산층 욕망”이 보인다. 잘나가는 학회인 ‘국제정치학회’의 흥함에는 “중산층 욕망”이 과연 작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그들이 그렇게 배우고 사회에 나가면 지금의 한국보다 나아지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이명박을 욕하고 미국 대통령을 논해도, 결국 학생시절에 이야기 했던 것들을 현실에서 삶으로 검증하는 인물은 없을 것 같다. 아니, 당장에 하는 이야기들을 삶으로 검증하는 인물은 없다. 이명박만 욕하면 누구나 정의로워지는 세태가 더욱더 이 “중산층 욕망”을 부추길 것이고, 이미지 좌파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유영익 교수

일요일, 3월 1st, 2009

유영익 교수가 오석관 3층에 오피스까지 차리셨다는데, 정확한 정황은 내가 알 길이 없고,

작년에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로 국제정치연구학회가 힘써준 덕에 학교가 잠시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지인들과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유영익 교수가 학교의 정교수로 올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사실 그냥 강의를 오는 것보다 나는 그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솔직히 ‘역사의식’이라는 게 제도권 역사교육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도권 역사교육만으로 형성되는 ‘역사의식’이라는 게 얼마나 유효할지도 의문이고…….

뭐 어쨌든, 교수임명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지도부의 입맛에 맞는 자들로 학교 구성원을 구성하는 정치적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유영익 교수가 강의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보다 사실 그게 더 현실적으로 골 때리는 문제다.

근처의 교수님께도 살짝 여쭈어 보았었는데,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뭐 그래도 오피스 내어주고 하는걸 보니 엄청난 우대를 해주는 것 같다.

힘 있는 자들이랑 싸울 때는 정말 결단이 빨라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말로하고, 정말 싸워야 하는 건지 고민할 때, 그들은 그냥 해버린다. 그리고 끝난다. 설마 설마 하다가 설마가 정말이 되고, 결단을 일찍 내려도 그들은 유들유들하게 내뺄 뿐이다. 돌이켜보면 힘 있는 자들의 어떤 행위를 저지하려면 빠른 결단과 많은 시간, 노력이 들어도, 순간을 놓치면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변화는 정말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