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교수님 수업을 정식으로 수강한 적은…

2009. 9. 20. 21:46
류교수님 수업을 정식으로 수강한 적은 없다. 학점관리를 워낙 엉망으로 해둔지라 타 학부 수업을 정식으로 수강하는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거의 끝물로 <텍스트와 문화>, <기독교 고전강독>같은 토론수업(?)을 교수님께 허락을 득하고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참석했었다. <텍스트와 문화>의 경우에는 박민규의 소설로 발표도 했었다. 학교에 있던 마지막 학기에는 "니놈이 기어이 내 수업을 수강하지 않고 졸업하겠다는 것이냐?"는 교수님의 특유의 미소가 가미된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그밖에도 <역사와 인간>, <기독교 역사>(이건 수업 이름이 기억이 정확하게 안난다.), <문화예술사>(이것도 수업 이름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아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책을 일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업이었다.)같은 수업들을 아주 가끔 청강했었다. 강의식 수업과 토론수업은 그 즐거움이 달랐는데, 특히 토론수업 도중에는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몇번 있었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는 학교 행정당국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교수님은 학생들이 제출하는 페이퍼의 내용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신앙적 이야기로 페이퍼의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교수님께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의욕이 안생긴다는 말씀도 했었던 것 같다. 이미 계시적으로 은혜받아 세상의 진리를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이상 가르칠 것이 무엇이 있냐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자신이 가르쳐도 되겠냐는 이야기였다.

휴대폰

2009. 9. 20. 11:13

휴대폰을 조만간에 정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음. 기타등등의 시기까지는 전화를 정지하는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전화가 되지 않으면 그리 알고 계시도록, 연락은 메일이나 방명록을 이용하면 되겠지요. 이곳을 찾아오는 수고마저 불필요한 관계라면, 잠시 쉬는것도 괜찮을듯.


라이브

2009. 9. 17. 15:00


영화::시간은 거꾸로 간다::노안으로…

2009. 9. 15. 15:07
영화::시간은 거꾸로 간다::노안으로 태어난 아이가 노안 때문에 집에서 버려지지만 노안 덕분에 편히 빌어먹다, 죄책감을 느끼던 생부가 남긴 유산으로 또 편히 살다. 이제 늙어서는 동안으로 빌어먹다가 죽는 이야기.

상상력이 희망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9. 9. 15. 11:45
상상력이 희망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그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상력이라는 말은 내용이 없는 말이다. 배울수도 없다. 차라리 신의 계시가 좋겠다. 그건 기도라도 할 수 있으니.

이성,행복

2009. 9. 11. 22:18

사실 우리는, 교양을 갖춘 이성이 인생을 즐기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진정한 만족에서 더욱 멀리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더 정확히 말해 이성을 사용하는 데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이성혐오증Misologie,  즉 이성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데, 그들이 솔직하다면 이를 고백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잘난 체하기 위해 발명해낸 기교들의 장점이 아니라, 학문에서(그들에게는 결국 마찬가지로 지성의 화려함으로 보이겠지만) 나온 모든 장점들을 저울질해보아도, 사실 행복을 얻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고통만 짊어졌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단순한 자연 본능에 더 잘 이끌리고, 모든 행동에서 이성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 더 평범한 부류의 인간들을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_ 임마누엘 칸트 著, 이원봉 譯,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서울: 책세상, 2002), 30-31p.


學,思,多讀,多作,多商量

2009. 9. 10. 12:06

글 읽기와 글쓰기는 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이 사실 그렇게 외따로이 떨어진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가령 읽기만을 생각할 경우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 글을 써보는 것이 글을 체계적으로 읽는데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억에도 오래토록 남는다. 쓰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쓴다는 것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쉬이 쓰는 것이 아니라, 퇴고 작업이 수반되는 바, 그것은 자신의 글을 읽고 문장을 평가하는 것이다. 읽기(讀)를 학(學)에 대입하고 생각(商量) 을 사(思)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면, 공자가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본디 학이라는 것은 사(思)라는 것과 따로 떨어질 수 없겠지만, 여기서 공자는 어떤 지양해야 할 학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사와 대립시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옳은 학(學) 개념 속에는 읽기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다작 다상량이 함께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 아마 이 경우 외에 공자가 말하는 학(學)의 개념 속에는 다작 다상량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작(作)또한 상량(商量)과 결코 별개의 것이 될 수가 없는데, 작(作)이라는 것은 결국 상량(商量)한 것을 구체적 문자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물컹거리고 말이라는 것이 미끈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그저 머릿속에서 생각해 본다는 것은 구체성이 떨어지는 바, 홀로 머릿속에서만 살 것이 아닌 바, 언제나 언어화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작(作)이라는 행위로 실천(習)해 보는 것이다. 결국 독(讀)은 작(作)과 병행되어야 하고, 작(作)하기 위해 상량(商量)하게 되고, 때론 상량(商量)하기 위해 독(讀)하기도 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읽기만 읽을 게 아니라, 그것에 관해서 써보기도 해야 할 것이며, 쓰기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하여 읽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박재범, 민족주의, 언론

2009. 9. 09. 20:29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떡밥 제공자? ㅡ;

오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연구주제에 관한 이야기. ‘민족주의와 언론’ 이야기 하다가 그 단어의 광범위함에 손발을 오글거리며─이건 흡사 ‘존재’를 사유하는 듯한─”박재범 쓰면 되겠네.”라고 말했다. 박재범 유승준 이현도 등등을 경우경우로 비교해서 그 담론이 확산되는 대에 언론이 어떤식으로 기여했는지를 살피면 뭔가 꺼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특히 박재범의 경우 마이스페이스라는 SNS에 적은 기록이 문제되는 고로, SNS를 언론이 어떤식으로 이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이런거 생각해보면, 기술의 발전─인터넷 환경─이 기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괜찮은 주제인듯.

유승준 이현도까지 갈 것도 없이 박재범만해도 다양한 층위에서 논할 수 있겠네.


2009. 9. 05. 22:15


경향닷컴 | “삼성 유럽서 물건 팔려면 노동조합 허용해야 할 것”

2009. 9. 05. 19:58

경향닷컴 | “삼성 유럽서 물건 팔려면 노동조합 허용해야 할 것”.

“삼성에 한마디 한다면 ISO의 사회책임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유럽의 소비자들은 삼성의 ‘무노조’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실태를 아는 순간 NGO 또는 언론이 유럽의 소매상들에게 삼성 제품을 팔지 못하도록, 소비자에겐 사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다. ISO26000 제정과 시행을 계기로 노동권 보호를 포함한 사회책임 전반에 대한 관심과 감시가 제고될 것이다. ‘무노조’는 문제가 될 것이다. 결국 삼성이 노동조합을 허용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