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7월, 2009

지금 있는곳은 촌이

금요일, 7월 24th, 2009

지금 있는곳은 촌이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울타리가 없으며, 비교적 문명화가 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휴대폰에 의존한 기록행위가 이루어진다. 나는 비교적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고 펜으로 종이에 글 쓰는것이 익숙치 않았는데, 컴퓨터 사용이 불편하니 펜으로 종이에 잘도 써댄다. 예전에는 컴퓨터에 의존한 글쓰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 약간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을듯 하다. 인간은 닥치면 하는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성장시킬 상황으로 자신을 이끄는것. 상황이 동일하면 성장에도 한계가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상황변화가 자기가 이끈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것일까? 그렇기도하고 아니기도 하겠지. 어제 새벽에는 복실이가 새끼를 7마리 낳더니 오늘은 두리가 5마리 낳았다. 지금 계속 낳는중. 참 공교롭게 오늘은 복날. 그것도 중복.


창조과학 종교전쟁 등등

금요일, 7월 24th, 2009


저는 학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수업이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창조와진화 수업이었습니다. 제가 수업을 힘들어 하는 것은, 두가지 경우입니다. 강의내용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거나 혹은 교수에 대한 회의감이 들 경우입니다. 창조와진화 수업의 경우에는 두가지 모두 해당되었습니다. 뭔가 ‘학문’이라 할 수 있는 토대가 결여 되어 있다는 느낌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그런 회의감에 대한 토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회의감 속에서 저는 ‘창조과학’에 대한 어떤 입장을 세웠습니다. ‘창조와 진화’수업이 저에게 준 것은,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더라도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답안지를 쓸 수 있는 영악함과 지금 이 글에서 말하게 될 어떤 입장들이 되겠습니다. 먼저 강조해서 말씀드릴 바가 있다면, 저는 도킨스의 저서는 물론 창조론의 저서는 물론 신학저서는 물론 [종교전쟁]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음을 알려 드립니다. 제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종교전쟁]에 대한 것들은 세인트님이 올려주신 강연회에서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창조과학논쟁의 두 축
창조과학을 판단할 때 이용되는 두가지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의 기준입니다. 종교를 축으로 한 논쟁은 비교적 이루어지지 않는 편인건지, 아니면 내부논쟁이라 드러나지 않는건진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전쟁]의 공저자 중 한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제기하고 계시는 듯 한데, 사실 창조과학운동에 관심있는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그저 창조론을 끄덕끄덕하며 받아들이는 분위기일 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창조과학운동이 주로 쟁점삼고 대립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종교성’이 아니라, ‘과학성’판단 여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종교전쟁]에서도 다루어지듯이 그것의 ‘과학성’이 부정되었을 때, ‘창조과학운동’은 그저 ‘종교운동’으로 치부되는 것이지요. ‘창조과학운동’이 목표하는 바도 그것이 종교로 인지되는것 보다는, 비교적 ‘확실한 지식’으로 인정되고 있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기를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논쟁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요 쟁점인 ‘과학’이라는 축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글을 보아하니, 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가고 있네요. 과연 올바른 촛점인지 저는 의아할 뿐입니다.

창조과학과 과학
창조과학이 과학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판단할때 우선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창조과학을 판단하겠다면, 그 기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창조과학이 어떤것인지 판단할 것이겠지요. 그런데, ‘과학’의 정의에 대한 문제는 과학철학적 주제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과학철학자는 ‘칼 포퍼’나 ‘토마스 쿤’을 들 수 있겠지요. 저는 과학철학에 대해 아는게 없지만, 어쨌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의한 ‘과학’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겠지요. 그것들을 검토하고 그들의 정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창조과학의 ‘과학성’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이 이루어지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에 있어서 창조과학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종교전쟁]을 공저한 과학철학 전공의 모 교수는 그런 기준들에 부합하는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네요. 만약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에 대해 검토하고 비판하실 의도가 있으신 분들은, 기존의 과학철학자들의 이론을 검토하는 노고를 하신 후 이를 바탕으로 이 입장을 비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제가 수업을 들은 바에 따르면 “창조과학은 기존의 과학을 넘어서는 새로운과학.”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마 경험적 반복 실험을 통해 증명해낼 수 없는 영역이 창조론이기 때문에 이리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입장은 앞서 언급한 입장과 배치될 것이 없습니다. 기존의 과학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선언은 창조과학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기존의 과학계가 가지고 있는 과학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과학이라는 개념을 재정립 할 것이며, 그 재정립된 과학의 한 귀퉁이에는 창조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도전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과학계와 창조과학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과학’이라는 개념의 외연이 이처럼 상이하기 때문에, 기존의 과학계가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창조과학이 말하는 새로운 과학개념에 대해서 들어 본 바가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과학 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지금 창조과학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화론이나 기타 썰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립된 개념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창조과학은 사상누각일 뿐이지요. 그 어떤 학문도 정립된 개념 없이 시작하지 않습니다. 만약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학우분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시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학교측에 적극적으로 건의해 주십시오.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데 왜 수업에는 안가르쳐 주느냐고.

가치와 사실
가치와 당위의 영역과 사실과 객관의 영역은 구분됩니다. 그 둘의 상관관계는 제가 알기로는 아직 명료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과 객관의 영역이 가치와 당위의 영역과 일치한다고 보는 입장을 ‘자연주의’라고 합니다. 그것은 비단 과학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 뿐만이 아니라, 윤리학에도 해당됩니다. 어쨌든, 저는 가치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을 구분해서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혹 사실과 가치가 일치한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 사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외부세계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가치라기 보다는 외부세계에 반응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난데없이 가치와 사실의 구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과학의 객관성과 그 설득력은 과학이 그 가치와 당위의 영역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치나 당위를 다루지 않고 무목적적인 도구적 이성에 머물겠다는 과학의 선언과 그 노력이 과학을 객관적이고 합리적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것은 아닙니다.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의 영역을 침범하곤 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연구를 위한 물적 토대인 자본과 관계하고 있으며, 어줍잖은 민족정신과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주의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가 적대시하는 사상들이 있습니다. 진보사관을 바탕하고 있는 사회진화론, 빨갱이 마르크스, 안티크리스트 니체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와진화 수업시간에 배웠던 진화론의 폐단에는 이런 설명이 있었습니다. 진화론의 그 사상은 마르크시즘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주었고, 히틀러의 민족우월 사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히틀러가 이용한 사이비 과학이 우생학이며 히틀러는 니체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더라라는 식의 설명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 끼친 영향의 기저에는 자연주의이거나 자연주의에 준하는 가치판단들이 깔려 있습니다. 과학이론인 진화론의 상상력은 많은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지요. 이것은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사실과 객관의 영역에 머물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영역 즉,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쳤기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생학이 과학이론으로만 머물고 나치의 법률로 화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러한 대량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허접한 과학이론중의 하나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겠지요. 니체의 윤리학은 자연주의 윤리학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그뿐입니까? 모든 학문이 신학의 시녀노릇하던 시절에도 자연주의는 그 위세가 대단했지요. 그 대표적 예가 자연신학입니다. 가치와 사실에 대한 무분별한 연결은 이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겪은 위험성입니다. 도킨스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도킨스의 몇 개념들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객관적 과학의 영역에서 검증하고 있다고 보기 보다는 사회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 과학의 논의방식을 벗어났을때의 폐단은 또 있습니다. 대국민 사기극 황구라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원천기술의 유무 여부를 과학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기술보안 등을 이유로 논의를 막고는 병원에 들어가고 언론을 이용하곤 했죠. 저에게 창조과학운동이 행하고 있는 것을 일본우익의 역사왜곡에 비유하는 모교수의 비유는 확실하게 와닿습니다. 창조과학운동이 사회운동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기존의 과학계가 받아들이지 않아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입증책임이라는게 있지요. 지금은 확실하게 그 입증책임이 창조과학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있고, 기존의 과학계는 그 설득 대상입니다. 결국 쟁점은 창조과학의 설득력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맺으며
저의 개인적인 느낌은 절대반지를 획득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연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과학으로 종교를 없애려는 시도이든, 종교로 모든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든, 자신이 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세상을 모두 이해해 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이해 할 만 합니다. 과학으로 종교에 도전하는 이들의 입장도 자연주의적 입장이지요. 과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문을 바탕하여 모든 것들을 설명해보고자 하는 욕망은 신학으로(성경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닮아있습니다.

저도 물론 한때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절대반지는 없지요. 공부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학문마다 고유의 문제영역이 있고 그것들을 다루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 분야에서 말해지는 개념들은 말해지는 것은 같아도 의미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인과성’을 과학의 ‘인과성’과 같은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인지요?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우성’과 ‘열성’이라고 표현된다고 해서, 그것이 평가적 단어인 우월종자 열등종자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인지요? 그것은 유전 과정에서 특정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사실기술적 단어로 한정해서 읽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비스,

“만약 성서의 성령이 우리를 주재하고 있다면, 그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소녀시대를 완벽하게, 혹은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으로 만일 소녀시대의 활동들을 성서의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성령은 우리의 주재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결국 그 성령은 진정한 성령이 될 수도, 윤리적 가르침의 근원으로서 신뢰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누렁이는 진돗개이다

화요일, 7월 21st, 2009

누렁이는 진돗개이다. 어릴적부터 사냥개 훈련을 잘 받은 후, 우리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놈은 사람 말을 꽤 잘 알아 먹는 편이다. 딱히 붙들어 매어 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람 말을 알아 듣는다. 다만 흠이라면, 사냥개의 본성 탓인지 사냥감이 눈 앞에 있으면 정신 못차리고 달라든다. 가끔은 집에서 기르는 닭이며 오리 염소 등을 잡아버린다. 간혹 이웃의 가축을 도륙할라 치면 금전적 손해가 장난이 아니다. 산책중에 너구리라도 숲에서 튀어 나올라 치면 숨을 씩씩 거리면서 달라든다. 이놈의 또 한가지 특성은 어지간 해서는 짖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네 잡견들이 아무리 짖고 달라들어도 절대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잡견 옆에서 조용하고 유유히 오줌을 갈긴다. 그 위풍을 보고 있자면 진정 강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개들에게 있어서 오줌을 갈긴다는것의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이놈의 영특함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여서, 아버지는 누렁이는 절대 된장을 바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셨다.


파리가 많다. [[

일요일, 7월 19th, 2009

파리가 많다. [[중세의 사람들]]에서 중세인의 기록 중에 양파즙이 파리를 죽인다는 서술이 있었다. 양파를 갈고 접시에 담아 둬도 소용은 없다. 살충제를 썼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줄어있다. [[종교전쟁]]관련 대중강연을 녹취한것을 들었다. 대중강연 및 책 판촉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 그런지 정수리를 깨는듯한 내용은 없었다. 다만, 이 주제에 관련해서 과학을 각기 다르게 정의하는 학자들의 입장이나 창조론의 스펙트럼에 대한 개괄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책들을 찾아보면 좋을듯 하다. 인트라넷에서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듯이 보이는 생명공학도의 글을 읽었다. 그의 산만한 글쓰기를 보니 책은 많이 읽는듯 한데, 체계적이게 읽는다는 듯한 인상은 들지 않았고, 글도 굉장히 읽기 짜증났다. 상대해주고 싶은 욕구가 뭉실뭉실 피어 올랐으나 이제 인트라넷에서 글을 쓰지 않기로 한대다, 솔찬히 귀찮았다. 다만, 재미있는것은 그가 자연주의 신학을 인용하고 이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창조과학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사이비 과학에 관한 내용인데, 사회진화론이나 사이비과학으로 예들어지는 우생학이나 골상학의 오류는 가치-윤리의 영역과 사실-법칙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과 가치의 관계문제는 굉장히 근본적인 지점이고 철학적 난제로 알고 있는데 사실과 가치가 어떤 연결지점이 있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은 부분으로 알고 있다. 자연주의는 사실에서 가치를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입장인데 에피쿠로스나 공리주의 니체가 이에 해당한다. 어쨌든, 나는 지금은 가치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아마도 [[종교 전쟁]]에서도 언급할 굴드의 입장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입장은 객관적 사실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이 가치를 다루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도전할때의 입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 물들어 있는 이들은 사회진화론의 진화론에 방점을 찍고 히틀러가 니체의 사상에 물들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그 위험을 설파하지만, 절대지를 추구하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자연주의에로의 유혹을 받는것 같다. 결국 과학이 정치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었고, 이는 단지 사이비 과학이라는 과학 일부의 위험이 아니라 과학 자체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되풀이 하자면 자연주의 자체의 위험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휴대폰으로 찍고 있는 지금은 몸살이 난 듯 하다.


원투 쓰리 포 버블~ 버블~

일요일, 7월 19th, 2009

원투 쓰리 포 버블~ 버블~


대학에 갓 입학했을

일요일, 7월 19th, 2009

대학에 갓 입학했을때, 한 선배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 줬었다. ‘1000일의 사랑’이었나? 어쨌건 그와 유사한 제목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는 인트라넷에 그 이야기를 연재함으로써 한때는 필명을 널리 알리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여자 아이들은 애절하고 낭만적 사랑이야기에 빠져 그 선배에게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했고,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그리 열심히 듣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그 연재가 미완성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그 선배는 캠퍼스 커플로 약 1000일간의 연애를 했었고, 몇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 이야기를 인트라넷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간접적인 추억행위였다. 하지만, 그에게 어느날 전화가 왔다. 선배가 그의 사랑 이야기를 연재할 당시, 그 선배와 1000일 가량의 연애를 했었던 상대는 또 다른 학우와 무던한 연애 끝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선배의 연재글을 읽던 그 여성은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기 힘들어 했고, 그것을 지켜보던 그녀의 부군이 선배에게 연재를 중단할 것을 정중하게 부탁한 것이다. 결국 선배는 이런 사연을 독자들에게 알린 후, 연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이제 몇번의 흔들림을 겪었다. 추억이라는 행위의 내면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곱씹게 된다. 그것은 사회적 의미에서는 일종의 금기이고, 내면적 의미에서는 일종의 비윤리 이다.


나무를 만진다. 나

금요일, 7월 17th, 2009

나무를 만진다. 나무를 만지면 나무라는 재질이 인간과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늙은이의 마른 몸을 흔히 장작에 비유하는 이유는 그만큼 나무를 보면 인간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를 사용하기 위해 이미 박혀 있는 못들을 뽑았다. 나무가 인간에게 상처입히는 경우는 두가지이다. 본시 까시가 나도록 되어있는 까시나무인 경우나 인간이 나무에게 못을 박은 경우이다. 못박힌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다양하다. 한 반듯한 나무는 1977년의 모월 모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 건물은 헐리어 이 나무는 이곳으로 흘러 들어 왔겠지만, 먼 과거 대들보로 영화를 누리던 나무였으리라. 그 나무의 다양함 만큼이나 못박힌 양태도 다양한데 아무래도 일자로 정직하게 박혀 있는것이 가장 빼기가 쉽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20cm은 족히 넘는 큰 대못을 관통시킨 후 그것을 굽혀 반대방향으로 다시 망치질을 한 경우이다. 그럴 때는 정직하게 못대가리만 땡겨서는 안된다. 못을 빼어내기 전에 못을 바로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거기에다 나무가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는지 물에 함빡 젖기라도 할라 치면 일은 더 힘들어 진다. 나무 안에서 녹슬어 버린 못은 자신이 더이상 나무와 별개의 개체가 아닌마냥 비명을 지르며 빠져 나오는데 그건 순전히 못의 비명인지 나무의 비명인지, 아마도 둘 모두의 비명인 것 같다. 이렇게 조금은 위험하기도 하고 안쓰러운 나무들을 보고 있작시면, 나의 어떤 까끌까끌함은 가시나무의 그것인지, 못박힌 나무의 그것인지, 아니면 더이상 별개의 개체가 아닌 못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조갑제 같은 이가

화요일, 7월 14th, 2009

조갑제 같은 이가 사회에 존재하는게 문제인가. 아니면 그가 사회에 영향력을 갖는게 문제인가. 그럼 또, 분파주의를 바탕한 특정 세력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 세력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문제인가. 그럼 또 우리는 조갑제라는 인물이 변할것을 기대해야 할것인가 사회가 변할것을 기대해야 할것인가. 사태를 보는 입장 차이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차이 아닐까?


새벽 5시, 24시

화요일, 7월 14th, 2009

새벽 5시, 24시간을 열어두는 김밥을 주로 파는 음식점에 갔다. 순찰 도는 순경들과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아저씨들과 아침을 일찍 먹고 노가다판으로 향하는 아저씨들을 마주하니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적막한 집 주변을 찬찬히 살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그 밝음과 사람들이 신경쓰여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느적느적 걷는데 욕설을 내뱉으며 장난질을 치는 잉여로 보이는 궁상들이 있었다. 그 궁상들 맞은편엔 한시간에 700원 하는 PC방이 있었다. 펄럭이는 현수막이 유달리 눈에 띄었고 PC방 가격이 그렇게 싼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한창 PC방 다닐때만 해도 기본이 1000원이고 비싼곳은 1200원 했다. 그러한 차이가 시간적 요인인건지 공간적 요인인건지 곰곰히 생각하며, 확실히 동네가 좀 후지긴 후지단 생각을 했다. 공간적 요인 때문일거라 잠정적 결론을 내리는 순간, 떠오른것은 그 PC방이 본디 교회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이었다. 몇년 전이었던가 사랑에도 실패하고, 아마도 저항에도 실패했던, 그저 더위먹고 귀향했던 그 시절에 동네를 돌아다니다 선교활동을 하는 무리를 두어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한 무리는 나의 손을 붙들고 화기가 강하며 귀신이 들려 있으며 방랑살이 끼어 있다며 공자를 운운하여 함께 제를 드리려 가자는 무리였다. 내 손을 붙들고 염하는 모습이나 공자를 운운하는 모습이 사이비스러워 공자는 괴력난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빠져나온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한 아줌마 무리였는데 지역사회를 위한 설문조사인줄 알고 응했다가 낚인 경우였다. 이들은 크리스마스가 태양신 숭배 기념일 이라는 중앙일보 기사를 나에게 보여줬었는데 이미 상식이라 여겼던 것이라 아는척을 했더니 하나님의 여성성만을 긍정하는 그런 썰을 펼치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그들은 나를 염세주의자로 규정하였고 난 바쁘다며 그자리를 빠져나왔다. 대화중에 안 것은 그 교회의 이름이 ‘하나님의 교회’였고 그 위치가 어딘지 였다. 나는 교회 이름을 보면서 포항 모처에 있는 대학이 생각났고,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교회는 같은 이름의 교회가 전국에 걸쳐 수백이며 이단리스트에 올라있다는 것이었다. 괴력난신한 그 무리들과는 달리 동네 아줌마 인데다, 오가며 커피 꽤나 얻어마신 데다가 포항 모처의 대학이 연상되지만 이단이라는 매력이 있었던 그 교회는 내가 꼭 한번은 들르리라 다짐하던 교회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스틸컷

화요일, 7월 14th, 2009

영화, 장면 포착, 순간 순간. 한 컷씩 스샷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