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 지우기 쉬

2009. 8. 15. 11:53

기억보다 지우기 쉬운것이 기록이겠지만, 흐려지는 기억을 다시 다잡는 것도 기록이다. 집청소를 하다가 구석에 처박힌 먼지앉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처럼, 구석 어딘가에 처박힌 폴더의 사진을 발견한다. 몰래몰래 흐릿하게 촛점없이 날림으로 찍은 사진들. 잊은 기억인건지 잊어야할 기억인건지, 잠시잠깐 괴롭다. 기록은 어떻게든 기억에 촛점을 만든다. 기억과 이야기들 보다 기록과 문자가 승리했던 이유는 기록과 문자가 의식을 모아주기 때문이리라. 기록이 의식을 모으고 다시 일어난 기억은 그 안의 인간을 보게 한다.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괴롭고 우울한 일이다. 타인의 삶을 그저 바라보는 그것 만으로도  버겁다. 하지만 그 버거움은 결국 내 의식의 내 이해인 한에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 나에게서 흘러 나오는 버거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생명인 한에야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버거울 것이다. 나는 차라리 사물이고 싶다. 솔직히 말해 나는 더이상 의식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있는 의식마저 버리고 싶다. 나는 차라리 사물이고 싶다.


국내 웹서비스는 전

2009. 8. 13. 23:24

국내 웹서비스는 전체성을 갖고 그에 잇따른 폐쇄성. 외국 서비스는 개별성을 갖고 그에 잇따른 개방성 전문성. 미투하는 사람은 미투만 하고, 싸이하는 사람은 싸이만 하고…. 전체성은 편리하지만 개별 전문적 서비스를 선택할 기회를 박탈하고, 그 박탈이야 말로 서비스 제공자들의 고객 붙들어놓기 전략. 어떤 서비스를 만들고 어떤 서비스를 선택하는지는 사람의 관점을 반영하는듯.


2009. 8. 12. 19:53

50대랑 20대는 같이 살고, 386은 10대랑 살지.


2009. 8. 11. 03:01

쓴물 올라온다. 조만간에 위장에 또 탈 한번 날듯. 생활이 바뀌어서 그런지 육체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오늘은 한겨레의 표지이야기를 읽었다. 88만원 세대의 사랑에 관해서 많이 다루는 듯.[1, 2, 3, 4]

뭐, 여러 생각이 많이 들긴 했는데, 88만원 세대라고 일컬어 지는 집체—아마도 대다수라고 여겨지고 대다수이기 때문에 사회문제로 받아들여지는—의 다수성에서 오는 ‘평범’과 그들이 추구하는 ‘평범’의 간극은 무엇일까? 그들이 추구하는 그 ‘평범’의 상은 그들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평범’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IMF 당시의 줄도산 그리고 잇따른 이혼률 급증. 사랑은 경제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삶으로 체감.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낭만성의 파괴. 그 이후, 결국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에게 철저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결단. 그 이기적 결단 때문에 자신의 스펙 쌓기, 경제적 소비가 두려워 사랑을 못해. 사랑을 위해 이기적 인간이 되었지만, 결국 이기적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모순. 그들이 추구하는 ‘평범’은 영원히 사랑하자며 알콩달콩 사는 구세대적 인간들의 상이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러한 인간들이 되어먹질 못하잖아. 떡을 치면서도 모텔비가 걱정이 되고, 모텔비 많이 써서 돈 없으면 사랑이 떠나갈까 전전긍긍. 얽혀진 정신속의 딜레마.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경험이나 정신적 측면에서 더 많이 주목되어야 할 현상이라는 생각이….

뭐 쓸데 없는 이야기네. 분류는 확실하게 잡설.


2009. 8. 09. 10:43


혀. 맛, 말, 위

2009. 8. 05. 16:34

혀. 맛, 말, 위무… 혀의 가장 중대한 기능 중 하나는 단연 성적 기능일 것이다. 혀 없는 키스, 혀 없는 섹스를 상상 할 수는 없다. 손 없는 동물들은 몸을 햝는다. 손이 없으니 몸을 햝을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입이 손이고, 타액이 유일한 처방이다. 상처도 햝고, 털도 고르고, 성기, 젖, 두루 두루 햝는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햝지 않는다. 손이 있으니 입을 쓸 필요가 없다. 오직 타인의 몸을 햝을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손끝의 음식물을 빨아먹을 때가 될 것이다. 인간은 상처도 손으로 만진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어리석음인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만약 상처를 햝는다면, 딱정이는 또 다른 상처로 이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건조한 손보다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혀가 상처를 만지기엔 더욱 적합하다. 오늘은 손을 봉하고 내 몸을 햝아본다. 인간이 스스로의 몸을 햝는다는 것. 이것은 그 적합성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가련한 자위행위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 인간은 오직 타인의 몸을 햝을 뿐이다. 혀가 닿지 않는곳이 많다. 짐승이라면. 혀가 닿지 않는 곳에 상처 입은 짐승이라면.


본의 아니게 기독교

2009. 8. 01. 22:38

본의 아니게 기독교 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부대끼다 마주친 주제 중의 하나가「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주제였다. 교목실 목사들의 교수임용 문제로 한창 싸우던 당시에도, 그들이 내세우던 내용 중에는 이같은 내용들이 있었고 어쩔수 없이 이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관련 내력을 살피다 성급하게 내렸었던 결론은 결국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도 창조과학마냥 미국에서 성급하게 수입되었다는 것이었고, 그 성격이 모던하다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학문과 신앙을 통합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들에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었고 극심히 반대할만한 성질의 것도 아닌듯 하여, 그 프레임 속에서 논쟁을 이어 나갔었다. 당시 내 입각점은 “학문과 신앙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하여 학문과 신앙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로 축약할 수 있겠는데, 사실 그들이 말하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것은 통합이라 불리어질 성격의 그것이 아니라, 혼재 혹은 짬뽕 잡탕 등으로 불리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은 양자간의 통합이 아니라 신앙이 학문마저 보증한다는 인식의 오류였다. 또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학제간 연구라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복잡 다단하여 하나의 학문이 가지고 있는 특정 관이 현실을 모두 설명해 내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학제간 연구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학이 현실을 단면적으로 볼때 놓치는 것들을 여러 학문을 동원해 다면적으로 보겠다는 시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둘의 학문이 같다거나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양자간에 무언가를 살피려면 그것들을 뭉텅거려 사고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둘은 이미 구분된다. 그렇다면, 과연 만날까? 만나는 특정 지점은 어디인가? 딱 바로 그 부분, ‘특정’지점에 대해서 세밀하게 보아야 한다.


지금 있는곳은 촌이

2009. 7. 24. 19:39

지금 있는곳은 촌이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울타리가 없으며, 비교적 문명화가 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휴대폰에 의존한 기록행위가 이루어진다. 나는 비교적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고 펜으로 종이에 글 쓰는것이 익숙치 않았는데, 컴퓨터 사용이 불편하니 펜으로 종이에 잘도 써댄다. 예전에는 컴퓨터에 의존한 글쓰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 약간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을듯 하다. 인간은 닥치면 하는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성장시킬 상황으로 자신을 이끄는것. 상황이 동일하면 성장에도 한계가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상황변화가 자기가 이끈다고 해서 쉽게 변하는 것일까? 그렇기도하고 아니기도 하겠지. 어제 새벽에는 복실이가 새끼를 7마리 낳더니 오늘은 두리가 5마리 낳았다. 지금 계속 낳는중. 참 공교롭게 오늘은 복날. 그것도 중복.


창조과학 종교전쟁 등등

2009. 7. 24. 09:53


저는 학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수업이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창조와진화 수업이었습니다. 제가 수업을 힘들어 하는 것은, 두가지 경우입니다. 강의내용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거나 혹은 교수에 대한 회의감이 들 경우입니다. 창조와진화 수업의 경우에는 두가지 모두 해당되었습니다. 뭔가 ‘학문’이라 할 수 있는 토대가 결여 되어 있다는 느낌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그런 회의감에 대한 토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회의감 속에서 저는 ‘창조과학’에 대한 어떤 입장을 세웠습니다. ‘창조와 진화’수업이 저에게 준 것은,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더라도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답안지를 쓸 수 있는 영악함과 지금 이 글에서 말하게 될 어떤 입장들이 되겠습니다. 먼저 강조해서 말씀드릴 바가 있다면, 저는 도킨스의 저서는 물론 창조론의 저서는 물론 신학저서는 물론 [종교전쟁]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음을 알려 드립니다. 제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종교전쟁]에 대한 것들은 세인트님이 올려주신 강연회에서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창조과학논쟁의 두 축
창조과학을 판단할 때 이용되는 두가지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의 기준입니다. 종교를 축으로 한 논쟁은 비교적 이루어지지 않는 편인건지, 아니면 내부논쟁이라 드러나지 않는건진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전쟁]의 공저자 중 한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제기하고 계시는 듯 한데, 사실 창조과학운동에 관심있는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그저 창조론을 끄덕끄덕하며 받아들이는 분위기일 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창조과학운동이 주로 쟁점삼고 대립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종교성’이 아니라, ‘과학성’판단 여부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종교전쟁]에서도 다루어지듯이 그것의 ‘과학성’이 부정되었을 때, ‘창조과학운동’은 그저 ‘종교운동’으로 치부되는 것이지요. ‘창조과학운동’이 목표하는 바도 그것이 종교로 인지되는것 보다는, 비교적 ‘확실한 지식’으로 인정되고 있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기를 위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논쟁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요 쟁점인 ‘과학’이라는 축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글을 보아하니, 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가고 있네요. 과연 올바른 촛점인지 저는 의아할 뿐입니다.

창조과학과 과학
창조과학이 과학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판단할때 우선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이라는 기준으로 창조과학을 판단하겠다면, 그 기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창조과학이 어떤것인지 판단할 것이겠지요. 그런데, ‘과학’의 정의에 대한 문제는 과학철학적 주제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과학철학자는 ‘칼 포퍼’나 ‘토마스 쿤’을 들 수 있겠지요. 저는 과학철학에 대해 아는게 없지만, 어쨌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의한 ‘과학’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겠지요. 그것들을 검토하고 그들의 정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창조과학의 ‘과학성’에 대해 이런저런 판단이 이루어지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에 있어서 창조과학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종교전쟁]을 공저한 과학철학 전공의 모 교수는 그런 기준들에 부합하는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네요. 만약에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에 대해 검토하고 비판하실 의도가 있으신 분들은, 기존의 과학철학자들의 이론을 검토하는 노고를 하신 후 이를 바탕으로 이 입장을 비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제가 수업을 들은 바에 따르면 “창조과학은 기존의 과학을 넘어서는 새로운과학.”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마 경험적 반복 실험을 통해 증명해낼 수 없는 영역이 창조론이기 때문에 이리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입장은 앞서 언급한 입장과 배치될 것이 없습니다. 기존의 과학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선언은 창조과학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기존의 과학계가 가지고 있는 과학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과학이라는 개념을 재정립 할 것이며, 그 재정립된 과학의 한 귀퉁이에는 창조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도전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과학계와 창조과학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과학’이라는 개념의 외연이 이처럼 상이하기 때문에, 기존의 과학계가 창조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창조과학이 말하는 새로운 과학개념에 대해서 들어 본 바가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과학 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지금 창조과학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화론이나 기타 썰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립된 개념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창조과학은 사상누각일 뿐이지요. 그 어떤 학문도 정립된 개념 없이 시작하지 않습니다. 만약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학우분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으시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학교측에 적극적으로 건의해 주십시오.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데 왜 수업에는 안가르쳐 주느냐고.

가치와 사실
가치와 당위의 영역과 사실과 객관의 영역은 구분됩니다. 그 둘의 상관관계는 제가 알기로는 아직 명료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과 객관의 영역이 가치와 당위의 영역과 일치한다고 보는 입장을 ‘자연주의’라고 합니다. 그것은 비단 과학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 뿐만이 아니라, 윤리학에도 해당됩니다. 어쨌든, 저는 가치의 영역과 사실의 영역을 구분해서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혹 사실과 가치가 일치한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 사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외부세계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가치라기 보다는 외부세계에 반응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난데없이 가치와 사실의 구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과학의 객관성과 그 설득력은 과학이 그 가치와 당위의 영역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치나 당위를 다루지 않고 무목적적인 도구적 이성에 머물겠다는 과학의 선언과 그 노력이 과학을 객관적이고 합리적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것은 아닙니다. 과학도 인간이 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의 영역을 침범하곤 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연구를 위한 물적 토대인 자본과 관계하고 있으며, 어줍잖은 민족정신과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주의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가 적대시하는 사상들이 있습니다. 진보사관을 바탕하고 있는 사회진화론, 빨갱이 마르크스, 안티크리스트 니체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와진화 수업시간에 배웠던 진화론의 폐단에는 이런 설명이 있었습니다. 진화론의 그 사상은 마르크시즘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주었고, 히틀러의 민족우월 사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히틀러가 이용한 사이비 과학이 우생학이며 히틀러는 니체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더라라는 식의 설명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에 끼친 영향의 기저에는 자연주의이거나 자연주의에 준하는 가치판단들이 깔려 있습니다. 과학이론인 진화론의 상상력은 많은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지요. 이것은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사실과 객관의 영역에 머물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의 영역 즉,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쳤기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생학이 과학이론으로만 머물고 나치의 법률로 화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러한 대량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허접한 과학이론중의 하나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겠지요. 니체의 윤리학은 자연주의 윤리학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그뿐입니까? 모든 학문이 신학의 시녀노릇하던 시절에도 자연주의는 그 위세가 대단했지요. 그 대표적 예가 자연신학입니다. 가치와 사실에 대한 무분별한 연결은 이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겪은 위험성입니다. 도킨스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도킨스의 몇 개념들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객관적 과학의 영역에서 검증하고 있다고 보기 보다는 사회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 과학의 논의방식을 벗어났을때의 폐단은 또 있습니다. 대국민 사기극 황구라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원천기술의 유무 여부를 과학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기술보안 등을 이유로 논의를 막고는 병원에 들어가고 언론을 이용하곤 했죠. 저에게 창조과학운동이 행하고 있는 것을 일본우익의 역사왜곡에 비유하는 모교수의 비유는 확실하게 와닿습니다. 창조과학운동이 사회운동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기존의 과학계가 받아들이지 않아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입증책임이라는게 있지요. 지금은 확실하게 그 입증책임이 창조과학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있고, 기존의 과학계는 그 설득 대상입니다. 결국 쟁점은 창조과학의 설득력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맺으며
저의 개인적인 느낌은 절대반지를 획득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연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과학으로 종교를 없애려는 시도이든, 종교로 모든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든, 자신이 하는 하나의 학문으로 세상을 모두 이해해 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이해 할 만 합니다. 과학으로 종교에 도전하는 이들의 입장도 자연주의적 입장이지요. 과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문을 바탕하여 모든 것들을 설명해보고자 하는 욕망은 신학으로(성경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닮아있습니다.

저도 물론 한때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절대반지는 없지요. 공부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학문마다 고유의 문제영역이 있고 그것들을 다루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 분야에서 말해지는 개념들은 말해지는 것은 같아도 의미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인과성’을 과학의 ‘인과성’과 같은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인지요?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우성’과 ‘열성’이라고 표현된다고 해서, 그것이 평가적 단어인 우월종자 열등종자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인지요? 그것은 유전 과정에서 특정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사실기술적 단어로 한정해서 읽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비스,

“만약 성서의 성령이 우리를 주재하고 있다면, 그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소녀시대를 완벽하게, 혹은 적절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으로 만일 소녀시대의 활동들을 성서의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도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성령은 우리의 주재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결국 그 성령은 진정한 성령이 될 수도, 윤리적 가르침의 근원으로서 신뢰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누렁이는 진돗개이다

2009. 7. 21. 14:31

누렁이는 진돗개이다. 어릴적부터 사냥개 훈련을 잘 받은 후, 우리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놈은 사람 말을 꽤 잘 알아 먹는 편이다. 딱히 붙들어 매어 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람 말을 알아 듣는다. 다만 흠이라면, 사냥개의 본성 탓인지 사냥감이 눈 앞에 있으면 정신 못차리고 달라든다. 가끔은 집에서 기르는 닭이며 오리 염소 등을 잡아버린다. 간혹 이웃의 가축을 도륙할라 치면 금전적 손해가 장난이 아니다. 산책중에 너구리라도 숲에서 튀어 나올라 치면 숨을 씩씩 거리면서 달라든다. 이놈의 또 한가지 특성은 어지간 해서는 짖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네 잡견들이 아무리 짖고 달라들어도 절대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잡견 옆에서 조용하고 유유히 오줌을 갈긴다. 그 위풍을 보고 있자면 진정 강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개들에게 있어서 오줌을 갈긴다는것의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이놈의 영특함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여서, 아버지는 누렁이는 절대 된장을 바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