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5월, 2009

신교수

토요일, 5월 30th, 2009

우리학교 어느 학부에 신 교수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글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꽤나 격렬한 측면이 있다. 얼마 전에 지인의 미니홈피에 들어갔다가, 그의 격렬한 글을 보았다. 황석영과 관련된 글이었던 것 같은데, 변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 교수는 변절에 대한 주제로 몇 번을 글을 쓴 것 같다. 비슷한 주제로 친구들이 스크랩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쉽게 써버리는 미니홈피의 성격 탓인지, 예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레퍼토리였다.

그의 글을 보자면, 현실에 엄청 투철하게 분노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글 자체는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변절하면 제자들이 자신의 방문에 못 박으라는 요구까지 서슴없이 한다. 나중에 변절하면 방문에 못 박으라는 말은, 지금 자신은 못박을 정도는 아니라는 자뻑성 평가를 전제하고 있으리라.

내가 아는 한 그가 철저하게 분노했던 경우는 제자들 혼낼 때 밖에 없었다. 언론이 문제면 기존의 언론사에 들어가서 바꾸어야만 한다는 보수적 시각에서부터, 기득권의 행위는 ‘자신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다는 비겁한 시각을 가지신 분께서, 분노를 그런 식으로 소비하시는 것이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또 제자들은 그걸 보고 칭송하겠지.


학우 여러분들은 무엇에 분노하십니까?

금요일, 5월 29th, 2009

조갑제닷컴이나 보수 언론사에 우리학교 언론 타버렸다. 꼴통 총학생회장 덕분에, 민망스러워 링크는 따로 걸지 않겠다. 이 글을 읽어보시면 키워드는 쉽게 추려내실 수 있을 터이니. 학우들이 분노하길래 약간 방향조절용 찌질글. 인트라넷에 올린 글을 이곳에 옮겨둔다.


오늘도 분노할 거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 분노가 일시적인 감정분출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총학생회의 성명 발표와 일련의 사태들이 별로 새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도 “우리학교는 기독교학교니까 당연한거다. 싫으면 니가 떠나라.”는 댓글도 보이고, “우리학교는 기독교 학교니까 분향소 설치에 반대하는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댓글도 보입니다. 사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횡행하던 이야기들이 아니었나요. 저는 너무 많이 들어 그저 덤덤합니다.

대자보나 추모소 설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디서 튀어나온 ‘대자보를 붙이지 않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지배층의 이념에만 걸맞은 전통인지 자각하지 못한채,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미화되어 가르쳐 지겠죠. 그렇게 미화된 가르침을 받고 성장한 총학생회 집행부가 일반 학우의 대자보를 무단 철거하는 것은──지난번에 도서관 사석화 방지를 위한 운동을 했던 학우가 적은 i3 글에서 봤습니다. 찾아보셔요──어찌 보면, 배우고 때로 실천하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죠.

사실 박총명 학우의 성명서나 그에 동조하는 학우들이 많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는 쉽게 이해가 가능합니다. 목사들이나 특정 정치집단을 쉽게 욕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우리 학교는 어디 그들과 달랐습니까? 한기총 성명서에서는 쉽게 우리 총장님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었고, 우리학교 교수님들의 신앙관이 그런 분들과 어디 많이 달랐습니까? 아니, 오히려 이승만과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교수님이 계시고 또 그 교수 밑에서 감명 받으며 자라난 후배들이 실제로 있지 않습니까. 박총명 학우의 성명서에 함께 이름을 올린 학우들 중 GEA나 GLS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단지 영어로 적혀있기 때문인 걸까요.

학우 여러분들이 박총명이라는 개인 하나에만 관심을 쏟고, 그에게만 비난하는 것에 열을 올릴 때, 지금 이 순간에도 제2의 박총명은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잠잠합니다만, 어딘가에서 기회를 노리며 박총명 학우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우들이 아마도 많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뇌, 교육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뇌. 저는 그 힘이 너무나도 무섭고 절망스럽습니다.

학우 여러분들은 이번 사건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감히 당부드립니다만, 이곳에서 감정분출만 하실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구체적인 방향으로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깝게는 학우여러분들의 대의를 행사할 수 있는 학부대표를 찾아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멀게는 한동대학교 신앙교육에 대한 고민, 그리고 과연 저런 교수들이 학우들을 가르치는 것은 한동대학교에 이로운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 등. 하실 수 있는 일이 많으며 해내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노무현의 장례식이 그저 푸닥거리로 끝나기를 바라는 그 누군가들 처럼, 우리의 이 같은 원성도 그저 감정분출로 끝나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요.


노무현을 이용해야지

목요일, 5월 28th, 2009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도 며칠이 지났다. 애초부터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말은 노무현을 우상으로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엄숙주의’로 명명할 수 있는 그 정서가 노무현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정서는 망자에 대한 예의 앞에서, 그의 수단화를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것은 현실을 가린다. 노무현 죽음을 고귀하게 포장할수록 멀어지는 것은 현실이다. 서울시장이 ‘노무현의 고귀한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선 안 된다.’며 추모소를 철거할 때, 그는 정말 ‘고귀’한 죽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그를 그저 좋은 인물로 묘사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무현 죽음의 성격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보고 그 현실 속에서 저항하겠다는 의미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공권이 사권이 된 현실을 반영한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나 30원에 자살하는 노동자가 이와 무관할까. 때론 경제력으로 때론 공권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정권의 폭력성이 과연 죽창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그 노무현을 이용할 수 있을지 점점 회의가 밀려온다. 노무현의 죽음은 장례식 푸닥거리가 끝나면 모두 망각되어지듯. 그 죽음의 성격은 망각될 것만 같다. 그런 절망은 노무현을 우상화하는 빠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진영에서 느껴진다. 노무현의 죽음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 깽판이라도 쳐야 할 집단인 민주노총이 노무현을 추모하기 위해 파업을 미루기로 했단다. 그들의 투쟁방식이 그런 식이었나? 열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파업을 미루는 그러한 방식이었나?

노무현을 추모하는 이 사이에,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외롭게 투쟁하고, 한예종 학우들은 힘겹게 싸우고 있다. 이 ‘엄숙’이 나는 싫다.


세뇌와 공포

수요일, 5월 27th, 2009

얼마 전에 <박쥐>를 보고 글을 썼더니, <열녀의 탄생>저자 관련 인터뷰를 알려주시더라, 그 관련되어 던져졌던 질문이, 우리의 욕망들이 학습되지 아니한 욕망이 없으니 결국 그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과 관련하여 강유원 서평이 있다. 서평을 읽어보니, 850쪽에 달하는 책 내용은 모두 “모든 것은 조선을 지배했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릿 속에 주입할 텍스트를 편집과 조작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고 국가 기구를 통해 인쇄하여 의도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5백 년에 걸쳐 유포했다. 그 결과 그 텍스트들은 여성의 대뇌를 차지하고, 여성의 행동과 의식을 통제하게 되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들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모든 학습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강유원 서평에서 이야기 하는 ‘세뇌’와 같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것을 ‘텍스트’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니 갑작스레 ‘성경’ 이 떠오른다. 최근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계속되어 왔던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참으로 절망스럽다. 총학생회의 참으로 애도 섞인 성명에 강유원의 서평 끝머리가 너무 강렬하게 와 닿는다.

텍스트가 세뇌의 기능을 하고, 그 텍스트가 또한 ‘교양의 함양’이라는 자의적 판단에 휘둘릴 때,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읽으라는 권면을 할 수 있을까? 그 책에 세뇌된 스스로가 또 다른 인물을 세뇌하기 위한 권함은 아닌가. 그것은 또 어떤 권력에 봉사하는 것은 아닌가.

<열녀의 탄생>은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책은 어떻게 권해져야 하며 또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잠이나 자련다

화요일, 5월 26th, 2009

아마,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은 ‘장례만 끝나면 보자.’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인간적인 예의 갖추는 사이에, 북한 미사일 실험으로 덮어 보고자 하시더니, PSI까지 참여하신다. 이렇게, 일들을 만드시는 분들 앞에서는 ‘인간적 추모’의 그 짧은 순간마저, 길게 느껴질 뿐이다. 아니, 그 ‘인간적 추모’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 정치성에 앞서 ‘예의’를 강조함으로써 그 정치성을 감추고 은폐하는 권력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감상에의 강요일지도. 세상은 참 빨리 뜨겁고 또 빨리 식는다. 나는 잠이나 자련다.


노무현의 자살

일요일, 5월 24th, 2009

노무현 자살에 대한 해석은 한가지뿐이다. 그 구체적 심리적 증상에 대해서는 전문가마다 견해를 달리하지만, 그 증상의 원인은 그동안의 검찰 수사를 통한 정신적 스트레스이다. 이는 사자의 심리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받아들여지는 유서를 보았을 때도 명백하다.

사람들은 과연 그의 자살이 그 사람의 도덕성에 대한 부담 때문이기만 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지만, 종교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 원인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어제 내린 비가 노무현 자살의 원인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사태를 이해할 때, 자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노무현의 도덕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우선 한국사회의 정치 환경에 대해서 검토해 볼 수 있다. 노무현의 도덕성과 관련된 하나의 사실은, 당시에 기존의 정치권에 대한 도덕적 회의가 팽배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이 대통령 출마 당시 ‘차때기’등으로 대변되었던 정치권의 어떤 행태는 노무현이 ‘도덕성’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기존의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은 ‘도덕성’ 있는 지도자를 바라고 또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고, 노무현은 자신의 이미지를 ‘도덕성’으로 무장한다. 노무현 당선 이후, 별로 살 만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도덕성’이 먹고 사는데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정치인들을 평가할 때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노무현의 ‘도덕성’이라는 이미지가 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3가지 요소에서, 국민들의 요소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요소 그 무엇도 비난할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정치인을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과 스스로가 도덕적 정치인이고자 했던 노무현의 노력을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도덕적이었던 기존의 정치권과 정권 교체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끊임없이 노무현을 언론에 노출 시켰던 악의적 정권이 도덕성에 대한 검토에서 노무현 죽음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국민들의 과오 또한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바꿔야 할 짐을 노무현 홀로 감당하게 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사례만 하여도 그렇지 않은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혹은“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수준의 남 탓하고 그치는 정신승리가 되지 않으려면, 국민 개개인의 책임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우리의 무책임성에 대한 반성으로, 순수한 애도의 행렬조차 불법집회 운운하며 통제하려고 드는 정부에 대해 항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반성의 성격은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고뇌하는 그러한 형태가 아니라 광장에 촛불을 들고 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우리의 반성은 실천적이어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반성은 진정한 반성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노무현 죽음의 정치적 이용에 대해서 경계하는듯한 발언을 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죽음은 철저하게 정치적 의미를 지니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가장 엄숙한 추모이며 의지의 계승이다.


신상공개제도에 대한 검토

토요일, 5월 23rd, 2009

2009sinsanggonggae

사실 연구의 시작은 “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한 비교법적 고찰” 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미국의 법 말고는 딱히 비교할 자료가 없었다. 제목을 그대로 두기는 했는데, 교수님이 제목 바꾸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

그런데, 신상공개제도를 보면 볼 수록, 인권보호를 이유로 폐지된 사회보호법의 논리로 귀결 되는 듯 하다. 결국, 신상공개가 실질적으로 형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제도가 범죄자의 교육으로 결론 나는 걸 보면 말이다. 이를 보면서 든 생각은 결벽을 주장하면 보다 큰 반동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것. 결국 어울려 살려면 서로 서로 어느 정도의 침해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식인의 태생적 비겁함

금요일, 5월 22nd, 2009

[한겨레] 박노자 글방 :: 지식인의 “태생적 비겁함”?

박노자 블로그에 올라온 글인데, 보통은 그냥 딜리셔스로 북마크 하고 마는데, 좀 많이 공감 가는 편이라, 블로그로 옮겨옴.

이런 시각을 좀 가지고 있어야. 우상질을 안함. 그게 어디 우파적 우상질만 있나. 좌파적 우상질도 아~주 많지.


평화주의

목요일, 5월 21st, 2009

내가 본 평화주의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복잡하다거나 수준이 높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의 위대성은 ‘입’ 으로 말해질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낼 때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평화주의’를 말하는 자들은 ‘평화주의’의 그 앞에 ‘닥치고’가 붙는 듯 하다. 이름하여, “닥치고 평화주의”. 그들이 말하는 평화주의도 “닥치고” 평화주의인 한에는 폭력적 평화주의다. 평화주의도 때에 따라서는 충분히 폭력적일 수 있다.


해석

수요일, 5월 20th, 2009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등으로 인하여 식중독 환자 또는 그 의심이 있는 자를 발견한 집단급식소의 설치·운영자”

라는 조문을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 때문에 식중독 환자가 된 사람을 발견하거나 혹은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 때문에 식중독 같은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을 발견한 운영자는 신고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고

나의 해석은, 식중독증상이나 식중독 유사 증상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 때문인 것으로 의심되는 사실을 발견한 운영자는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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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건에 대한 엄격한 입증이야 당연한 것이고, 그 이전에 무엇이 요건이냐에 대한 것이 쟁점임. 좀 딴소리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저 조문 자체가 약간 비문의 기운이 느껴지는 문장인데, ──이건 법 해석이 아니라, 국어에 해당하는 부분인거임──“혹은” 이후의 부분을 약간 지워버리고 살살 풀어 보자면,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등으로 인하여 식중독환자를 발견한 집단급식소의 설치·운영자 라는 문장이 됨. 마치,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이라는 돋보기라도 이용해서 ‘식중독’환자를 발견하시는 것 같은 문장 ㅡㅡ;; 이런 이상한 문장이… 또한, 뒤의 문장을 동일한 방식으로 풀어보면 “의심이 있는자”라는 표현도 어색하긴 마찬가지. 그 환자가 의심을 한다는 것인지, 의심을 받는다는 것인지, 참으로 애매모호한 문장. “의심이 있는자”라는 표현은 마치, 환자의 내면에 ‘어떠한 의심’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잖아. 그러니, 해당 조문의 적용 주체가 집단급식소의 설치·운영자이므로, 설치·운영자에게 “의심이 되는자”로 바꾸는 것이 의미가 보다 명확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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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같은 신고는 식품등으로 인한 식중독(혹은 의심증세)의 인과관계와 질병까지 모두 확인한 이후에 신고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밥을 먹어서 아프다는 식의 인과관계──그 같은 식품등으로 인한 식중독을 확인하기 위한──역학조사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조문이기에, 행정청이 과태료처분을 내릴 때, “집단급식소에서 제공된 식품등으로 인한” 식중독인지 아닌지를 행정청이 입증해야할 책임은 없음. 즉, 요건이 아님.

사람들이 법을 왜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꼬여있는 법문. 그냥 문장이 비문임. 적는 내가 다 짜증나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