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생활관규정
2006. 11. 10. 00:00생활관 규정 강화 관련된 대자보 두편
그저 읽고, 정리하고, 가끔 불평할 뿐이지요.
생활관 규정 강화 관련된 대자보 두편
인간은 가끔 자신이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양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관계에 있어서도, 강자와 약자, 혹은 가학자와 피학자의 도식 사이에서 스스로를 강자, 가학자로 인식할 때가 있다.
불사조는 죽지 않는 새가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새다. 그 새를 죽이는 자는 분명 죽였겠지만, 새는 다시 살아나기에 죽인 것이 아니다. 불사조를 죽였다고 인식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불사조를 죽일 능력이 있다는 대단한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간을 단련시킨다. 고통’만’이 인간을 단련 시키는 것은 아니나, 고통을 통한 인간의 부수적 노력들을 통해 인간은 단련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고통을 ‘훈련’으로 미화시키는 폭력적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승화된 인간에게는 그 고통은 분명 ‘훈련’으로 보일 것이다.
한때 약자였다고 하여, 언제나 약자인 것은 아니다. 강자가 폭력을 행사했다고 하여, 혹은 상처를 주었다고 하여 그는 언제나 그 상처를 가지고 살지는 않는다. 그것을 승화시켜 오히려 거듭 태어날 수도 있다.
실지로 우리에게 약자였던 자는 어찌 살고 있는가? 우리가 ‘잘못’을 행한 사람은 어찌 살고 있는가? 그에게는 이미 그것이 극복되었을 수도, 잊혀진 과거일 수도 있다.
우리가 대단한 존재인 양 오만에 빠지지 말자. 우리는 그에게 가학할 능력조차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피학자가 과거에 얽매여 계속해서 고통속에 살 것이라는 생각 또한, 피학자의 재생능력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한 것이다. 현 상황에서 오히려 그에게 사죄함은, 대단한 교만이요. 폭력이다.
2006년 바나나빵 주최 5.18 영상회 찌라시 기고문
패자를 위한 변명.
5.18 : 폭력으로 점철된 국가와 시민의 싸움, 민중의 철저한 패배. 인간의 잔학성을 확인케 한 지우고 싶은 기억. 이제는 역사.
인간은 폭력적이다. 삶 자체가 죄악이며 폭력이다. 인간 문명을 유지시켜주는 많은 요소들은 인간 외의 종(種)들을 배제한다. 종의 범위까지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폭력들을 행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그러한 인간사이의 폭력만이라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서로에게 행사되는 폭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필요로 하며, 민주주의는 대화를 위한 절차들을 거추장스럽게도 만들어 놓는다.
‘근대화’의 틀 속에서 한국 역사를 바라본다. 근대의 ‘주체’, 그 속에는 민주주의 또한 포함되어 있다. 광복 이후, 혹은 광복 이전, 멀게는 조선시대까지, 각자의 주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들은 민주화의 도정 속에 있다. 대화할 수 있는 자격, 권리를 갖는다는 것. 비록 이기적일 수도 있으나, 그것 또한 민주화 운동이다.
한국 현대사의 2대 민주화 운동은 4.19와 5.18을 들 수 있다. 4.19는 ‘승리’한 투쟁이었고, 5.18은 ‘패배’한 투쟁이었다. 4.19는 이승만의 하야로 절정을 맞는다. 승리한 투쟁은 그 이후에 에너지를 갖기 힘들다. 눈으로 ‘보이는’ 이승만의 하야를 이루어 낸 이 사건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노력으로 지속되지 못하였고, 박정희 독재를 방관하게 된다.
하지만 5.18은 다르다. 비록 패배하였으나,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패배하였기에 국민들은 더욱 목마를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87년 6월 그 이후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다.
하지만 아직도 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는 대추리 사태는 국민이 얼마나 대화의 상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추리 에서의 시민들과 전경의 대치. 눈앞에 ‘보이는’ 폭력의 더러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몽둥이와 방패에 맞서, 우리 또한 ‘보이는 것’을 수단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더럽게, 때론 투박하게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명제는, 이미 존재하는 폭력, 이미 행해진 폭력을 정당화 하는 명제이다.
우리는 좀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생활관 제도 개선에서부터, 등록금 책정까지. 대화의 상대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 자체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다. 절대 우리의 ‘주체’됨을 놓아서는 안 되겠다.
패배한다고 하여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의 5월도 87년의 6월을 위해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렸나 보다.
채플 규정 관련된 논쟁글들.
내가 말하는 문제란,
‘내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문제이다.
오랜만에 서울에 다녀왔다. 10월 3일은 빨간날. 그리고 그 전 날은 일요일. 사람들이 터질듯이 많은 거리, 그래도 처음은 아니라 덜 어색하다.
공부모임. 다른 전공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한국역사를 바탕으로 하여 어찌되었든,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 것.
다른 학문을 한 사람이 한 사안을 보았을때의 시각차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 그러한 서로의 시각차를 경험하는 것이 모임의 목적. 원론적 학문을 하나하나 배울 수는 없을지라도 자극이 될 것을 기대한다.
공부가 뭐냐는 기초적 질문을 던져보았다. 누가 말했듯이, 준비하는것. 공부하는 그것이 이용될 때를 기다리는 것. 학문은 어찌되었든 미래지향적이며, 미래지향적이어야만 한다. 과거나 현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죽은 학문. 개인적인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깐죽거림이 머리속에서 떠오른다. 어쨌든, 함께 공부하는 것의 효용성에 대해서 정리해 볼 필요를 느낀다.
모임 다음 날 들른 곳. 연구공간 수유+너머.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지속적으로 다른 것들을 배우며, 토론한다. 지적 분위기, 자발적 분위기. 단지 궁구하는 자들이 모인 제도 바깥에서의 지적 교류에서 역동성을 느낀다.
오고가는 곳에는 노숙자가 보인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와는 달리 더욱 눈에 띄는 듯 하다. 특히나 노숙자가 쉬기 좋은 지하철역. 그들도 해가 지는 시각 차가운 돌바닥 위에 박스를 펴 깔며, 다음 날을 준비한다. 하물며…
어쨌든 산다. 사람이 너무 거시적이 되면 삶이 시시하게 보인다. 나도 그 노숙자들 처럼… 모래가 아닌 내일을 생각하며 살아야 겠다.
세상은바뀌어야한다.그런데우리가생각하는대로바꾸려하면,세상은그말을들어주지않는다.그래서우리는힘에부쳐세상이들어주는것들만을요구하게된다.그리고선생각한다.우리는변화시켰다고.이미세상이들어줄만큼진보한상황에서들어줄만한것을요구한다면그것은과연우리가변화시킨것일까?이미사회는진보하여받아들여질만큼성장한상태에서받아들여질것들만을요구한다면그것은시간이사회를변화시킨것인가타인이사회를변화시킨것인가우리가사회를변화시킨것인가.그래서68년도그목소리가생각난다.
"불가능한것을요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