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속의잡설' Category

pidgin

목요일, 6월 11th, 2009

pidgin으로 nateon 대신하기: http://qaos.com/article.php?sid=2789

pidgin 공식 홈페이지: http://pidgin.im/

pidgin nateon protocol 제작자 홈페이지: http://kaisyu.ohpy.com/

nateon 메신저를 버리고 pidgin을 이용하고 있다. pidgin은 여러 메신저 프로그램을 하나로 통합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프리웨어이다. 이 프로그램에 플러그인만 깔면 nateon도 함께 사용할 수 있다. 파일전송이나 기타 기능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대화를 주고 받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점차로 nateon은 버릴 생각이다. 사실 최근에도 접속률이 높은 편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nateon은 메신저 프로그램으로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지나치게 기능이 많고 무겁다.

뭐 어찌 되었건, pidgin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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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Google Talk, MSN, Nate-On 계정은 모두 virtuemace@gmail.com 이다.


이런

수요일, 6월 10th, 2009

집에 처박혀 글자나 읽고 밥이나 축내는 놈에게 무슨 욕망 따위가 있었겠어. 아, 뭐랄까. 웅녀가 쑥갓을 먹으며 동굴에서 99일을 지냈는데, 느닷없이 동굴이 무너진 기분이랄까. 그저 가슴 빈곳에 먼지처럼 쌓이는 얄팍한 고독을 농축하며 그 채움으로 그저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디 산들바람 불어와서 그 얄팍한 고독마저 걷어내어 가는 그런 기분이잖아. 내가 내공이 부족한 거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농축된 고독으로 내 스스로가 충만하지 못한 내 내공부족인 거지. 이럴 땐 졸라 찌질한 노래를 부르다, 어느새 갑자기 홀로 다그쳐 살아가자고 우리에게 말하면서도, 완벽한 너나 참으라며 그 약을 찾고, 매일 아침 눈물을 흘리는 우리 소라 누님의 노래를 들어 주는거지.

이소라 track9


미끌미끌

화요일, 6월 9th, 2009

비가 온다.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런 날은 좀 좋다. 비가 오는 날이면, 줄도 함께 미끈거리기 때문에, 줄도 발에 잘 걸리지 않는다. 미끌미끌, 이런 날은 꽤 줄넘기 속도가 빠르다.

저녁에 줄넘기를 하겠다고 집 뒤 초등학교에 갈작시면, 초등학생은 아닌 듯 보이는 몇몇 학생 무리들이, 담배를 피거나 힘자랑을 하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은 또한, 이런 이들이 없어 좋다. 물론 집 뒤 초등학교가 나 혼자의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적막 속에 줄넘기를 하고 있자면, 저런 이들의 시선이나 북적거림이, 나의 고요를 침해하는 듯도 느껴지기에 유쾌하지만은 않다.

집뒤 초등학교

오늘은 초등학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초등학교에는 호랑이 코끼리 기린 사자 등 등. 어린아이들이 타고 놀기에 좋은 동물 상이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 어린 아이들이 그런걸 타고 놀작시면, 선생님들은 타지 말라고 혼내곤 하겠지. 유혹하고, 징계하고. 그냥 좀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호랑이 코끼리 기린 사자 등 등. 그것은 징벌을 위해 존재한다.


기억

화요일, 6월 9th, 2009

기억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다. 우리가 전자기기를 통해 우리의 기억들을 뇌 바깥으로 옮겨놓는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참 반가운 일이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괴로워 하기 보다는 간단하게 지워버림으로써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기록은 미덕, 기억은 금물.


총학생회장 탄핵되면

월요일, 6월 8th, 2009

총학생회장 탄핵되면 기부금 끊겠다는 전화가 비서실 쪽으로 온 바가 있단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도 탄핵까지는 안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는데. 사실은 가장 깨끗한 척 하면서 가장 썩어 있는 것이지. 초 교파를 운운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초 교파적으로 돈을 끌어 오겠다는 의도 아니겠어. 결국, 그렇게 돈에 이끌리다 보면, 돈 많은 기득권 세력과 손 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게 뉴라이트나 조갑제가 아니라는 법이 어디에 있나. 정말 절실히 느끼는 거지만, 대학은 썩었어.


한동대 총학생회 탄핵안 발의

목요일, 6월 4th, 2009

한동대학교 총학생회 탄핵안이 발의되었습니다.


신교수

토요일, 5월 30th, 2009

우리학교 어느 학부에 신 교수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글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꽤나 격렬한 측면이 있다. 얼마 전에 지인의 미니홈피에 들어갔다가, 그의 격렬한 글을 보았다. 황석영과 관련된 글이었던 것 같은데, 변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 교수는 변절에 대한 주제로 몇 번을 글을 쓴 것 같다. 비슷한 주제로 친구들이 스크랩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쉽게 써버리는 미니홈피의 성격 탓인지, 예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레퍼토리였다.

그의 글을 보자면, 현실에 엄청 투철하게 분노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글 자체는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변절하면 제자들이 자신의 방문에 못 박으라는 요구까지 서슴없이 한다. 나중에 변절하면 방문에 못 박으라는 말은, 지금 자신은 못박을 정도는 아니라는 자뻑성 평가를 전제하고 있으리라.

내가 아는 한 그가 철저하게 분노했던 경우는 제자들 혼낼 때 밖에 없었다. 언론이 문제면 기존의 언론사에 들어가서 바꾸어야만 한다는 보수적 시각에서부터, 기득권의 행위는 ‘자신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다는 비겁한 시각을 가지신 분께서, 분노를 그런 식으로 소비하시는 것이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또 제자들은 그걸 보고 칭송하겠지.


노무현을 이용해야지

목요일, 5월 28th, 2009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도 며칠이 지났다. 애초부터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말은 노무현을 우상으로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엄숙주의’로 명명할 수 있는 그 정서가 노무현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정서는 망자에 대한 예의 앞에서, 그의 수단화를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것은 현실을 가린다. 노무현 죽음을 고귀하게 포장할수록 멀어지는 것은 현실이다. 서울시장이 ‘노무현의 고귀한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선 안 된다.’며 추모소를 철거할 때, 그는 정말 ‘고귀’한 죽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그를 그저 좋은 인물로 묘사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무현 죽음의 성격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보고 그 현실 속에서 저항하겠다는 의미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공권이 사권이 된 현실을 반영한다. 신영철 대법관 사태나 30원에 자살하는 노동자가 이와 무관할까. 때론 경제력으로 때론 공권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정권의 폭력성이 과연 죽창보다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그 노무현을 이용할 수 있을지 점점 회의가 밀려온다. 노무현의 죽음은 장례식 푸닥거리가 끝나면 모두 망각되어지듯. 그 죽음의 성격은 망각될 것만 같다. 그런 절망은 노무현을 우상화하는 빠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진보진영에서 느껴진다. 노무현의 죽음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 깽판이라도 쳐야 할 집단인 민주노총이 노무현을 추모하기 위해 파업을 미루기로 했단다. 그들의 투쟁방식이 그런 식이었나? 열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파업을 미루는 그러한 방식이었나?

노무현을 추모하는 이 사이에,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외롭게 투쟁하고, 한예종 학우들은 힘겹게 싸우고 있다. 이 ‘엄숙’이 나는 싫다.


세뇌와 공포

수요일, 5월 27th, 2009

얼마 전에 <박쥐>를 보고 글을 썼더니, <열녀의 탄생>저자 관련 인터뷰를 알려주시더라, 그 관련되어 던져졌던 질문이, 우리의 욕망들이 학습되지 아니한 욕망이 없으니 결국 그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과 관련하여 강유원 서평이 있다. 서평을 읽어보니, 850쪽에 달하는 책 내용은 모두 “모든 것은 조선을 지배했던 남성-양반의 의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릿 속에 주입할 텍스트를 편집과 조작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고 국가 기구를 통해 인쇄하여 의도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5백 년에 걸쳐 유포했다. 그 결과 그 텍스트들은 여성의 대뇌를 차지하고, 여성의 행동과 의식을 통제하게 되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들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모든 학습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강유원 서평에서 이야기 하는 ‘세뇌’와 같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것을 ‘텍스트’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니 갑작스레 ‘성경’ 이 떠오른다. 최근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계속되어 왔던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참으로 절망스럽다. 총학생회의 참으로 애도 섞인 성명에 강유원의 서평 끝머리가 너무 강렬하게 와 닿는다.

텍스트가 세뇌의 기능을 하고, 그 텍스트가 또한 ‘교양의 함양’이라는 자의적 판단에 휘둘릴 때,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읽으라는 권면을 할 수 있을까? 그 책에 세뇌된 스스로가 또 다른 인물을 세뇌하기 위한 권함은 아닌가. 그것은 또 어떤 권력에 봉사하는 것은 아닌가.

<열녀의 탄생>은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책은 어떻게 권해져야 하며 또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잠이나 자련다

화요일, 5월 26th, 2009

아마,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은 ‘장례만 끝나면 보자.’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인간적인 예의 갖추는 사이에, 북한 미사일 실험으로 덮어 보고자 하시더니, PSI까지 참여하신다. 이렇게, 일들을 만드시는 분들 앞에서는 ‘인간적 추모’의 그 짧은 순간마저, 길게 느껴질 뿐이다. 아니, 그 ‘인간적 추모’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 정치성에 앞서 ‘예의’를 강조함으로써 그 정치성을 감추고 은폐하는 권력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감상에의 강요일지도. 세상은 참 빨리 뜨겁고 또 빨리 식는다. 나는 잠이나 자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