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6월, 2009

김미영 인터뷰

화요일, 6월 30th, 2009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99

1. “그대로 내보내면 인간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거 같아 첨삭했다.” 원래 가져갔던 문장은 어떤 내용이었을지 궁금하네.

2.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평가. 역사해석과 종교가 어떤 식으로 버무려 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역사가 학으로 정립하기 힘든 이유와 연관되려나. 역사와 그에 대한 해석, 사실 종교랑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결국 공유하는 전통 혹은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들. 그 역사 이전에 그것을 판단하는 가치라는 것이 있고.

3. 김미영 교수는 유영익 교수가 ‘실증사학’이 아니라는 걸 폭로하고 계시네. “류 교수님은 뉴라이트가 아니다. 건국과정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연구한 세계적인 이승만 연구가일 뿐이다.” 이게 어떻게 실증사학이야. 당시에 격렬한 호응을 받았던 글(아마 그렇게 호응 좋았던 글도 없었던 듯.)

4. “지성주의는 근본적인 죄를 망각했다.” 반지성주의와 신앙의 결합 케이스.

5. “농담 몇 마디를 두고 정직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하시는데, 그럼 농담 몇 마디를 두고 성추행이니 명예훼손이니 해서, 학생지도 하는 것은 유치하지 않구나. 아 그렇지. 미영씨가 하신 거 아니지.


악필

화요일, 6월 30th, 2009

나는 어릴적 부터 손목이 약했던지, 펜을 잡고 글 쓰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글이 엄청난 악필이라 여기저기서 말을 많이 듣는 편인데, 김훈이 연재 하는 곳을 가보니, 이런 사진을 찍어다 놓는다. 김훈이 쓴 원고지인데, 졸라 위안을 얻는다.


이명박 죽으면 떡 돌리겠스빈다

화요일, 6월 30th, 2009

트위터에서 이명박 죽으면 떡 돌린다는 말을 봤다. 이명박 죽으면 떡 돌린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거이구만. 민주주의의 근본이 다수결 원치기라공? 요런 분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살아도 사는게 아니여.


과학

토요일, 6월 27th, 2009

“자연과학은 엄밀한 수학적 법칙으로써 사태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라는 건, 예측력이 전무하다. 순수한 과학의 기준으로 볼 때, 이들은 그것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학부 수업 때에도 창조과학을 가르치던 교수는 ‘창조과학’을 단순한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차라리 이들에 대한 판단 준거는 신학이 되어야 할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논의가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창조과학 운운하는 이들은 과학의 개념부터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무신론적 ‘과학’이 무신론적이라고 해서 굳이 대립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그것 그대로의 설명력과 예측력으로 평가되면 될 것을.


토요일, 6월 27th, 2009

뭐, 배를린으로 ‘유배’되기나 바라는 소비자적 태도지향부터 고깝긴 했으나….

내가 혐오가 늘었나, 마이클 잭슨 죽음에 사탄음악 운운해서 보수적 기독교 까는 게 왜 이렇게 고까와 보이지. “십대시절. 마이클 잭슨을 정말 한번도 듣지 않고 살았다는 게 정말 그게 말이 되는일이었던가.” 나는 마이클 잭슨은 물론, 서태지 아저씨 테이프 한 장 사본 일이 없거든요. 조낸 계급감정 느껴지네. 비틀즈는 뭐고 조지 윈스턴은 뭐래냐. 난 언제부터 이렇게 ‘자칭 좌파’들이 싫어지게 된거지??

이거 차라리, 어떤 부러움의 한 종류인건가? 모르겠네.


알랭 바디우, [[윤리학]] 토막

토요일, 6월 27th, 2009

□ 지금은 그냥 대충 떠오르는 것들(그러니까 책과는 상관없는)만 토막으로 적어보자. 본격 내용정리는 조금 더 꼼꼼히 읽은 후에 하도록 한다. 그러니까, 자신있게 요렇게 읽어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내 안에서 정리되지는 않은 이야기들이라는 뜻. 또 쓰다보면 대충 정리되는 듯도 하니까. 그냥 시도.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이다. 프랑스에서 교수도 하고 그런 사람인 것 같다. 해제에도 나오는데 바디우가 직면하는 날것으로의 현실은 근래의 프랑스 정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듯하다.

책의 순서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서문 I. 인간은 존재하는가? II. 타자는 존재하는가? III. 윤리, 허무주의의 형상 IV. 진리들의 윤리학 V. 악의 문제 그리고 결론으로 이루어져있다.

책에서 ‘윤리’ 라고 기재한 부분과 윤리 라고 기재한 부분은 다른 부분이다. 알랭 바디우는 기존의 ‘윤리’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측면──보통 ‘이데올로기’라는 기술은 허위의식, 거짓된 것을 지칭할 때 쓰는 기술이다.──을 지적하고, 자신의 윤리를 이야기 한다. 책에서 작은따옴표로 묶어져서 지칭되는 윤리는 기존의 허구적 윤리를 지칭하는 것이고, 작은따옴표로 묶여지지 않은 윤리는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윤리이다.

인간은 존재하는가? 라는 첫 번째 장은, 주체를 상정하는 근대적 윤리의 허구성에 대한 서술이다. 근대는 주체를 시작으로 사유를 전개하지만, 인간은 주체로 전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모든 인간이 주체성을 지닌 듯이 지칭되는 ‘주체’는 허구라는 것이다. 바디우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인간이 주체성을 지닌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바디우는 인간이 주체적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에는 ‘사건’이 필요하고, 그 사건을 통해 스스로를 ‘피해자로 파악’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자만이 주체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원래 주체적인게 아니라, 사건이 인간에게 태도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주체적 인간이 되라는 요구는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들어 볼 수 있는데, 왜 주체적 인간은 적을까? 요런 질문 속에서 주체적 인간의 탄생 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타자는 존재하는가? 에서 바디우가 대립하고 있는 윤리관은 레비나스의 그것이다. 왜 하필이면 레비나스냐? 레비나스가 포스트모던 윤리학의 대표적 인물이니까 그렇겠지. ‘타자의 윤리학’으로 대변되는 레비나스는 근대의 폭력성을 ‘동일자에 대한 인식’이라고 비판한다. 바디우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대한 강조점을 옮기는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바디우는 ‘타자에 대한 인정’ ‘차이의 윤리’ ‘다문화주의’ ‘관용’ 등의 말들이 “힘도 진리도 지니지 못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이 같은 정리들은, 레비나스의 진정한 생각과 동떨어져 있다고 보는데, 바디우는 레비나스 철학에서 ‘타자’ ‘차이’ ‘관용’과 같은 부분에 강조점을 찍을게 아니라, “본질적인 비동일성에 대한 경험”에 강조점을 찍는다. 그리고 ‘타자’에 방점 찍은 레비나스의 그것을 반박하며, 오히려 ‘동일자’가 철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라며, ‘동일자로 회귀’한다. 요부분은 꼼꼼히 읽어보면 뭐가 나올 것 같다.

오늘은 요까지.


자그마치 소년시대!!

금요일, 6월 26th, 2009

마이클 잭슨의 죽음과 ㅡㅡ;; 소녀시대 콤백 !! 을 기념하여. 자그마치 소년시대. 그러고 보니, 펌질이 늘고있어. 글쓰기가 귀찮은 건가;;; 사실 쓸 것도 없고.


수요일, 6월 24th, 2009

오늘 TV 보다가, 이 아줌마 나오길래, 그냥 생각나서 올려본다. 이 노래가 다양한 버전으로 리메이크 된 걸로 알고 있는데, 하여튼 요게 오리지날이다. 이 아줌마 다른 노래들도 괜찮은 노래가 많다.

이건 그대로의 음원 버전. 예전 노래의 느낌이 많이 난다.

요건 지영선이 리메이크 한 것의 MV. MV에서는 지영선이 꾸밈이 좀 과한 느낌이 드는데. 서영은 버전도 있다. 뭐 여러 버전이 있으니 찾아 들으시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화요일, 6월 23rd, 2009

고통스러운 세상, 쓸쓸한 인생. 유행가 가사 같은 정조는 이렇게 오랜 옛날부터 인류 곁에 있었다.

후대에 기록된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쉬여, 그대가 찾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신들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안겨 주고 영생의 삶을 거두었기 때문이오. 그대가 살아 있는 시간을 즐겁고 충만하게 보내오. 그대의 손을 잡는 어린 아이를 사랑하오. 그대의 아내를 품에 안고 즐겁게 해주오. 기껏해야 이런 것들만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인간은 이렇게 읊으면서도 끊임없이 신의 자리를 탐냈다. 만족되지 않는 욕구의 좌절. 사랑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수메르에는 사랑 노래가 드물다. 수천을 헤아리는 수메르 점토판 중에서 사랑을 다룬 시는 딱 두 편뿐이었다.

_ 강유원, [[책과 세계]]


제발

월요일, 6월 22nd, 2009

날씨가 참 더운데도, 너는 내 곁에 머물러, 결코 적지 않은 소리로, 앵앵 애교를 부리며, 온몸 곳곳에, 키스마크를 새기는구나. 너의 그 뜨거운 키스에, 살결이 홧홧 거려, 쉬이 잠들지 못하겠구나. 그러나 우리,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자꾸나. 내 비록, 너의 그 애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는 있으나, 너의 공세를, 얼굴과, 입술로는, 도저히 받아내지 못하겠구나. 너 간혹, 내 얼굴을 더듬을라 치면, 내 격렬히 거부하고 있음을, 너도 이미 느끼고 있을테지. 몸은 허하여도 입술은 허하지 못하겠다는, 어느 꽃밭의 아씨처럼. 내 비록 너에게, 어찌할 수 없이 몸을 허하고는 있으나, 부디 얼굴만은, 지켜주길 바란다.

모기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