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창조과학' Tag

과학

토요일, 6월 27th, 2009

“자연과학은 엄밀한 수학적 법칙으로써 사태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라는 건, 예측력이 전무하다. 순수한 과학의 기준으로 볼 때, 이들은 그것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학부 수업 때에도 창조과학을 가르치던 교수는 ‘창조과학’을 단순한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차라리 이들에 대한 판단 준거는 신학이 되어야 할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논의가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창조과학 운운하는 이들은 과학의 개념부터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무신론적 ‘과학’이 무신론적이라고 해서 굳이 대립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그것 그대로의 설명력과 예측력으로 평가되면 될 것을.


근황

화요일, 3월 18th, 2008

1. ‘창조와 진화’라는 수업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음. ‘진화론’이 파시즘의 시초라는 신비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 그럼, ‘유신론’이 십자군전쟁과 대학살의 시초??

2. 이번학기 평안하게 지내려고 했건만, 모임이 3개나 잡혀버림. 논어, 성경-화엄경, 유교의 시중과 그리스도교의 식별.

유교의 시중과 그리스도교의 식별
김승혜 지음/바오로딸(성바오로딸)

3. ‘유교의 시중과 그리스도교의 식별’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이야기라기 보다,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는게 정확할 것 같음. 이냐시오 로욜라도 언급됨. 정약용의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이냐시오 로욜라의 사상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서, 그렇게 거슬러 올라간 것들을 시대별로 인물별로 비교하고, 정약용이 이를 종합한 것으로 보는 시각. 여기서 언급되는 유교 경전들에 대한 해석도 ‘정약용’적인 전개인 것으로 추정됨. 내가 가지고 있는 원문경전으로 봤을때는 차이나는 부분이 좀 있었음. 내가 전문가는 아니니까 ‘추측’일 뿐임.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완전히 부작不作적인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함.

3. 함께 보는 시각과 달리보는 시각. 그러니까, 분별discriminate 에 대한 가치판단에 대한 서술이 있음. 묵가의 경우 분별이 별애(別愛)의 시작이기에 나쁜 것으로 바라봄. 묵가는 겸애(兼愛)를 지향하였음. 묵가는 유교를 별애(別愛)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였음. 불가는 분별식(分別識)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구별하고 차등함으로써 번뇌를 가져오는 것으로 여긴다고 서술. 하지만,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유교의 시중과 그리스도교의 식별’이니 당연히 분별을 전제로 함.

4. 이국은 교수님은 ‘현상학’의 ‘지향성’개념을 들먹이며, concern; 문제와 나의 주관적 일치를 언급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퇴계의 ‘미발의 존양공부’를 설명하지 못함. 문제, 그 속에서 문제를 풀려 노력하는 것 또한 분별적 태도를 취하는 것임. 문제속에서 내가 주관적 상태가 된다고 해서 분별적 태도가 아닌 것은 아님. 문제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자체가 시비와 선악을 가리는 사고에 물들어 있다고 나는 생각함. 분별이 없는 곳에는 문제 또한 없음.

5. 화엄경에는 석가가 보리수 나무에서 깨달음을 얻고, 보리수 나무에 앉아 있으면서 동시에 수미산을 오르는 내용이 나옴. 한 성인의 각성을 통해서 진리가 온 세계로 퍼지는 것을 신비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지승원 교수님은 예수가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인류가 구원받는 것과 비교해서 설명. 진리의 퍼짐.