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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승진심사 관련한 소회

목요일, 3월 25th, 2010

인간이라는 것이 홀로 존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지라, 그쪽동네 소식이 들려옵니다. 거기다 해당 교수님들이 저에게 각별한 스승이신지라 더 수이 소식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떠난 자가 말이 많은 것이 추해보였고, 그것 또한 그쪽 동네의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령의 목소리가 만연한 이 공간에, 기록되지는 아니하고 흘러가기만 하는 이 공간에, 여기 또 흘러가버릴 유령의 목소리 하나쯤 더한다고 해서, 뭐가 그리 크게 달라지겠냐는 자기정당화에 체념을 더하며, 얄팍한 소회나 나눠봤으면 합니다.

김영길 총장이 말하는 위기, 그리고 그의 해법

여기에서 목소리를 내는 학우들의 우려와 김영길 총장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식은 확연히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위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 ‘위기’가 같은 위기는 아니겠지요.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위기’에 대처하는 김영길 총장의 결단은 문제제기하는 자들의 눈에는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는 꼴이니 말입니다.

김영길 총장이 가지고 있는 위기의식의 정체는 한동대학교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창한 위기가 아닙니다. “글로벌리더십전형을 신설하여 4년 전액 장학금을 제안했지만, 선정된 많은 학생이 결국 서울 소재 대학을 선택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대학이 입학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지방 사립대학으로 전락”한다면, “비전이 무슨 소용”이냐는 김영길 총장의 말은, 김영길 총장의 위기의식의 정체가 한동대학교가 한국의 세인들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는 외부적 기준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해결책은 우리의 ‘비전’이라는 서술이 잇따릅니다. 그렇다면 이 ‘비전’과 ‘정체성’의 정체는 뭘까요?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강화해야 할 정체성의 정체는 “한동에 소망을 품었던 학생들이 우리 대학으로 와야 할 이유”가 되는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항상 우리가 정말로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당위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서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객관적인 것에서의 패배, 그리고 정신승리, 그리고 또 그것의 객관화

한동대학교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타 학교와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재단이 없는 위기의 학교, 객관적 통계자료는 교수의 숫자도 적음을 보이고 있으며, 건물은 낡고, 지리상의 이점도 없는 학교가 자신을 교육서비스라는 시장에 학생들의 간택을 기다리는 재화로 내세웠을 때, 자신을 선택하도록 차별화 전략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될까요?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객관적인 물적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추상적 차원에서 차별화 전략을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한동대학교가 제시하는 학문-신앙-인성의 통합적 교육이라는 차원입니다. 거기에 실험적 영어강의 전산수업 실무교육 등을 차별적 전략으로 내세웠었지만, 이제 너도나도 따라하고 있는 실정에서는 학문-신앙-인성의 통합적 교육이라는 추상적 차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런 추상적 차원에서의 성과라는 것도 결국에는 한 측면은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계자료를 통해 충분히 비교할 수 있는 교수들의 논문 개제 횟수나 학문적 성과는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서 경쟁력 없음이 입증되어 버립니다. 이 때문에 학교는 말합니다. “우리는 논문 수를 적게 요구한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교육중심 대학’이라는 모토는 타 대학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연구력을 감추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측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교육과 인성교육이지, 학문교육은 아니게 됩니다. 거기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말하지만 학교측이 말하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의 귀결은 언제나 학문 없는 신앙입니다.

이 인성교육과 신앙교육은 또한 객관화 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한동대학교는 교육시장에 내 놓아진 상품 중의 하나이니까요. 그러한 객관화를 위한 시도 중의 하나가 예전에 논란이 되었던 ‘교수의 채플 참석 강화’였습니다. — 좀 너무 오래 되었나요? —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총장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목자 교수님’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둘의 내용이 너무나도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아마 감봉이 문제가 되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 요건이 승진요건이 되었네요. 이번 사건을 새로운 사건으로 여기는 학우들도 있긴 합니다만, 한동대학교의 표면적 신앙에 집착하는 강박증은 그 전통이 오래 된 것입니다.

자율전공 그 제도의 태생적 문제점

우리학교가 취하고 있는 자율전공이라는 제도는 그 유연함 만큼이나 예측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1학년 학우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 한 학부로 편중되는 현상이 생기면 곤란한 부분이지요. 많은 학우들의 선택을 받은 학부 차원에서는 ‘교수 1인당 학생수’가 커지는 불리함이 있는가 하면, 학우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학부 차원에서는 몇 명의 학우를 위해 학부가 운영되는 재화의 불균형 현상이 초래됩니다. 물론, 자율전공이라는 제도가 학생 입장에서는 장점으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만큼 그 예측불가능성을 넘어서는 그만큼의 돈이 요구됨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거기에 외부적 브랜드인 ‘취업률’을 깎아먹는 학부라면, 학교측의 입장에서는 골칫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한국사회의 제도적 변화로 더 이상 시장성이 없는 학부의 경우에는 더더욱 골칫거리겠습니다. 이런 이유들과의 연관성 하에서 이미 사라진 교육과정이 있겠고, 앞으로 사라질 교육과정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정교수 승진이 불허된 교수님들이 해당하는 학부가 이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저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자율전공의 취약성을 해결할 수 없는 한동대학교의 한계는 결국 해당 학부를 하나하나 없애는 방향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결국 자율전공이라는 우리 학교의 차별적 제도가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김영길 총장이라는 상징자본

김영길 총장이 장기 집권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이유도 결국은 김영길 총장이라는 상징이 가지는 자본적 성격입니다. 김영애 사모의 <<갈대상자>>와 함께 기능하는 김영길 총장의 ‘스승의 날’사건은 김영길 총장이 계속해서 교회에서 간증할 수 있게 하며, 이를 통해 ‘후원금’을 끌어 올 수 있게 합니다. 김영길 총장이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하더라도, ‘명예총장’같은 자리에서 계속해서 후원금을 끌어오는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등의 대안적 모델이 제시되는 이유도 김영길이라는 상징자본을 한동대학교가 버릴 수 없기 때문이겠습니다. 이는 재단이 없다는 한동대학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으로 여겨져 왔었습니다. 이는 또 우리학교가 얼마나 후원자에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번에 언급된 ‘후원자의 항의’가 총장의 판단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는지는 우리학교가 그 후원자에게 얼마만큼이나 의존하고 있는가에 비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학교에 후원할만한 후원집단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 다른 ‘위기’를 말하며

저는 해당 교수님들이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 쯤은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강직함과 어디 가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분들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한동대학교라는 집단입니다. 지난학기에 있었다는 경경의 수업 문제와 이번학기에 있었다는 국제어문의 수업문제, 그리고 잇따른 이번 승진심사문제가 과연 한동대학교를 교수가 있고 싶어 하는 학교로 만들지, 있고 싶지 않은 학교로 만들지는 명확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우려하시는 분들의 ‘위기’는 김영길 총장이 말하는 ‘위기’와는 다른 차원인 것 같습니다. 그저 교수임용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대학’이란 무릇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물음 또한 얽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위기’는 비단 한동대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저로서는 도저히 대답을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 고언에 관해

수요일, 6월 17th, 2009

http://i3.handong.edu/board2/craboard.asp?id=anybbs&no=33192

jollyman님이 마무리 글을 올려주셨다. 거의 모든 논점을 정리해 놓았다. 아무래도, 밤새 쓰시고 새벽에 올리신 듯한데 ㅡ;; 이 정도 까지 해주시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구체적 결론에 있어서는 특별히 태클 걸 것도 없다. 다만, 이것이 이전의 글과 연속성이 있는지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낮아지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분열의 영’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애초부터 피상적 단어인 ‘분열의 영’을 가지고 이야기 했으면서, 그것의 피상성, 관념성, 자의성을 비판한 이들에게 피상적 인식 혹은 저열한 인식이라는 공격을 하시는 것은 약간 억울하다. 그래도 어떤가. 이정도 정리해 주시면 정말 대단한 노고지.

tictoc의 글이나 내가 지향했던 결론지점들도 사실은 이 내용들과 만나는 지점이 많다. 그리고 이미 이야기 했던 것들도 많고, 사실 내가 보기에 새로운 내용은 없다. 내가 해당 교수만 퇴임시키거나 총학생회장단만을 탄핵했을 때,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책임만 일부 사람들에게 돌리고 표면적으로만 해결되는 것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이 도마뱀 꼬리 자르기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잔여하는 지지세력으로 지칭되어 비판되어 지고 있는데, 이 같은 부분은 그저 그들을 리더쉽의 자리에서 책임지우고 해임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부분은 아니다. 물론 그것 또한 병행되어야 하겠지만, 그들은 학생리더쉽에서 내려온다고 해도, 신앙활동을 빙자하여 해당 교수를 다시 초빙할 수도 있고,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 실례가 최모 선교사이자 교수이자 총장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지. 나는 그보다 근본적인 부분이 교육문제라고 본다. 지지세력이 하늘에서 새로이 툭 하고 떨어지지 않은 이상, 특정 교수의 가르침이 이처럼 지지를 받게 된 환경적 요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이미 조성되어 있는 이상한 신앙교육 때문인 것이고 사실 기존의 신앙교육이 특정 교수의 그것과 달랐는지에 대해 물으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jollyman의 글을 보면, 학교 초창기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난 몇 년간의 특별한 세력의 유입으로 인해 이같은 사건들이 발발하게 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같은 인식은 의아한 점이 많다. ‘내 사랑 한동’이나, ‘한동의 정체성에 대하여’같은 글들을 통해서 지적되는 신앙관의 문제는 지금의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한동의 과거에 대한 미화는 학교 지배층이 주로 사용하는 허구적 내러티브의 방법이다. 이번 신입생들을 느헤미아 세대라 칭하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라고 그러는데, 성경의 부분에 자신을 대치시켜 그 이전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단번에 시켜버린다. 이건 일종의 역사관에 대한 선점이자 세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허구적 내러티브의 일종이 ‘분열의 영’이기도 했다. 이건 한국 기독교가 자주 사용하는 내러티브가 차용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은데, ‘분열의 영’이라는 단어만 던지면, 그 언어가 의미하는 프레임 속에 인간들은 지배된다. 그 집단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위해 하나 되어야 한다는 당위 아래에서, 상대방에게 ‘분열의 영’에 대한 낙인과 ‘낮아지는 진리’, ‘섬김의 자세’를 요구했던 것은 별반 그리 다르지 않다. 그 말의 내용이 ‘낮아지는 진리’라고 해서 다른 점이 뭐가 있나? ‘낮아지는 진리’라는 말은 말해지는 진리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이 발화되고 상대방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순이다.

jollyman이 말한 포섭적 배재와 배재적 포섭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내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넘어가고, 다만 내재적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재적 관점에서의 비판방법은 대상이 되는 그 관점의 자의성과 허구성을 폭로하고 논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그 관점을 취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jollyman은 토론의 평행선을 이야기 하며 내재적 관점에 있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는 대강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대방과 똑같은 프레임으로 사고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미 사회에 그런 프레임이 조성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같은 언어를 이용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결국 기존의 언어는 껍데기일 뿐이고 정말로 실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에 딱 맞는 실체적 언어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분열의 영’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반발하는 이유 중에 또 한가지는, 그것이 바뀌어야 할 대상을 축소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분열의 영’이라는 표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학교 리더쉽이나, 교목실의 신앙교육은 비교적 그 초점에서 벗어난다. 지금 조사위가 학생징계를 운운하는 그것도 조사위가 사실은 그 ‘세력’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분열의 영’은 없다. 아니, 지금 현 사태에 대해서는 학교 전체가 ‘분열의 영’이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결론에 있어서는 모두 동의한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실천적 결론들이 가능하겠지만 사실 이정도 수준도 학우들은 못해내니까. 뭐, 주저리 주저리가 많네. 이런저런 사태인식들을 단박에 정리해 내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과잉된 문제인식으로 쪽글로나 싸우고 있다. 이제 정말로 더 이상 이런 문제로 싸울 일 없을 것이다. 학기가 끝난다.


졸업생

토요일, 6월 6th, 2009

내가 졸업생들의 개입을 전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말의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은데, 이곳에서 졸업생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전형성을 상징하는 언어가 한마디로 ‘한동인’이라는 그 추상적인 단어이다. 정말로 해롭다. 또 하나의 학부모 기도회가 되고 싶은 걸까?


저는 ‘외식’이라고 봅니다.

토요일, 6월 6th, 2009

방금 뉴스엔조이 기사를 보았습니다.1) 다른 것들 보다, 교무처 과장의 말이 눈에 들어오네요. 이 사태에 대해서 덤덤하고 솔직하게 우리의 시각(뭐 학교 직원들의 시각이라고 해도 괜찮고 학교 당국의 시각이라고 해도 괜찮고)을 반영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한동대학교 교무처 권상석 과장은 <뉴스앤조이>와 통화에서 "학교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크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내부 성명서가 외부로 유출되어 여러 단체에서 이용해 파장이 커졌다. 문제가 커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진상조사위가 조속히 해결하려고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_ 뉴스엔조이

이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학우들이 궁금해 했던 것은 누가 외부로 퍼다 날랐는지에 대한 관심이었어요. 물론, 성명서 내용 그 자체에 대한 비판들도 있었지만, 누가 외부로 이 같은 성명서를 옮겼는지에 대한 의문은 학우들의 정서를 삽시간에 지배했으며, 전학대회와 공청회에까지 이어졌죠. 아직까지도 그 외부유출자에 분노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로 인해 이 같은 분노의 초점은 김미영 교수 일인에게로 맞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성명서가 아주 특수한 경우였던 것일까?

지속적으로 지적되는 바는 우리 한동대학교의 문화적 특성상 박총명 총학생회장의 성명서는 그리 특별한 성질의 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들은 은퇴함의 글2), leekaps의 글3), 어떤이의꿈의 글4) 그리고 저도 이미 두 개의 글을 쓴 바 있는데, 그러고 보니 저도 참 집요하네요. 생각해보니 계속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였어요.

한번 질문을 던져 봅시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학내에서 이렇게 크게 논의가 되었을까요? 권상석 과장이 “크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 이야기 하는 것이, 저는 너무나도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보입니다. 만약에 자살에 대한 언급 없이,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언급 없이, 외부에 이용될 여지가 없이 그저 하나님의 대학이니 ‘기도회’라는 형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면, 학우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학우들의 비정상적인 외부시각에의 의식은 우리가 얼마나 ‘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몇 졸업생 분들도 활동하고 계시는데, 그 행동의 동기가 되는 정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한동인’이라는 정서에 대한 공유이고 그것이 그저 외부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것에 대한 반동 아닌가요? 혹자는 이걸 은어에 비유하던데, 솔직히 제가 볼 때 졸업생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을 지배하는 정서가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요. 박총명씨의 순수한 열정과 그 성질이 정말로 그렇게 다를까요? 그래서 저는 졸업생들의 개입을 해롭게 보고 있습니다.

학우 여러분들도 어떻게 외부에 빠져나갔는지, 김미영 교수에게 어떻게 조종당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그를 타깃으로 할 게 아니라, 학생 스스로가 비판적 시각을 가지지 못했을 때, 한 사람에 의해 얼마나 농락당할 수 있는지 스스로 반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조정자와 피조종자는 그 어느 한쪽만 탓할 수 없는 겁니다. 교수님 말씀이라면, 그리고 그저 신앙적 이야기라면 껌뻑 죽는 학우들의 무비판적 시각에 대해서 반성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이 같은 문화는 그저 편향된 신앙교육 뿐만이 아니라, 겉보기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태도가 심화시켰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리고 겉보기에 집착하는 우리의 태도는 지금까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지속적으로 보였던 태도이기도 하지요.

김미영 교수의 발언에 집중하는 것은 ‘낚이는’ 짓인 것 같습니다. 저는 김미영 교수의 횡수질이 마치 황우석의 언론플레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황우석 사태 기억하십니까? 황우석은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과학적으로 자신의 실험을 증명하려하지 아니하고, 기자회견을 열고 병원에 들어가는 등의 언론플레이를 감행했죠. 지금 김미영 교수가 횡수 유저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언론플레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젠 어이없게도 대변인까지 등장했네요. 지금 김미영 교수가 싹싹 빌고 사태를 해명해야 할 대상은 교원징계위원회 일 것입니다. 학우들에게 자신이 징계먹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행동이지요. 교수인 자기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항을 왜 학우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말을 붙이는 걸까요? 김미영 교수는 학우들이 자신에 대한 구명운동이라도 벌여주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제가 봤을 때 김미영 교수는 대화의 상대는 못됩니다. 학우 여러분들은 말을 낭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내부 성찰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글이 조금 산만하긴 한데요. 학우 여러분들은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져서 문제다.”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문제다.”라고 인식하실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시선은 잠시 신경을 끊으신 체, 정말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변혁을 위해 노력해야겠죠. 그건 우선적으로 학생정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어지럽혀져 있는 학생정치상황의 재정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교수사회에 어떤 개선을 요구하고 우리의 문화적 자정작용이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 뉴스엔조이, 「한동대 총학 성명서, 조선일보 출신 교수 ‘개입’」, 2009년 06월 05일 (금) 23:41:16,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63>

2) 은퇴함, 한동대학교 i3, 횡설수설, 학교관련, 32059, 「솔직히 억울하지는 않다..」, 2009-06-01, <http://i3.handong.edu/board2/craboard.asp?id=anybbs&no=32059>

3) leekaps, 한동대학교 i3, 횡설수설, 학교관련, 32136, 「박총명 하나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2009-06-02, <http://i3.handong.edu/board2/craboard.asp?id=anybbs&no=32136>

4) 어떤이의꿈, 한동대학교 i3, 횡설수설, 학교관련, 31693, 「이번 문제에 대해」, 2009-05-30, <http://i3.handong.edu/board2/craboard.asp?id=anybbs&no=31693>


대의와 여론

월요일, 6월 1st, 2009

또다시 방향조절용 뻘글


□ 아 정말, 글을 안 쓰고 싶은데 쓰게 만드네요. 짧게 요약하자면, 실질적 대의형성과 무관한 공청회에 힘을 쏟으시기 보다는 대의 형성에 실질적인 전학대회나 탄핵안 발의에 에너지를 쏟으시라는 부탁 같은 겁니다.

대의와 여론의 개념

대의와 여론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의라는 것은 그냥 간단히 말해서 대신하는 의견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대의라는 것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 실질적 효력을 가지고 있고 대표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여론이라는 것은 공중에 의해 지지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긴 하지만, 실질적 효력이나 대표성이 없습니다. 대의와 여론이 일치하는 것이 물론 이상적인 정치상태 입니다만, 결국 힘을 가지는 것은 대의라는 것을 무시하기 힘들지요. 이명박이 싫다고 국민 100%가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법에서 정하는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는 한, 이명박이 그대로 대통령인 것처럼, 대의제는 결국에는 대의가 가지는 힘이 더 큽니다.

물론 총학생회장의 성명서 발표가 ‘여론’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봤을 때, 총학생회장은 그저 대의를 행사한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그 내용적 측면에서 총학생회장 ‘개인’의 의견을 ‘총학생회장’이라는 이름 타이틀을 걸어 표방한 것이 그 권한의 남용에 해당한다는 의견도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그건 한 발짝 더 나아간 이야기이지요. 그저 형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총학생회장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그것 자체는 인정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 성명서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조금 더 세심한 논의이지요.

진짜 여론이긴 하냐?

그런데 저는 사실 한동의 ‘여론’과 ‘대의’가 불일치하는 상황인지도 좀 의아하네요. 물론 지금 횡수가 발칵 뒤집혀져 있기는 합니다만, 그게 정말 ‘여론’인지는 실증하기 어려운거 아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학교 다니면서 봐왔던 한동은 박총명 총학생회장의 성명서와 다를 바가 없었거든요. 05년도 채플 선지자 발언, 06년도 잔치회장 사태, 07년도에 있었던 차별법안 관련 성명서들, 작년에 있었던 도서관 열람실 말씀선포 사건 등등을 되새겨 보자면, 사실 박총명 학우의 성명서와 비슷한 수위의 일들은 학내에서는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충성스러운 댓글들을 보자면 학우들이 박총명씨의 의견에 융화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죠. (앞서 말한 사례들은 개개의 케이스가 다른 이야기들이라고요? 에이~ 글쎄요…)

정말로 여론이 그러하다면, 대의를 형성함으로써 실천적으로 증명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좀 비관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횡수에서 이야기하고, 대자보를 쓰고 비판 글을 열나게 날려보셔도, 대의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졸업생들이 아무리 성명을 날려도, 교수님들은 교수님들 대로 어떤 행동을 취하셔도, 님하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총장님이 오셔도, 한동대학교 총학생회라는 대의는 “분향소 설치에 반대하는” 고것 그대로 남아 있을 거란 말이죠.(한마디로, 똥딱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씀.)

평의회의 결정에 붙여

그런 측면에서 평의회의 공청회 개최는 실질적 대의 형성에 무관할뿐더러 오히려 해로운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공청회라는 것이 그 성질상 알권리 보장을 위한 행위지요. 그런데 지금 문제되는 사안이 학우들의 알권리가 보장되지 않아서 문제인게 아닙니다. 지금 사태는 ‘대의’와 ‘여론’의 불일치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학우 여러분들은 고조된 관심으로 공청회에 참석하시겠지만, 총학생회의 의견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그칠 뿐입니다. 이건 낭비에요. 평의회는 대의 형성에 보다 집중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결국 전학대회를 가야 합니다. 평의회에서 대의 형성과 관련된 권한이 ‘정책제안권’입니다. 이미 발동한 바가 있지요. 그런데, 이를 총학생회장에 거절할 경우 전학대회로 안건상정을 할 수 있습니다.

공청회와 같은 공개된 형식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의와 무관한 형태로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낭비입니다. 평의회 의장님께서는 ‘정책제안’을 총학생회측에 빨리 하시고, 총학생회의 의사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제가 봤을 때 이 ‘정책제안’은 이미 거부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다음에 빨리 전학대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 같군요.

그 이후에 전학대회를 공청회처럼 대대적으로 학우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장소나 장치를 배려하는 것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마치며

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조금 더 실질적이고 정치적으로 움직여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박총명씨의 성명에 대한 어떤 의견을 붙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만, 실질적인 효과는 거두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처럼 정치적인 판단과 절차는 박총명 개인에 대한 신앙적 판단이 되지 않아야 겠고, 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벌써부터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사실 박총명씨의 이번 행위에 대해서 제가 ‘용서’할지 여부를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것도 별로 와 닿지 않네요. 애초부터 저는 그의 신앙적 측면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저 ‘대의’와 ‘여론’이 일치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학우 여러분들은 무엇에 분노하십니까?

금요일, 5월 29th, 2009

조갑제닷컴이나 보수 언론사에 우리학교 언론 타버렸다. 꼴통 총학생회장 덕분에, 민망스러워 링크는 따로 걸지 않겠다. 이 글을 읽어보시면 키워드는 쉽게 추려내실 수 있을 터이니. 학우들이 분노하길래 약간 방향조절용 찌질글. 인트라넷에 올린 글을 이곳에 옮겨둔다.


오늘도 분노할 거리가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 분노가 일시적인 감정분출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총학생회의 성명 발표와 일련의 사태들이 별로 새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도 “우리학교는 기독교학교니까 당연한거다. 싫으면 니가 떠나라.”는 댓글도 보이고, “우리학교는 기독교 학교니까 분향소 설치에 반대하는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댓글도 보입니다. 사실 이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횡행하던 이야기들이 아니었나요. 저는 너무 많이 들어 그저 덤덤합니다.

대자보나 추모소 설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디서 튀어나온 ‘대자보를 붙이지 않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지배층의 이념에만 걸맞은 전통인지 자각하지 못한채, 후배들에게 계속해서 미화되어 가르쳐 지겠죠. 그렇게 미화된 가르침을 받고 성장한 총학생회 집행부가 일반 학우의 대자보를 무단 철거하는 것은──지난번에 도서관 사석화 방지를 위한 운동을 했던 학우가 적은 i3 글에서 봤습니다. 찾아보셔요──어찌 보면, 배우고 때로 실천하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죠.

사실 박총명 학우의 성명서나 그에 동조하는 학우들이 많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는 쉽게 이해가 가능합니다. 목사들이나 특정 정치집단을 쉽게 욕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우리 학교는 어디 그들과 달랐습니까? 한기총 성명서에서는 쉽게 우리 총장님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었고, 우리학교 교수님들의 신앙관이 그런 분들과 어디 많이 달랐습니까? 아니, 오히려 이승만과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교수님이 계시고 또 그 교수 밑에서 감명 받으며 자라난 후배들이 실제로 있지 않습니까. 박총명 학우의 성명서에 함께 이름을 올린 학우들 중 GEA나 GLS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단지 영어로 적혀있기 때문인 걸까요.

학우 여러분들이 박총명이라는 개인 하나에만 관심을 쏟고, 그에게만 비난하는 것에 열을 올릴 때, 지금 이 순간에도 제2의 박총명은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잠잠합니다만, 어딘가에서 기회를 노리며 박총명 학우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우들이 아마도 많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뇌, 교육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뇌. 저는 그 힘이 너무나도 무섭고 절망스럽습니다.

학우 여러분들은 이번 사건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감히 당부드립니다만, 이곳에서 감정분출만 하실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구체적인 방향으로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깝게는 학우여러분들의 대의를 행사할 수 있는 학부대표를 찾아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멀게는 한동대학교 신앙교육에 대한 고민, 그리고 과연 저런 교수들이 학우들을 가르치는 것은 한동대학교에 이로운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 등. 하실 수 있는 일이 많으며 해내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노무현의 장례식이 그저 푸닥거리로 끝나기를 바라는 그 누군가들 처럼, 우리의 이 같은 원성도 그저 감정분출로 끝나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요.


노무현의 자살

일요일, 5월 24th, 2009

노무현 자살에 대한 해석은 한가지뿐이다. 그 구체적 심리적 증상에 대해서는 전문가마다 견해를 달리하지만, 그 증상의 원인은 그동안의 검찰 수사를 통한 정신적 스트레스이다. 이는 사자의 심리를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받아들여지는 유서를 보았을 때도 명백하다.

사람들은 과연 그의 자살이 그 사람의 도덕성에 대한 부담 때문이기만 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지만, 종교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 원인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어제 내린 비가 노무현 자살의 원인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사태를 이해할 때, 자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노무현의 도덕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우선 한국사회의 정치 환경에 대해서 검토해 볼 수 있다. 노무현의 도덕성과 관련된 하나의 사실은, 당시에 기존의 정치권에 대한 도덕적 회의가 팽배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이 대통령 출마 당시 ‘차때기’등으로 대변되었던 정치권의 어떤 행태는 노무현이 ‘도덕성’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기존의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은 ‘도덕성’ 있는 지도자를 바라고 또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고, 노무현은 자신의 이미지를 ‘도덕성’으로 무장한다. 노무현 당선 이후, 별로 살 만하지 않았던 국민들은 ‘도덕성’이 먹고 사는데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정치인들을 평가할 때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노무현의 ‘도덕성’이라는 이미지가 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3가지 요소에서, 국민들의 요소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요소 그 무엇도 비난할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정치인을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과 스스로가 도덕적 정치인이고자 했던 노무현의 노력을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도덕적이었던 기존의 정치권과 정권 교체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끊임없이 노무현을 언론에 노출 시켰던 악의적 정권이 도덕성에 대한 검토에서 노무현 죽음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국민들의 과오 또한 있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바꿔야 할 짐을 노무현 홀로 감당하게 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사례만 하여도 그렇지 않은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혹은“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수준의 남 탓하고 그치는 정신승리가 되지 않으려면, 국민 개개인의 책임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우리의 무책임성에 대한 반성으로, 순수한 애도의 행렬조차 불법집회 운운하며 통제하려고 드는 정부에 대해 항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반성의 성격은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고뇌하는 그러한 형태가 아니라 광장에 촛불을 들고 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우리의 반성은 실천적이어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반성은 진정한 반성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노무현 죽음의 정치적 이용에 대해서 경계하는듯한 발언을 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죽음은 철저하게 정치적 의미를 지니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가장 엄숙한 추모이며 의지의 계승이다.


복제가능성과 저작권??

수요일, 5월 6th, 2009

너무 황당한 블로그 서비스

지겨운 토론 : RSS는 청약의 유인이 아니라 청약이다

IDG 라는 서비스가 RSS를 불러와서 블로그로 바로 포스팅하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나보다. 그런데, 이 툴의 문제점은 그 글이 어디에서 흘러들어왔는지, 누가 원 저작자인지도 명시하지 않고, 자신이 포스팅한 것 마냥 게시된다는 것이다.

떡이떡이의 경우 한RSS같은 공개형 RSS리더랑 IDG를 동일선상에 놓고 IDG를 욕하려면 한RSS도 함께 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는 좀 촛점을 잘못 짚은 듯 하다. 한RSS의 경우 공개형이라고 하더라도 원문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이며, 원 저작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고 보여주는 형태인 것이다. 하지만 IDG의 경우 남의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전문 전체를 게시해 버릴 수 있는 형태이다.

이미 RSS 를 불러 들어와서 포스팅 할 수 있도록 하는 툴은 있다. 내가 쓰고 있는 sweetcron의 경우 코드만 살짝 수정하면 남의 RSS를 불러와서 마치 내가 포스팅 하는 것 마냥 블로그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lifestream이라는 원래의 목적대로 쓰여야 하지, 남의 저작물을 마치 내가 저작한 것 처럼 보이기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검색 로봇도 그러하다. 검색로봇은 웹상의 모든 정보를 끌어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시켜 검색엔진은 어느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검색엔진이 자료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보여주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자료인 마냥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복제가능성과 저작권에 관한 논쟁은 유구한 논쟁역사를 가지고 있고, RSS서비스에만 국한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자신의 저작물을 지키고 싶어하는 블로거들의 욕구를 단지 이기적인 욕망이라고 그렇게 쉽게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식중독

화요일, 4월 28th, 2009

http://news.kbs.co.kr/article/science/200609/20060929/1228879.html

“2명 이상의 식중독 환자를 진료한 의사는 반드시 보건소에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반복되는 늑장보고와 안이한 대처… 식중독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윱니다.”

식중독 걸린 사람 많은 것 같은데, 빨리 보건소 신고 하시길.


목수정 정명훈

일요일, 4월 5th, 2009

목수정과 정명훈 사태가 생각보다 길게 가는데,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가 늘어질지 몰랐다. 목수정씨가 계속 이야기 하려고 의지를 불태워서인지, 한마디라도 더 보태려는 인사들 때문인지는 몰라도(나도 그중 하나인가?), 그냥 목수정씨 조금 욕먹고 마무리 될 것 같은 일이 질질 끌면서 회자되고 있다.

내가 목수정씨가 레디앙에 글을 올린 것을 보고 든 생각은, ‘그러니까 정명훈이 서명 안 해 줬다는 것이군.’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목수정씨를 비난하는 반응들도, 비록 그 속에 부당함이 있겠지만(사실 언제나 일정 수준의 부당한 비난은 인터넷에서는 여사),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I. 지사정신

capcold님이 지사정신에 대해서 언급한 것처럼, 지사정신의 문제는 단순히 자신이 희생적 태도를 갖는 것(이건 그냥 희생정신이라고 하자)이 아니라, 자신의 당위에 타인들이 아주 당연히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 ‘당연히’ 앞에는 어떤 설득이나 대화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폭력이나 강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목수정씨가 레디앙에 기고한 글 말고도 그에 따른 주석 글(나는 처음 이 글을 그의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지금은 삭제되었다. 진보신당 게시판에서도 찾을 수 없구나.)을 살펴보면, 그 주석 글 속에도 목수정씨의 지사정신을 살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나라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동의하는 사실이므로,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의 음악인으로서의 양심과 상식이 움직여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했고, 만약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술가적 양심마저 버린 그를 비난하면 된다. 결국 찾아가서 잃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서명 해주지 않으면 모두 욕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식의 지사정신이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지사정신이 깔려 있다 보니, 애초에 ‘오페라단 해고에 반대함’ 이라는 주제가, ‘오페라단 해고에 반대하지 않는 정명훈은 나쁜 놈’, ‘오페라단 해고에 반대하지 않는 정명훈은 나쁜놈 이니까 정명훈에 맞서야 됨’, ‘오페라단 해고에 반대하지 않는 정명훈은 나쁜놈 이니까 정명훈에 맞서야 되는데, 진보신당도 이에 동조해야 함.’까지 전개되는 것이다. – (응?)

II.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

그런데, 허지웅의 글도 있더라. 원래 애초부터 정선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목수정에 관한 주제로 점프(?)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허지웅이 정선희의 복귀에 대해 언급한 것은 동조하지만, 약자와 강자라는 프레임에 무조건적으로 목수정을 끼워 넣을 수는 없다. 정선희의 경우 그가 당하는 사건들이 부당하지만, 목수정의 경우 그 지적들이 자신이 초래한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선희와 목수정 둘 모두를 약자라고 인식한다 하더라도 그 둘 모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한다. 결국 논의는 다시 목수정과 정명훈.

허지웅의 이 글에 따른 박권일의 글은 이것을 지적한다. 허지웅의 글도 ‘오페라단 해고에 반대함’이라는 “예술노동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목수정과 정명훈의 전선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페라단 해고에 관한 이야기보다 목수정 이야기가 더 많은 듯.)

흥미로운 것은 허지웅의 글에서는 “약자에 대한 연대의 필요성은 좁쌀 만한 최소한의 요구고 필요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사실 이것도 빤하고 식상하며 당위만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 허지웅씨가 열라게 까대는 빤하고 식상하며 당위만 있는 주류 좌파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이 ‘좁쌀 만한 최소한의 요구고 필요’라고 생각하실 건 아니냐는 말씀. 결국 우리는 ‘빤하고 식상하며 당위만 있는 것은 아니된다’라는 것 또한 ‘빤하고 식상한 당위’의 일종이라는 것을 재확인, 결국 주둥아리로 할 수 있는 것은 당위 밖에 없다는 말씀.

III. 그러니까 다시 본래 주제로

나는 목수정씨 레디앙 글 보다 이 글이 좋더라. 그러니까 다시 기억할 것은, 애초에 ‘오페라단 해고에 반대함’ 이라는 주제. 참 멀리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