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고언에 관해
수요일, 6월 17th, 2009http://i3.handong.edu/board2/craboard.asp?id=anybbs&no=33192
jollyman님이 마무리 글을 올려주셨다. 거의 모든 논점을 정리해 놓았다. 아무래도, 밤새 쓰시고 새벽에 올리신 듯한데 ㅡ;; 이 정도 까지 해주시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구체적 결론에 있어서는 특별히 태클 걸 것도 없다. 다만, 이것이 이전의 글과 연속성이 있는지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낮아지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분열의 영’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애초부터 피상적 단어인 ‘분열의 영’을 가지고 이야기 했으면서, 그것의 피상성, 관념성, 자의성을 비판한 이들에게 피상적 인식 혹은 저열한 인식이라는 공격을 하시는 것은 약간 억울하다. 그래도 어떤가. 이정도 정리해 주시면 정말 대단한 노고지.
tictoc의 글이나 내가 지향했던 결론지점들도 사실은 이 내용들과 만나는 지점이 많다. 그리고 이미 이야기 했던 것들도 많고, 사실 내가 보기에 새로운 내용은 없다. 내가 해당 교수만 퇴임시키거나 총학생회장단만을 탄핵했을 때,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책임만 일부 사람들에게 돌리고 표면적으로만 해결되는 것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 도마뱀 꼬리 자르기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잔여하는 지지세력으로 지칭되어 비판되어 지고 있는데, 이 같은 부분은 그저 그들을 리더쉽의 자리에서 책임지우고 해임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부분은 아니다. 물론 그것 또한 병행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은 학생리더쉽에서 내려온다고 해도, 신앙활동을 빙자하여 해당 교수를 다시 초빙할 수도 있고,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 실례가 최모 선교사이자 교수이자 총장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지. 나는 그보다 근본적인 부분이 교육문제라고 본다. 지지세력이 하늘에서 새로이 툭 하고 떨어지지 않은 이상, 특정 교수의 가르침이 이처럼 지지를 받게 된 환경적 요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이미 조성되어 있는 이상한 신앙교육 때문인 것이고 사실 기존의 신앙교육이 특정 교수의 그것과 달랐는지에 대해 물으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jollyman의 글을 보면, 학교 초창기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난 몇 년간의 특별한 세력의 유입으로 인해 이같은 사건들이 발발하게 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같은 인식은 의아한 점이 많다. ‘내 사랑 한동’이나, ‘한동의 정체성에 대하여’같은 글들을 통해서 지적되는 신앙관의 문제는 지금의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한동의 과거에 대한 미화는 학교 지배층이 주로 사용하는 허구적 내러티브의 방법이다. 이번 신입생들을 느헤미아 세대라 칭하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라고 그러는데, 성경의 부분에 자신을 대치시켜 그 이전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단번에 시켜버린다. 이건 일종의 역사관에 대한 선점이자 세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허구적 내러티브의 일종이 ‘분열의 영’이기도 했다. 이건 한국 기독교가 자주 사용하는 내러티브가 차용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 ‘분열의 영’이라는 단어만 던지면, 그 언어가 의미하는 프레임 속에 인간들은 지배된다. 그 집단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당위 아래에서, 상대방에게 ‘분열의 영’에 대한 낙인과 ‘낮아지는 진리’, ‘섬김의 자세’를 요구했던 것은 별반 그리 다르지 않다. 그 말의 내용이 ‘낮아지는 진리’라고 해서 다른 점이 뭐가 있나? ‘낮아지는 진리’라는 말은 말해지는 진리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이 발화되고 상대방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순이다.
jollyman이 말한 포섭적 배재와 배재적 포섭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내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넘어가고, 다만 내재적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재적 관점에서의 비판방법은 대상이 되는 그 관점의 자의성과 허구성을 폭로하고 논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그 관점을 취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jollyman은 토론의 평행선을 이야기 하며 내재적 관점에 있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는 대강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대방과 똑같은 프레임으로 사고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미 사회에 그런 프레임이 조성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같은 언어를 이용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결국 기존의 언어는 껍데기일 뿐이고 정말로 실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에 딱 맞는 실체적 언어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분열의 영’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반발하는 이유 중에 또 한가지는, 그것이 바뀌어야 할 대상을 축소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분열의 영’이라는 표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학교 리더쉽이나, 교목실의 신앙교육은 비교적 그 초점에서 벗어난다. 지금 조사위가 학생징계를 운운하는 그것도 조사위가 사실은 그 ‘세력’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분열의 영’은 없다. 아니, 지금 현 사태에 대해서는 학교 전체가 ‘분열의 영’이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결론에 있어서는 모두 동의한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실천적 결론들이 가능하겠지만 사실 이정도 수준도 학우들은 못해내니까. 뭐, 주저리 주저리가 많네. 이런저런 사태인식들을 단박에 정리해 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과잉된 문제인식으로 쪽글로나 싸우고 있다. 이제 정말로 더 이상 이런 문제로 싸울 일 없을 것이다. 학기가 끝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