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감상' Category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금요일, 9월 4th, 2009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원래 꽤나 좋아했던 노래였는데, 원곡 먼저 들어보시고

Sunny Side 인가 하는 그룹에서 리메이크를 했단다.

아무래도 숨을 뿜어내는 울림은 옛곡이 더….


홍상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요일, 7월 5th, 2009

말의 상황에의 변주.

“중요한게 뭔가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니가 뭘알아.”

“말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요.”

“내 이야기를 진짜 안하거든요.”

“술 한잔 마셨으니까, 이야기 해야겠네요.”

“존경해요.”

──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이 말만큼이나 ‘합리적’ 논의 규칙을 벗어난 말은 없다. 뭔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듯이. 너는 알 수가 없다는 듯이. 너는 모른다는 듯이. 툭 내뱉지만, 도대체 알려주는 내용도 없고 메시지도 없는 말 아닌가. 도대체 뭘 잘 알지도 못한다는 것인지. 이 불명료한 말은, 영화 내도록 말해지지만, 간간히, 그래도, 아 진짜 저 새끼 “잘 알지도 못하면서.”(싸대고 있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은 왜인가.─직접적으로 말해지지 않는 상황들─ 상황과 관계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의 미묘한 차이들 세세히 느낄만한 부분인 듯.

그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을 하는 화자는 무언가를 그리 잘 아는 걸까? 유신과 구경남의 대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거 다 허세고 다 헛거에요.” “그럼 자신이 누군지 아세요?” 유신은 이어서 ‘힐링’ 받은 신비적 체험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 그래도, 우리는 딱 아는 만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응수해 주면 된다. 어쨌든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을 해주면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가의 보도. 만능 칼. 불변의 진리. 마지막 보루.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이 말을 쓰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을 듣는 순간이야말로,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

“힘이 없고, 술이 너무 취했고 여자라서 당한거에요. 나도 끝까지 못버틴거 같아, 너무 정신이 없었어, 술이 너무 취햇고, 그래도 강간당한거야. 당신은 정말 무책임한 사람이야. 당신이 그렇게 한거 알고 죽여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너무 취했어, 그치만 당신은 알았잖아 내가 얼마나 취했는지, 두 번다시 내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당신같은 사람 정말 사절이야. 당신은 주둥이만 살아있고 쓰레기야. 무책임하고 더러운 인간.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알아 힘들지, 미안해, 내가 잘할게 정말. 나 지켜줘 알았지? 꼭 지켜줘. 응?”

“젊으니까. 내가 심심하니까. 남자니까. 당신들도 그러잖아.”

왜 이 모든 화살들이 구경남에게만 향하는 건지. 하지만, 그래도 사실은 구경남 탓이 아니라고, 스스로들 고백하고 계시는 대사들.

──

“이해가 안가시면 이해가 안가는거죠.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영화를 그냥 만드는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거겠죠. 제 영화속에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드라마나 서사도 없고 교훈이나 메시지 뭐 이런것도 도 없거나 불확실하고, 예쁘거나 좋은화면 없습니다. 제 능력과 기질은 하나뿐이 못하는 겁니다. 정말로 몰라서 들어봐야 하고 그 과정이 정말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제가 컨트롤하는게 아니라 과정이 나로하여금 계속 뭔가를 발견하게 하고 저는 그걸 수렴하고 하나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 뿐입니다. 그 결과물을 보고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나 아무도 이해 못할 수도 있겠죠. 저는 이 세상의 귀중한 것은 다 공짜로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하고 싶은 겁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아는 것. 구체적인 것을 매번 만날 뿐 체계으로 미리 갖지 않는 것, 매번 발견하는 것 단지 감상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

“하여튼 나한테 짜증 좀 내지마, 너무 힘들어 짜증내면.”

“아이고 죽겠구만.” ‘이 여자는 이제 너무 힘들다. 내 말을 너무 안 듣는다.’

“아 힘들다 정말 연애하기. 혼자 생각에 그렇게 빠지지 마요. 우린 뭐 헤어지고 할 것도 없어요. 아직은. 잘도 도망치더니.”

“당신은 절대 용납 못해요. 있는 그대로.”

심사위원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진지한 구경남은 아직도 순진하게, ‘짝’을 찾으면 인생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면, 진지함과 가벼움의 대화인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참으로 진지하고 순진하게 새로운 인생을 찾은 듯 말하는 부상용과 양천수는 참으로 진지하고 순진하게 빛과 새로운 인생을 말하지만, 그 속에는 오히려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가 있다. 구경남은 속았다. 진지한 유머에. 그래서 그의 진지함은 유머이지만, 그는 진지할 것이다. 그래서 진지한 유머의 유머를 못 볼 것이다. 그러니까. 진지할 것이냐, 가벼울 것이냐. 그건 문제도 아니다.


<박쥐> 단상

토요일, 5월 9th, 2009

1. 항상 느끼는 거지만, 김옥빈 이 아줌마는 뭔가 배고파 보이고, 마약이라도 한 듯이 보이고, 가난한 듯도 해 보이고, 뭔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자꾸 그런 역할을 맡는 것만 봐서 그런 건지.

2. 송강호 고추가 나오는 장면은 작위적인 것 맞다. 그런데 그 작위는 신부 ‘상현’의 작위이기도 하다. 상현이 아주 작위적으로 ‘연극’한 것이니, 이 장면은 작위적으로 보여야 하는 장면인 듯.──이후에 상현이 웃으면서 가는 장면이 편집되었다는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3. 최악은 마지막 장면. 극 전체적으로 흐르는 대립을 마지막 장면에서 물 타버린다.

4. 뱀파이어라는 전설적 괴물 자체가 특수성을 띄고 있는데, 그건 인간 존재가 변화한 괴물 치고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것. 인간형 괴물──그러니까 인간과 비슷하게 생기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괴물──들은 대체로 그들의 괴기스러운 짓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데, 인간이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그 순간. 마치 인간이었던 과거는 없었던 듯 괴기스럽게 변해버리는 뱀파이어. 그 사이 지점을 파고드는 지점이, 뱀파이어는 인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이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가 <박쥐>그리고, 아직 보지는 않았으나<트와일라잇 (Twilight)>

5.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떠오른 생각은 “존재의 윤리를 배반한 자의 말로.” 차라리 이상한 병에 걸려, 웅담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웅녀’이야기 라던가, 한우에 빨려버린 ‘인간이 된 소’ 이야기 같은걸 써본다면, 이 영화의 희화성이 보다 강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해봄.

6. 아 좋은 영화 봤다. 이런 생각은 안 들었음.

 

++ 이거 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지 네이버를 검색했다가 한 영화리뷰를 보았음. 그리고 댓글을 보고 뿜었음.

“좋은 평입니다. 박쥐를 통해 철학적인 접근을 다시한번 시도한 박찬욱 감독의 의도를 잘 파악하신 것 같아요. 09.05.05 01:11”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code=59845&nid=1672070


김기덕, <비몽>, 2008.

토요일, 3월 21st, 2009

나는 김기덕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 그것이 비유하는 상징들에 붙들려, 플롯 자체를 무화시키는 해석을 하는 것이 영 껄끄럽다. 예술이라는 것은 가장 개별적인 것인데, 아무리 보편적 상징으로 해석 가능하다 하더라도, 혹은 보편적 상징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은 작자가 보편적인 것들을 얼마나 개별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흐름을 없애버리는 그런 해석은 올바른 것일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하나의 ‘꿈’으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정말 꿈과 실재의 구별이 없다면, 우리는 꿈마저도 실재처럼 해석해 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애초부터 우리는 꿈을 실재로 해석해 왔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실재에 가까운가, 꿈에 가까운가?

<비몽>은 꿈을 꾸는 남자와 그 남자의 꿈을 행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한 남자는 옛 애인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사랑하여 여자를 찾아가는 꿈을 꾸고, 한 여자는 옛 애인을 끔찍하게 증오하지만, 몽유병 때문에 매일 그 남자를 찾아간다. 그런데, ①그 여자의 행동은 한 남자가 꾸는 꿈의 내용이라는 것. ②그리고 그 남자의 옛 애인과 그 여자의 옛 애인은 현재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

*

▲ 4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장면, 영화에서는 4사람 각각의 위치가 뒤바뀌는 장면을 보인다.

신비의 지점은 첫 번째 설정, 즉 진과 란의 꿈과 몽유병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신비로운 설정 뒤에 잇따르는 보충 설정이 바로 서로의 옛 애인들이 현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개연성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다. 만약, 이처럼 뒤따르는 설정이 없다면, 꿈과 몽유병은 영화 내에서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로 남게 된다.

의사(장미희 역)가 란과 진은 하나라는 말을 하는 장면. 그것은 진과 란의 내면이 동일성을 지니는 것을 포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의 사랑과 란의 증오는 하나라는 것. 결국엔 그들의 감정이 상대를 파멸로 이끈다는 것.

4사람이 들판에서 각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장면들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진과 란은 과거를 회상하기도, 진은 옛 애인의 남자에게, 란은 옛 애인의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사 식으로 말하자면, 저 4사람은 모두가 한사람이다.


김기덕,<시간> (2006).

수요일, 1월 7th, 2009

1. 지식이나 질문은 어쩌면, 그 이면에 상처를 갖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조건 유무에 대한 질문 또한, 그 질문을 필요로 하는 상처를 전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랑이 이유 없을 때, 우리는 그 이유 없는 사랑의 크기만큼이나, 그 사랑이 이유 없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고, 그 사랑에 이유가 있을 때, 그 사랑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상실되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불안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종종 조건 없는 사랑을 미화하기도 하지만, 종교적으로 조건 없는 사랑이 은혜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랑이 조건이 없어서 뿐만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신의 영속성이 또한 담보되기 때문이다.

2. 김기덕의 <시간>은 인간의 사랑을 조건 있는 사랑으로 규정짓고 그것을 획득하려 노력하는 인간들의 비극을, 또는 조건 없는 사랑을 끝내는 상대방에게 인지시켜 줄 수 없는 인간들의 비극을 그려내는 듯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인지 가능한 조건은 얼굴이나 몸으로 상징되며, 그 인지가능성은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사회적 정체성의 문제는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과거, 즉, <시간>과 연관된다.

3. 새희(성현아 역)가 얼굴을 바꾼 이유는 똑같은 자신의 얼굴을 지우(하정우)가 지겨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새희는 ‘새로움’을 사랑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 ‘새로움’이라는 조건은 견고한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이다. 예쁜 얼굴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고정된 특성으로 조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역동하는 ‘새로움’이 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성형외과가 나오고 그에 대한 비극을 다룬다는 점 하나만으로 이 영화가 단순히 플라스틱 신드롬만을 다룬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

“얼굴을 바꾸면 더 오래 지우씨와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런데 지우씨가 과거를 여자를 잊지 못해서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새희는 세희를 세희라 칭하지 않고, 과거라고 칭한다.

4. 그런데 이러한 ‘새로움’이라는 조건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지우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아니, 지우가 과거를 잊었다 하더라도 새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지우의 말대로 ‘세희’는 ‘새희’이기 때문에, 잊혀진 세희로서의 고통을 관객들에게 토로한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네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라는 방백은 새희라는 인물 속에 남아있는 세희라는 분열된 자아가 토로하는 고통이다. 또한, ‘새로움’이 곧 사라지게 될 새희가 얼마간의 시간 이후에 또한 토로하게 될 고통이기도 하다. 새희는 세희이지만, 세희가 아닌 분열상황인데, 새희는 세희가 잊혀지길 바라지만, 새희는 곧 세희이기 때문에 잊혀지길 바라지 않는다. 때문에 새희는 세희로서 지우의 사랑을 다시 확인해 보고자, 세희의 이름으로 지우에게 쪽지를 보내게 되고, 과거를 잊지 못하는 지우 앞에서 결국 가면으로 자기 정체성이 통일된 상태로 지우 앞에 나서고자 하지만, 세희와 새희를 동일인물로 여기고자 하는 지우의 시각을 견뎌내지는 못한다.

5.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바꾸고자 한다. 이것은 간혹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되돌리고자 하는 욕망이나,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자 하는 도피욕구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욕망은 ‘자신을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한 형태가 영화 속 정우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정우는 새희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비록 사진이 없어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얼굴이 상당히 잘 생겼었다고 말한다.

*

등장인물이 얼굴을 가린 채 혹은 얼굴을 가리는 장면, 자기부정의 욕망,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부정의 쾌감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정우는 사회적 자아의 개변을 의미하는 인물이다. 정우는 새희의 일부분이고 어떤 해석이기도 한데, 새희의 얼굴고침이 단순히 새로움에 대한 추구뿐만이 아니라, 식어버린 사랑과 지우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의 개변이 또 한 가지의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정우는 지우를 찾는 새희 앞에 나타나서 “누구인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새희는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6. 분석과 총체

* * *

잡지 찍찍 잘라 붙인 저 얼굴이 성현아의 웃는 얼굴이기도 하고, 미쳐버린 얼굴이기도 하다는 것. 그 얼굴의 정체, 사랑의 정체, 사람의 정체는 저러하다는 것. 사랑의 조건을 분석해서 찍찍 아름답게 잘라 붙여 봤자, 성형하기 전에 눈-코-입 잘라 붙이는 기괴한 몽타쥬 밖에 안 된다는 것,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 해 보았자,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 눈-코-입 잘라 붙이는 행위를 시작하게 된 자체가, 눈-코-입 잘려지듯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돌이키려 해 보았자 그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일요일, 11월 16th, 2008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1975)

드라마 | 1977.09.17 | 129분 | 미국

감독 밀로스 포만

출연 잭 니콜슨, 루이스 플레처, 윌리암 레드필드, 브래드 듀리프 더보기

줄거리 범죄자인 맥머피(Randle Patrick McMurphy: 잭 니콜슨 분)는 교도소에서 정신 병원으로 후송된다. 정신 병원이 감옥보다는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던 맥머피…더보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1977년 작품이다. 배경은 정신병원, 이 정신병원을 그냥 정신병원으로 읽어 내기만 해서는 안 될 듯하다. 가령,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인디언으로 병원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는 Chief는 사실상 말을 들을 줄도 알고 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그가 ‘인디언’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통해 이 영화가 그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나 McMurphy가 정신병원에서 도망치자고 Chief에게 제안했을 때, Chief가 하는 이야기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있는 이유가 인종적 차별 때문임을 암시한다. 그의 아버지는 Chief보다 컸었고 유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당했다. Chief와 그의 아버지를 ‘산송장’처럼 만드는 ‘그들’ 이 있다는 것.

정신병원, Ratched 간호사가 환자들의 자발성을 떨어뜨리는 부분은 영화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월드 시리즈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McMurphy. Ratched 간호사가 말하는 병원의 소중한 일과표라는 것은 월드 시리즈가 방영되는 시간에 환자들이 보드 게임을 하고 있는 것. 이후 다시 요구된 재투표에서 10명이라는 환자 과반수를 넘기는 찬성이 있었음에도, 정해진 시간에 결정되지 않았다는 절차를 문제로 Ratched 간호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치료의 명목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환자들을 더욱 병들게 만든다. 흡연권 보장을 주장한 Cheswick의 발언과 그로 인한 병원 내의 난동을 이유로 병원측은 McMurphy, Chief, Cheswick은 전기충격을 가한다. 병동 내에 원장이 등장하기만 하면, 병원 환자들은 그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후에, Billy가 자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McMurphy는 병원측에 의해 폐인이 되어 버리고, Chief는 그러한 McMurphy는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McMurphy를 죽게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들 수 없었고, McMurphy가 들어 병원을 탈출하려 했던 세면대(?)를 들고 병원 벽을 뚫고 탈출한다.


명준에게 여성의 의미?

수요일, 9월 17th, 2008

또 다시 [[광장]]… [[광장]]을 이야기 할때, 명준의 여성관에 대해서 간혹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명준의 여성관은 남성적 시각이며 폭력적이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번에도 또 한 여학우의 질문. "명준에게 여성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자? 도피처? 도구?" 이 질문은 세가지 답을 예정해 놓고 그 중 딱 하나만이 답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질문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명준은 여성을 도구로 이용한 거에요." 그들이 말하는 ‘도구’ 앞에는 ‘성적(性的)’이라는 말이 아주 미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따지고 보면, 구원자-도피처-도구는 딱 하나로 나누어져서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자의 의미-도피처의 의미-도구의 의미는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나는 질문을 던진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럼 예수가 도구는 아닙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요!!!" 구원자-도피처-도구는 땔레야 땔 수 없다. 류 교수는 이를 삼위일체에 비유한다.

현재의 사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이미지로 형성되어 있다. 여성들은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페미니즘적 피해의식을 학습한다. 그리고 의식있는 여성이라면 당연 ‘페미니스트’적이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사랑의 상을 대어보라면 이야기 하지는 못한다.

피해의식만 이야기 하는 얼치기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사랑에서 ‘몸’ 을 빼앗아 갔다. 여성들은 여성 스스로를 타자화 시켰다. 그들은 참으로 쿨하게 이렇게 말한다. "몸이 중요한가요?" ‘몸’이 중요하지 않다면, ‘몸’을 주건 안주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들은 심층에 학습된 피해의식, 성에 대한 혐오로 철저하게 반(反)육체적이다.

"육체적’사랑’은 저급한거에요. 가능하기나 한건가요??" … 아서라 아해야. 神마저도 육화되셨는데, 하물며 사랑이야…

나는 오늘도 페미니즘적 ‘순결주의’, ‘처녀막 주의’를 발견한다.


다크 나이트

일요일, 8월 17th, 2008
다크나이트 포스터

다크나이트 포스터
출처: 네이버

그렇게 사람들이 보라고 추천을 하던 ‘다크 나이트’를 보았다. 꼭 주변 사람들의 평가 뿐만이 아니라, 몇몇 평론가들의 영화해설이 참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보았다. ‘배트맨 비긴즈’의 후속작이라는데, 영웅물의 진화형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다크 나이트’의 구성은 ‘배트맨’이 아니면 불가능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슈퍼맨은 불가능하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계속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배트맨’의 고뇌가 주로 강렬하게 다가왔고, 그리고 하비 덴트의 ‘투 페이스’로의 변화도 강렬하다. 다크나이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보도자료를 보면(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비중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조커’의 무정부주의적 지향성을 인지하기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듯 하다. 그러니까, 통상적인 그저 악행을 ‘즐기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 악행이 나름의 당위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인지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조커’의 내면묘사가 조금 더 있었다면 완벽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번 ‘다크 나이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조커’의 재해석이다. ‘조커’는 참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좀 불필요한 작품일수도 있겠지만, ‘조커 비긴즈’ 따위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혹시 아는가?? 조커의 삶을 통해 또 다시 어떤 ‘해체’가 일어날지…


달콤한 인생 종영

월요일, 7월 28th, 2008

1. 전체적으로 좀 지루하게 진행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래도, 영상미와 음악에 집중한 측면이 있었던듯. 혜진과 준수가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사랑이 커져가는 과정을 묘사하려다 보니, 조금은 어쩔 수 없이 ‘낭만’적으로 시청자들을 괴롭히며 지루한 영상 지루한 음악적 반복이 있었던듯…

2. ‘사실’을 쫓아 살아가는 퇴직형사 박병식의 내면갈등, 그리고 그와 얽힌 인물들과의 갈등은 하나의 관전포인트. 박병식이 ‘사실’을 대하는 태도와 이준수와 윤혜진이 사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3. 이준수(이동욱)가 죽은 이유가 강회장의 괴롭힘이라기 보다는 ‘사랑’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혜진 같은 경우에는 ‘영원한게 왜 없어?’라고 준수에게 항변하며 ‘모든 것은 변한다.’는 명제를 의지적으로 거부하였고, 준수의 경우에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명제를 인정한 이후에, ‘영원한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죽음’을 선택하였다는 것. 준수가 영원한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는 준수가 혜진에게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 뿐이에요."라고 말한 것. 강회장에게 쫓기는 준수를 걱정하며, 준수가 언제 죽었는지 불안해 하며 살수 없다는 혜진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준수에게 사랑이 주는 불안함과 닮아있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부분은 준수가 혜진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후에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준수의 이같은 성향은 준수의 인격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에게는 사랑의 의미가 너무 촘촘하다. 준수에게 있어서의 다애와 혜진의 의미차이는 준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

4. 강회장과 박병식의 갈등 또한 중점적으로 볼만한 부분이다. 박병식은 정해진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회장에게 있어서 법의 정해진 절차를 밟는 것은 그의 복수심을 충족시켜줄 수 없으며, 오히려 아들 강성구의 방탕한 생활이 드러나도록 하는 바라지 않는 방식이다. 권력이 있는 자에게 법은 단지 자신의 복수심을 충당시켜주는 도구일 뿐이다.

5. 극의 중반에 등장한 혜진의 친구 성숙은 참 얄밉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6. 이 드라마에서 아쉬운 부분은 죽음을 선택한 준수와 삶을 계속 살아가는 혜진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 좋다는 돈많은 남자와 그저 그런 결혼을 한 조금은 패배적 결론을 내려버린 다애. 하지만, 하동원의 변화에 대해서는 드라마 뒷편의 공백시간으로 돌려버린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

7. 영원 – 멈추어 버린 시간 – 죽음 – 사랑 – 종교, 혜진이 언제 어디서든 느낄 수 있는 준수는 혜진의 그리움이 만들어내는 ‘사실’. 준수는 우상일까? 차라리 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 두 편 – 색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월요일, 2월 25th, 2008

1. 영화이해
영화비평이라는 것은 누군가 만들어 놓은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영화를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영화의 평가 이전에는 그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영화를 이해하려면 영화를 만든 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이 정말로 영화를 제작한 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일 필요는 없다.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들을 종합한 추리, 그 추리의 정합성이 높을수록 제대로 된 영화 이해이다.
그런 면에서, 감독이 의도하지 않고 삽입했던 부분들 마저 고려한 이 ‘영화의 이해’는 영화의 예술성을 보다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 새로운 창작이다.

2. 영화의 표현방법
영화가 보는이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그걸 바꾸면 그걸 보는 방법도 달라진다. 가령, 그냥 영화를 보는 것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영화’ 라는 순수 음성정보로 구성된 영화를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그것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것도 다르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스릴러라는 장르는 그래도 보통은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 긴장감을 높이는 ‘배경음악’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걸 포기한 영화가 있다. 그래서 정말 리얼한 영화. 오로지 캐릭터와 효과음 만으로 ‘긴장’을 주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범죄, 드라마, 스릴러 | 2008.02.21 | 122분 | 미국 | 18세 관람가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 조쉬 브롤린, 우디 해럴슨 더보기
줄거리 : 영화는 사막 한 가운데서 사냥을 즐기던 모스(조쉬 브롤린)가 총격전이 벌어진 듯 출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모스는 물 한 모금을 갈…더보기
멀티미디어 예고편, 인터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그 특이한 표현방법은 찬사받을 만 하다.

- 색계
영화를 읽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다. 스쳐지나가는 장면 장면을 텍스트화 한다는 것도 정신노동이 필요하다. 색계는 의미망이 촘촘한 영화다.

색, 계 (色, 戒: Lust, Caution, 2007)
드라마 | 2007.11.08 | 157분 | 미국 | 18세 관람가DVD구매
감독 이안
출연 양조위, 탕웨이, 조안 첸, 왕리홍 더보기
줄거리 : 1942년 상하이-회한. 막 부인(탕웨이)이 카페에 앉아 과거를 회상한다. 그녀가 왕치아즈라 불리던 그 때를…. 1938년 홍콩-시작.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보기
사운드 트랙 색, 계 OST
멀티미디어 예고편, 인터뷰, 뮤직비디오

그냥 단순히 노출수위가 높은 정사씬에 열광하거나, 그것에 필요 이상으로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장면이 묘사하는 주인공들의 관계를 봐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색계는 의미망이 촘촘하다. 그 장면 장면이 보여주는 심리 묘사와 의미가 촘촘하기 때문에, 단순한 스토리성 스포일 만으로는 영화를 깊이 음미할 수가 없다. 장면 하나하나에 주석을 달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영화를 평가 하기 이전에 그 영화를 촘촘하게 해석해 내는 것만으로도 감탄짓게 하는 빽빽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